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8화 (19/220)

18화 레미제라블 (1)

“이 아저씨야?”

“그래. 혼자서 본부를…….”

태일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저희들끼리 쑥덕거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살짝 두통이 밀려왔다.

호기심, 의심, 두려움 따위가 뒤섞인 얼굴로 태일을 구경하는 아이들 때문에 졸지에 동물원의 원숭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얘들은 다 뭐냐?”

태일은 제멋대로 혹을 주렁주렁 달고 온 지우를 노려보았다.

“같이 생활하던 친구들이에요. 얘들아, 그러고 있지 말고 형님한테 인사해. 빨리! 쓰읍, 버릇없게!”

일부는 지우와 비슷한 또래이지만, 대부분은 소매치기조차 못할 정도의 어린 코흘리개들이다.

지우는 아예 뻔뻔하게 나가기로 작정했는지, 능청스럽게 아이들을 태일 앞에 줄지어 세웠다.

“미치겠군.”

태일은 이마를 감싸 쥔 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 와중에 앨리스는 지우를 따라온 여자아이 하나와 손을 꼭 붙잡은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태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보다 더 어린 아이의 손을 쥔 앨리스의 눈빛에는 절절함마저 묻어났다.

이래서야 쫓아낼 수도 없다.

“형, 걱정 말아요. 얘들 다 각자 자기들 밥벌이는 하거든요. 나름 중요한 정보들을 잔뜩 갖고 왔다구요.”

태일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먼지가 가득 쌓인 역내 의자에 걸터앉아 팔짱을 꼈다.

“좋아, 일단 얘기나 들어 보자.”

보스 샬롯이 태일에게 죽은 지 약 50시간이 지난 현재.

“매드 불, 그 의리 없는 자식이 지부를 통째로 대륙 놈들한테 들어다 바쳤어. 샬롯의 자식들 눈알 30개를 뽑아서 충성의 표시로 보냈는데…….”

“잭슨이랑 그 패거리 전부 제이크, 그 또라이한테 뒈졌어. 사지를 토막 내던 놈들인데, 지들 사지가 잘려서…….”

“사무라이들이 뒤를 봐준 걸 거야. 우리 쪽도 사무라이들이랑 손잡은 빌이 윗대가리들의 목을 전부 잘라 버렸거든. 사무라이 놈들이 제이크 녀석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대다수의 어린 꼬마들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머리가 제법 큰 다섯 명의 소년은 자신들이 목격한 충격적 광경에 대해 손발 동작까지 섞어 가며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일화 하나하나가 10대 아이들에게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것들이지만, 마치 영웅담이라도 되는 것처럼 으스대며 자랑하고 있다.

“제이크가 외팔이 후크의 심장을 뽑아서 후크의 눈앞에 가져다 대는데…….”

“뻥치지 마! 외팔이 후크는 가슴에 칼이 꽂히자마자 돼지처럼 울면서 죽어 버렸다고!”

“아니야! 내가 분명 봤는데, 후크 눈앞에 뽑은 심장을…….”

“그만!”

결국은 태일이 나서서 이 소모적이고 자학적인 이야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뒤쪽의 꼬마들은 거의 울음보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래도 이 끔찍한 수다 속에서 분명 새롭게 알게 된 정보들이 있었다.

― 샬롯의 지배하에 있던 조직이 그야말로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다.

아이들의 증언들은 일관되게 그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조직의 붕괴 속도가 하도 빨라서 듣고 있던 태일마저 황당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보스를 잃었다고 해도 고작 이틀 사이에 조직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수 있나?”

여왕벌을 잃은 벌들은 다시금 여왕벌을 키워 낼 뿐, 벌집 자체를 무너뜨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샬롯의 부하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저희끼리 죽고 죽이는 혈투를 벌이면서 조직 자체를 불사르고 있었다.

조직 보스의 자리를 노리고 벌어지는 갈등이 아니라, 말 그대로 조직 자체가 사분오열되는 양상이었던 것이다.

그때, 태일의 중얼거림을 들은 지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미리 들어와 있던 프락치들이겠죠. 빤하잖아요?”

“…….”

대륙에서 온 천중회, 사무라이의 전통을 가진 카게구미, 밀수로 큰돈을 번 페노제.

50구역이 만들어지면서부터 환락가에 들어온 세 조직은 오랫동안 팽팽한 균형을 유지해 왔다.

세 조직 사이에서 사소한 갈등이야 늘 벌어졌지만, 결코 어느 한쪽을 완전히 무너뜨릴 정도의 충돌은 없었다.

두 조직이 소모전을 벌이게 되면, 이득을 보는 것은 남은 한쪽일 테니까.

그러나 7년 전, 사건이 터졌다. 세연에 의해 페노제가 무너지고, 당시 페노제의 보스였던 샬롯의 오빠도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은 페노제를 무너뜨린 게 레지스탕스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정작 레지스탕스는 페노제의 사업장을 차지하지 않았어요.”

세연은 당연하게도 페노제의 카지노나 술집 따위의 사업장 운영에 관심이 없었고, 머리를 잃은 사업장들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하루아침에 무너진 페노제와 지배 체제에 공백이 생긴 페노제의 사업장.

천중회와 카게구미에서 그 사업체들을 흡수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3년 전에 웬 여자가 우리들더러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자신이 페노제의 후계자라면서.”

진위 확인조차 어려운 유서를 들고 정통성을 강조하며 나타난 샬롯은 페노제의 후계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페노제의 잔당 몇이 그녀를 추대해 길거리 패거리들을 흡수했지만, 샬롯의 세력 자체는 다른 두 거대 조직에 비해 미약한 수준이었다.

물론 두 조직에서는 샬롯의 소유권 주장에 대해 코웃음을 쳤다.

샬롯이 ‘마로트’라는 조직을 만들 때에는 장난질이라고 손가락질했으며, 그녀가 인수한 폐건물에 조롱 섞인 축하 화환을 보낼 정도였다.

하지만 샬롯이 장난처럼 만든 인형극단, 마로트는 고작 3년 만에 무서운 속도로 몸집을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 3년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지우를 비롯한 아이들은 혼돈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걸 목격했다.

샬롯은 다른 두 조직에서조차 버림받은 부랑배들을 긁어모았고, 암살, 인신매매, 밀수 등을 통해 닥치는 대로 돈을 모았다. 이어 천중회와 카게구미에서 갖고 있던 사업체를 막무가내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천중회와 카게구미 측에서 몇 번이나 자객을 보냈어요. 전쟁도 몇 차례나 벌어졌고요.”

샬롯은 그 모든 방해 속에서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아무도 보스를 죽이지 못했어요. 몇 개월 전, 대륙 놈들과 사무라이들이 함께 공격해 온 적도 있었는데…….”

“이겼다는 거군.”

길게 늘어지는 지우의 이야기를 대신 끝맺은 사람은 태일이었다.

“…네.”

샬롯은 천중회와 카게구미의 협공마저도 이겨 냈다.

숫자의 열세, 무기의 부족, 경험의 부족… 샬롯이 다른 두 조직에게 이길 수 없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샬롯은 다른 두 조직을 압도했고,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SB…….”

앞에 있던 지우 또래의 소년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태일은 그 담뱃갑을 통째로 빼앗았다.

“아, 뭐야! 내놔요!”

“시끄러.”

세연이 워낙 싫어해서 끊어 버린 담배를 몇 년 만에 입에 물었다.

“라이터.”

지우가 재빨리 라이터를 꺼내 건넸다. 그러나 태일은 라이터를 받았음에도 담배에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 상태 그대로 태일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결국 또다시 건드려서는 안 될 물건에 손을 댔군요. 7년 전에 그 일을 겪고도…….”

카게구미와 깊이 연관된 게 분명한 옷가게 마담의 반응.

그녀는 SB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샬롯이 사용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로 보아 SB가 금기시된 것은 그저 세연에 대한 공포심, 혹은 트라우마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샬롯을 제외한 보스들은 SB의 효력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갑자기 강력해진 샬롯과 테디 같은 괴물들의 등장에 당황했을 것이다.

“드림 코퍼레이션은 이 기회에 새로운 고객을 찾고 있습니다. 전 그 거래를 막고 싶고, 아마 당신 역시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레이는 주인 잃은 미르파우더의 고객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샬롯은 지금껏 미르파우더를 독점해 왔고, 강력한 두 조직과의 전투가 계속되는 와중에서도 독점적 계약은 유지되었다.

즉, 다른 조직에서는 그전까지 미르파우더의 용도를… SB의 제작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드림 코퍼레이션은 미르파우더의 새로운 구매자를 찾고 있다. 샬롯이 SB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물론, 그 효력도 지금쯤이면 모두 알게 되었을 것이다.

“엘리스. 데려온다. 외부인.”

테디의 감시 속에서 남몰래 소울벌룬을 만들던 마로트의 ‘분장실’을 떠올렸다.

반쯤 이성이 없는 테디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어린아이들이었다. 소매치기에도 나서지 못할 정도로 어린 꼬마들.

샬롯의 감독하에 그토록 어린아이들이 SB를 직접 만들고 있었다. 지금 태일의 눈앞에 있는 꼬마들 같은.

생각을 마친 태일이 입에 문, 불붙지 않은 담배를 뺀 뒤, 그대로 부러뜨렸다.

그 모습에 담뱃갑을 빼앗긴 소년이 발을 동동 구르며 볼멘소리를 냈다.

“아, 아깝게…….”

“쉿!”

눈치 빠른 지우가 태일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며 황급히 친구의 입을 막았다.

태일은 담뱃갑과 라이터를 제각기 주인들에게 던지듯 돌려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우와 앨리스를 비롯한 모든 아이들이 태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들…….”

아이들은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몇몇 녀석들이 재빨리 어린아이들을 뒤쪽으로 밀어냈다.

애당초 태일의 입장에서 보면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꼬맹이들 사이에서도 분명 지키는 쪽과 보호받는 쪽이 있었다.

실컷 끔찍한 목격담을 늘어놓은 다섯 명은 지우처럼 어느 정도 나이가 된 아이들.

나머지 울먹거리고 있는 스무 명가량은 전부 열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머리가 큰 다섯이 동생들의 앞에 서 있었다.

태일은 그런 아이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너희들, 쫓기고 있는 거냐? 아니, 너희 뒤에 있는 그 꼬맹이들이 쫓기고 있는 건가?”

지우와 다섯 명의 소년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는 태일을 바라보았다.

“공장에서… 데려온 거냐?”

지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미쳐 버린 테디를 감시역으로 앉혀 놓긴 했지만, 샬롯은 조직원들에게 SB의 제조 과정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급격히 세력을 불린 만큼 조직원에 대한 신뢰가 약한 것은 당연한 노릇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현재 50구역에서 SB의 제조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이들은 실제 제조 과정에 투입된 적이 있는 아이들뿐이었다.

소년들 중 하나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킬러베어가 얘들을 탈출시켰어요. 저희를 탈출시키면서 동생들을 반드시 지키라고… 했어요.”

샬롯에게 진심으로 충성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이들에게 동정심을 느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킬러베어’라는 놈은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아이들을 탈출시켰다.

“사무라이도, 대륙 놈들도… 모두 얘들을 찾고 있어요.”

천중회와 카게구미는 이미 아이들을 손에 넣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애당초 샬롯이 죽은 뒤에 벌어진 사태는 조직의 사업장이나 보스의 자리를 노린 소요가 아니었다.

SB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일 뿐이다.

지우는 그런 아이들을 모두 태일 앞으로 데려왔다.

“젠장…….”

전쟁을 말리고 두 조직을 중재하러 50구역에 발을 디뎠건만, 이미 전쟁터 한가운데 서 있는 꼴이었다.

“여기 있는 인원 외에 다른 아이들은?”

“저희가 전부예요.”

“애당초 공정은 두 개 밖에 없었거든요.”

공교롭게도 태일은 전쟁의 원인이자 목적인 아이들을 전부 데리고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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