19화 레미제라블 (2)
환락가가 불을 밝힌 지 오래지 않아 비가 추적추적 쏟아지기 시작했다.
“에이, 빌어먹을. 개장하는데 비가 쏟아지고 지랄이야!”
한창 호객 행위를 준비 중이던 상인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서둘러 캐노피 천막을 펴기 시작했다.
예정되지 않은 빗줄기 속에서 신이 난 이는 온갖 물건을 수레에 싣고 다니는 잡상인뿐이었다.
“우산! 우산 싸게 팝니다!!”
“나도 우산 하나 주지.”
모처럼 혼자가 된 태일이 잡상인에게 다가가 비닐우산 하나를 가리켰다.
“네네, 감사합니다!”
태일은 잡상인으로부터 우산 값을 지불하며 새삼 자신의 상황이 우스워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아저씨, 한 푼도 없이 환락가를 돌아다니면 안 돼요!”
“형, 여긴 돈이 전부인 곳이라구요!”
앨리스와 지우는 역전 밖으로 나가는 태일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어 대며 제각기 챙겨 둔 돈들을 태일에게 쥐어 주었다.
누군가의 주머니를 털어서 모은 돈임을 빤히 알고 있지만, 아이들의 성화에 받지 않을 수도 없었다.
호텔에서 나온 순간부터 너무나 자연스럽게 돈부터 긁어모은 아이들. 몸에 벤 녀석들의 생존력이 대단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녀석들의 모습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태일은 건네받은 비닐우산을 펴면서 잡상인에게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이봐, 이 근방에 괜찮은 바(Bar) 있나?”
“술집 말씀이십니까?”
“호스티스 나오는 곳 말고. 조용히 술 한잔할 수 있는 곳이면 되는데.”
잡상인은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눈빛으로 태일을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환락가의 밤 문화를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은 귀가 찢어질 정도의 음악이 항시 울리는 클럽이나 카지노 따위를 찾는다. 거기서 운이 좋다면 괜찮은 이성 하나를 낚은 뒤, 그럴듯한 호텔 안에 들어가 뒹구는 것이다. 물론 그런 호구를 노린 밤거리 여우들이 환락가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그처럼 환락가는 최대한 지저분하게 망가지기 위해 오는 곳이건만, 태일은 엉뚱하게도 조용한 바를 찾고 있었다.
“왜? 없어?”
“아닙니다. 있긴 하죠. 비싼 술을 마실 수 있는 곳도 아니고, 분위기도 별로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내가 찾는 곳이 바로 그런 곳이야.”
잡상인은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손가락으로 골목 끝자락을 가리켰다.
“이 안쪽으로 쭉 들어가다가 우측으로 돌아가면 지하에 ‘레미제라블’이라는 낡은 간판이 하나 있습죠. 거기로 가 보십쇼.”
“…고맙군.”
“전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거긴 정말이지 재미없는 장소라구요.”
“그건 걱정 말고… 담배나 한 갑 주지.”
기껏 담배 한 갑을 사서 한 개비를 입에 문 태일은 한동안 가만히 골목 안쪽을 바라보았다.
정작 불은 붙이지도 않은 채.
잡상인은 그런 태일의 눈치를 보며 슬쩍 물었다.
“불 안 필요하십니까? 라이터 싸게 드릴 수도 있는…….”
“됐어. 금연 중이라서.”
태일은 그렇게 한마디를 던진 후, 우산을 쓰고 잡상인이 안내해 준 방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잡상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별 미친…….”
* * *
Les Misérables.
환락가 구석에 위치한 레미제라블에는 평범한 술집들과 달리 해가 뜰 새벽 시간이 되어서야 슬슬 손님이 모여들었다.
고급 술 따위 팔지 않는 이 허름한 바의 단골손님들은 다름 아닌 환락가의 주민들이었다.
밤새 손님들을 상대하며 음악과 술, 또는 약에 절여진 뒤, 이곳을 찾는 것이다.
레미제라블의 바텐더는 세 명 정도가 돌아가면서 맡았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말수가 적었지만, 셋 모두 손님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해 주었다.
환락가의 주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는 차마 타인에게 밝히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거나 끔찍한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외부로 새어 나가는 일은 결코 없었기에 손님들은 바텐더에게 스스럼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바텐더는 싸구려 술로 사연에 맞는 칵테일을 제조해 주었다.
환락가 주민들은 그 싸구려 칵테일을 마시기 위해, 혹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위해 레미제라블을 찾았다.
이제 막 환락가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시간이라 레미제라블에는 당연히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끼이익.
바의 문이 열리고…….
입구 쪽을 보는 바텐더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긴 코트를 걸친 채 불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사내.
바에 들어온 남자가 비닐우산을 벽에 기대놓은 뒤, 너무나 자연스럽게 바텐더 앞에 와서 앉는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술 한잔하려고 왔는데.”
바텐더가 가만히 손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메뉴판이라고 해 봐야 종류는 다섯 가지밖에 없다.
‘스카치(Scotch)’, ‘꼬냑(Cognac)’, ‘보드카(Vodka)’, ‘데킬라(Tequila)’, ‘칵테일(Cocktail)’.
불친절한데다 무식하게까지 느껴지는 제멋대로의 메뉴판.
종류만 달랑 적어 놓았을 뿐, 브랜드나 주요 정보는 하나도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혼합주인 칵테일마저.
술에 자부심이 있는 주당이라면 욕지거리를 퍼부어 댈 정도로 끔찍한 메뉴판이었다.
아마 실망한 손님은 곧 바를 나가 버릴 것이다.
그러나 손님의 반응은 바텐더의 예상을 빗나갔다.
“칵테일.”
바텐더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가만히 손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물고 있던 담배를 빼서 토막 낸 그가 바텐더와 시선을 마주했다.
레미제라블의 암묵적 룰(Rule).
― 칵테일은 손님의 사연에 맞춘다.
이걸 설명해 줘야 할까?
잠시 고민하고 있던 찰나, 손님이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왜? 내 사연을 들려줘야 하나?”
“…….”
바텐더는 눈앞의 이상한 손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님은 제멋대로 입을 열었다.
“내가 찾고 있는 여자가 하나 있는데 말이야.”
‘Les Misérables’.
산업 시대의 그 낡아 빠진 이야기를 세연은 정말 너무 좋아했다.
오래된 판본을 구해서 심심할 때마다 읽고 또 읽곤 했다.
몇 번이나 반복해 읽었으면서도 몇몇 장면에서는 매번 어김없이 눈물을 지었다.
그녀는 50구역 유흥가 구석의 지하 공간을 인수했고, 책의 이름과 같은 술집을 만들었다.
세연은 완성된 바를 보고 황당해하는 태일을 향해 빙긋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내가 왜 이 공간을 만들었는지 너도 곧 이해하게 될 거야.”
레미제라블은 게릴라 작전이 시작되기 바로 전날, 소소하게 개점을 알렸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매일같이 치러지는 전투 속에서 많은 동료를 잃었고, 사람들은 지쳐 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세연은 가끔씩 바텐더로 일하며 손님들의 이야기들을 들어주곤 했다.
오래지 않아 레미제라블은 태일을 비롯한 혁명단원들과 유흥가 주민들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그녀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이름과 인테리어.
그 레미제라블이 이곳에 똑같이 존재한다.
그리고 아마 이쪽이 굳이 따지자면 ‘원조’일 것이다.
태일은 바텐더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세연, 그녀를 찾고 있어. 혹시 알고 있나?”
태일은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텐더의 얼굴에 떠오른 미묘한 감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바텐더는 잔잔한 말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이곳에 사람을 찾기 위해 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죠.”
이제 20대 초반쯤 되었을까.
바텐더의 팔은 흰 와이셔츠로 가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육으로 굴곡이 져 있었다.
큰 키에 근육질의 체격을 가진 그는 자세히 보면 바텐더보다 모델이나 운동선수 쪽이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그런 바텐더의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명백한 경계심이었다.
“…어떻게 아는 사이이신가요?”
단골손님들이 여기까지 들었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레미제라블의 바텐더가 손님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경우는 결코 없었으니까.
더구나 그는 환락가의 수많은 여우들이 군침을 흘리며 작업을 걸어도 결코 넘어가지 않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세연의 이름이 언급되자 스스럼없이 입을 연 것이다.
태일은 바텐더를 마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연인이야.”
바텐더의 얼굴이 차갑게 굳는다.
“그럴 리가…….”
태일은 고스란히 감정을 드러낸 바텐더에게 보란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세연은 너무나 매력적인 여자였다. 세연의 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남자들로부터 분노와 질투가 뒤섞인 눈빛을 받는 데 익숙해져야 할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바텐더는 너무 어려 보였다. 이쪽 세계에서 세연이 사라진 지 5년이 흘렀다고 했는데, 5년 전이라면 눈앞의 건장한 바텐더도 고작 지우 정도 나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세연이… 지나칠 정도로 인기가 많긴 하지.”
“…….”
바텐더의 관자놀이에 핏발이 섰다.
하지만 태일은 고작 혈기왕성한 바텐더를 놀려 먹기 위해 바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칵테일을 얻어먹기는 글렀다고 판단한 태일이 팔짱을 끼고 나지막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레지스탕스.”
바텐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도부와 만나고 싶은데, 제대로 찾아온 게 맞겠지?”
태일은 바텐더의 명찰에 씌여진 이름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름이 ‘도영’인가? 안내를 좀 받고 싶은데.”
세연의 흔적이 남은 장소, 레미제라블.
바의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태일은 이 장소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러자 줄곧 태일을 노려보고 있던 바텐더가 내뱉듯 말했다.
“함부로 날뛰지 말라는 경고, 못 들었나 보군.”
태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바텐더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도영의 안내에 따라 바의 뒷문을 통해 창고로 들어서자, 알코올 향 대신 쇳가루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바를 찾는 손님 숫자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상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쌓인 상자들 안에는 술 대신 총알이나 무기 따위가 가득 차 있을 게 분명했다. 이래서야 외부인이 창고에만 들어와도 바의 정체를 눈치챌 것이다.
그 허술함에 태일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베짱이 좋은 거야, 아니면 요령이 없는 거야?”
아마 후자 쪽일 것이다.
그러나 도영은 못 들은 체하며 태일을 창고 안쪽으로 안내했다.
“아무것도 손대지 말고 조심히 들어와. 이쪽으로.”
세연의 연인이라는 말에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여전히 말투에 날이 서 있다.
창고의 끝자락, 술병이 늘어선 진열대에 도착하자, 바텐더가 벽에 걸린 레미제라블 영화 포스터 뒤쪽을 뒤적였다.
끼이이이―
곧이어 진열대가 회전문처럼 돌아가면서 뒤쪽에 숨겨진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연이가 보면 기절하겠군.”
도영이 다시금 태일을 노려보았지만, 딱히 대꾸하지는 않았다.
세연에 대해 알고 있다면 태일의 말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의 창고에 무기들을 가득 채워 두고, 창고 끝자락에 어설픈 기관을 설치하는 건 결코 세연의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비밀 통로는 마치 개미굴처럼 미로로 만들어져 있었다. 레미제라블뿐 아니라 여러 장소들을 연결해 둔 것이다.
도영은 랜턴을 든 채 앞장서서 태일을 안내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면 금세 길을 잃을 것이다.
그렇게 10분쯤 걷자 나무 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영은 문 앞에 멈춰 서더니, 주머니에서 랜턴 하나를 꺼내 태일에게 건네며 말했다.
“혼자 들어가. 난 바를 비워 둘 수가 없어서.”
“그래, 고맙군.”
태일은 그가 건네는 랜턴을 받아 든 뒤, 나무 문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 순간, 도영이 태일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
“뭐지?”
“진짜냐?”
“…….”
“진짜 세연 누나랑…….”
녀석의 눈동자에 절절한 감정이 떠오른다.
물론 태일은 그런 순정을 배려해 줄 마음은 없었다.
“그래, 진짜야.”
태일은 힘없이 떨어지는 도영의 손을 무시한 채 과감히 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이이…….
지하의 방 안, 원형 테이블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태일에게 방 안에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들 셋은 하얀 가면을 쓰고, 검은 망토로 온몸을 덮고 있었다.
50구역이 생긴 순간부터 존재해 온 지하조직, 레지스탕스.
그 비밀 조직의 간부들이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