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1화 (12/220)

11화 히트맨 (3)

한 시간 전.

“세 가지 선택지를 주지. 고용인은 당신이니까 당신의 선택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야.”

불친절하고 무심한 말투였지만, 제인은 그런 태일의 태도를 탓할 수 없었다.

사실상 감금된 상황에서 제인은 전적으로 태일의 능력에 의존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태일은 최대한 제인을 배려해 주는 중이고, 제인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태일은 기꺼운 듯 자신을 바라보는 제인의 눈앞에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올렸다.

“첫째, 이곳에 머물러 마피아들 사이의 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와 동시에 손가락 하나가 접혔다.

“모두가 걱정하는 것과 달리 두 세력이 당장 충돌하지 않을 수도 있어. 운에 기대 보자는 거지.”

마피아 보스들은 나름 한 조직을 키워 온 인물들이다. 그저 동네의 불량배처럼 기분에 따라 함부로 움직이는 애송이들이 아니었다.

물론 다른 세계의 50구역에서는 소울벌룬이 유통되면서 전쟁을 벌이긴 했지만, 이번에도 그와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고작 제인 한 사람의 힘으로 중재될 전쟁이라면, 애당초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두 번째는 뭐죠?”

“양쪽 마피아의 보스들을 동시에 제거해 버리는 거지.”

두 번째 손가락이 접혔다.

“그런…….”

제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신음 소리를 냈다.

“지금 무슨 허황된 소리를!”

“평화로운 중재보다야 실현 가능성이 훨씬 높지.”

제인은 이번에도 태일의 말에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새삼 태일의 자신감이 과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미 혼자서 샬롯이라고 하는 거물급 마피아 보스를 없앴다. 거기에 둘의 목을 더 보태겠다 한들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평화’를 운운하는 제인이 선택할 리 없는 제안이었다.

태일은 표정 변화 없이 마지막 손가락을 접었다.

“셋째, 제3의 세력을 등장시켜서 둘 사이를 견제하는 방법.”

처음으로 제인의 눈이 빛났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요.”

그리고 다시 현재.

가득 쌓인 선물들을 보며 난리가 난 아이들과 달리 제인의 표정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괜찮겠어요?”

마침 태일 역시 정신 나간 계획이라 생각하던 참이었다.

피규어 상자에 담긴 채 쓰레기들 속에 섞여 방을 나가겠다니.

막상 실행하려고 보니 너무 허술하고 한심한 계획처럼 느껴졌다.

“역시 이 계획은 다시 생각을…….”

“그래도 태일 씨 계획이니까 잘해 낼 거라 믿어요.”

“아니, 그러니까 상자에 들어가는 건…….”

“더구나 세연 씨 역시 늘 터무니없는 일을 성공시키곤 했으니까.”

“…….”

일부러다. 일부러 저러는 게 틀림없었다.

“저 상자도 꽤 커 보이는데, 저도 저기 들어가서 따라 나가면 어떨까요?”

제인이 대형 TV와 오락기 세트가 들어 있던 상자를 가리키며 말하자, 태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태일의 반응을 본 제인이 주눅 든 말투로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래요, 나도 안다구요. 전 그저… 태일 씨한테 이렇게 무리한 일을 시키고 저만 여기 남는다는 게…….”

“당신은 여기 얌전히 있는 게 돕는 거야.”

제인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엇나간 딸을 억류하겠다고 히트맨에 철도 회사까지 동원한 인간이다.

만약 붙잡아 둔 딸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더 미친 짓을 저지를지 모를 일이었다.

제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너무 미안해할 건 없어. 어차피 난 처음부터 여기 갇혀 있을 생각이 없었으니까.”

설사 제인이 첫 번째 선택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방에 머무르는 것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태일은 가만히 이 방에 머무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태일은 천둥벌거숭이처럼 멋대로 구는 골칫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꼬마 좀 말려 줬으면 좋겠는데.”

“저도 얘기는 해 보았지만…….”

지우는 본인보다 훨씬 키가 큰 피규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주변 아이들에게 신신당부하고 있었다.

“CP―101 잘 지켜! 이거 하나면 우린 몇 년간 놀고먹을 수 있다구. 그러니까 망가지면 절대 안 돼! 알아? 야, 거기 뒤에 코딱지 붙이지 마, 인마!!”

그렇게 피규어에 눈이 돌아간 와중에도 지우는 태일과 함께 박스 속에 들어가겠다며 한사코 고집을 피웠다.

“그 거리를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구요!”

소매치기 생활을 하면서 미로 같은 거리의 구석구석을 내달렸을 테니 분명 근거 있는 자신감일 터였다. 더구나 태일은 지금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호텔의 위치도, 50구역까지 가는 방법도, 50구역에서 가야 할 곳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린애를 길잡이로 데려갈 마음은 없었다. 더구나 지우처럼 제멋대로 날뛰는 녀석이라면 더더욱 곤란했다.

“얘기는 해 봤는데…….”

지우는 제 얘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가자미눈을 한 채 태일과 제인을 곁눈질했다. 자신을 떼어놓고 가려는 낌새를 보인 순간부터 태일과 제인의 행동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것이다.

“그냥 기절시킬까?”

그러나 결국 녀석이 CP―101의 상자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부디… 조심해요.”

제인은 태일과 지우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남은 공간에 포장재들을 욱여넣으며 걱정스레 말했다.

“애들이 피규어에 함부로 손 못 대게 해야 해요!”

“…….”

안 그래도 허술한 계획이 지우로 인해 한층 더 위태로워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룸서비스로 들어온 메타휴먼들에 의해 태일과 지우를 실은 상자가 수레 위에 실렸다.

* * *

콰직.

살짝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가득 쌓인 쓰레기 더미를 확인한 태일은 곧 상자를 부수고 밖으로 나왔다.

건물 지하의 폐기물 처리장에는 객실에서 나온 온갖 쓰레기들이 쌓여 있었다.

지우 역시 생쥐처럼 빠르게 상자 밖으로 튀어나오며 힘껏 기지개를 켰다.

“으, 답답해!”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코를 싸쥐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우엑! 이, 이게 무슨 냄새야!”

음식물 쓰레기에서부터 정체 모를 오물이 담긴 봉투들까지, 온갖 폐기물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한데 뒤엉켜 있었다.

그 와중에 한구석에서 묘한 기계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지이잉.

폐기물 처리장 안에는 쓰레기로 만들어진 산더미들을 일일이 헤집어 분류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저건?”

마치 거대 거미처럼 여러 개의 팔을 갖고 있는 무언가. 그런 존재들의 몸 정중앙에 달린 것은 인간의 얼굴, 아니, 인간을 닮은 얼굴이었다.

얼굴에 위치한 두 개의 눈동자는 선명하게 붉은빛을 내뿜고 있다.

그들은 몸통에 달린 수많은 집게손으로 폐기물들을 분리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가까이 있던 녀석과 태일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지우가 상자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분명 보았지만,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고 일을 계속할 뿐이었다.

그러나 태일은 한동안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괴상한 몸뚱어리에 박힌 그 얼굴이 어째서인지 낯익었다.

“‘개조형’이에요.”

지우가 태일의 옆에 서서 질문에 답해 주었다.

“개조?”

“메타휴먼의 다른 형태예요. 저도 얘기만 듣긴 했는데, 저런 녀석들은 꽤 효율이 좋아서 꽤 비싸다고 들었어요.”

“효율이라…….”

거미의 몸통에 붙은 붉은 눈동자의 얼굴은 분명 사람의 것을 하고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존재에 ‘개조’니 ‘효율’이니 하는 표현을 붙이는 것은 왠지 생리적 거부감이 들었다.

더구나 태일은 처음 메타휴먼을 본 순간부터 그들이 영혼 없는 기계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생명력, 즉 소울이었으니까.

“빌어먹을.”

태일의 입에서 나지막이 욕설이 흘러나왔다.

태일과 눈이 마주친 녀석은 열차에서 만난 바바리코트의 메타휴먼이었다. 임무에 실패한 히트맨의 미간에 총알을 쑤셔 박은 녀석. 놈은 임무 실패 후, 개조된 채 호텔의 지하 폐기장에 처박혀 있던 것이다.

호텔과 히트맨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확인하게 된 태일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한편, 지우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불쾌한 듯 태일의 팔을 잡아끌었다.

“형, 여기서 빨리 나가죠.”

“그러게 그냥 호텔 방에 얌전히 있었으면 좋았잖아.”

그렇게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시선을 돌려 출구를 찾는 찰나.

부스럭!

“뭐, 뭐야!”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옆쪽.

오락기 세트가 담겨 있던 상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설마…….”

태일이 눈살을 찌푸리며 단박에 상자를 부수었다.

그리고… 상자 안에서 튀어나온 사람의 형체를 본 태일은 나지막이 신음 소리를 내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너……!”

지우 역시 상자가 부서지며 바닥에 엎어진 녀석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애, 앨리스?!”

왠지 조용하다 했더니만, 앨리스 역시 다른 상자 안에 몰래 숨어든 것이다.

“아야야…….”

“너희들, 이게 장난인 줄 알아?”

태일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자, 지우 역시 태일 옆에 서서 앨리스를 향해 타박했다.

“맞아, 앨리스. 너, 어쩌자고 우릴 따라 나온 거야?”

“너도 마찬가지야!”

빌어먹을 꼬맹이들 같으니.

“아저씨, 전…….”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녀석들을 돌려보낼 방법은 없다.

“됐어. 설명 들을 여유 없으니, 입 닫고 따라와. 방해되면 놓고 갈 테니까, 그리 알아.”

때마침 태일의 눈에 폐기물 처리장 구석의 비상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느껴지는 역한 냄새들 때문에 잠시라도 이곳에 더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철컥.

다행히 비상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아니, 누군가가 열어 놓았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신…….”

“어, 어어?! 그 변호사?!”

“…애들까지 데려올 줄은 몰랐습니다만.”

레이.

제인을 굴복시킨 양복 차림의 변호사가 비상구 안쪽에서 태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기계처럼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50구역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그래.”

‘어떻게 알았느냐’는 말은 무의미했다. 아니, 이토록 허술한 탈출극이 걸리지 않았다면 도리어 놀랐을 것이다.

나름 무력행사를 준비하고 있던 태일은 레이가 나타나는 순간, 오히려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참이었다.

만약 태일이 탈출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면 결코 레이 혼자 앞을 막아서지는 않았을 테니까.

“처음부터 순순히 풀어줄 생각이었다면 굳이 쓰레기장을 거쳐 올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아뇨. 만약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분란을 일으키거나 눈에 띄셨다면 저희는 최선을 다해 당신을 제지했을 겁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말이죠.”

레이의 시선이 태일의 뒤에 있는 두 꼬마를 향했다.

레이는 히트맨을 막은 사람이 태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태일과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면 놈들은 아이들을 인질로 사용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협박에 태일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변호사의 탈을 쓰고는 있지만, 놈의 기계적인 태도와 언사는 히트맨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행히 이렇게 조용한 장소에서 만났으니, 굳이 당신을 막지는 않겠습니다. 아니, 오히려 도와 드릴 생각도 있죠.”

“…이유를 모르겠는데.”

당연하게도 레이는 이유를 대답하는 대신 제 할 말만 계속할 뿐이었다.

“여기서 50구역 환락가까지는 열차를 타고 가는 편이 제일 빠릅니다.”

그때껏 태일의 뒤에서 말없이 눈치를 살피고 있던 지우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열차표라도 주시려구요?”

“설마.”

레이가 눈을 가늘게 뜨자, 지우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태일의 뒤로 숨어들었다.

“불미스러운 테러 행위로 인해 열차 운행은 당분간 중지된 상태입니다.”

불미스러운 테러 행위를 저지른 메타휴먼은 몸이 개조된 채 문 뒤쪽 폐기물 처리장에 처박혀 있다.

“하지만 화물 운반용 열차는 운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테러를 사주한 작자와 한통속일 게 분명한 레이는 태일에게 정보를 내주고 있다.

“앞으로 20분 뒤 열차가 출발할 예정이죠. 지금 당장 호텔 문 앞에 준비해 둔 리무진에 탑승하시면, 기사가 시간 내에 당신을 역까지 모셔다 드릴 겁니다.”

거기다 친절하게 역까지 데려다 준단다.

“…내가 그 리무진을 타지 않겠다면?”

레이가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열차를 놓치시겠죠.”

호의 혹은 함정.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지만, 최대한 빠르게 호텔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레이가 제시하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레이는 태일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검은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걸 가져가시죠. 기사에게 보여 주기만 하면 역까지 안전히 모실 겁니다.”

“…고맙군.”

카드에는 ‘06’이라는 숫자가 휘갈긴 글씨로 적혀 있었다.

태일이 카드를 넘겨받고 계단을 오르려는 찰나, 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열차에는 꽤 많은 것들이 실려 있죠. 부디 조심하시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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