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인형극단 (2)
20여 년 전, 50구역 출신 이름 모를 남자가 하룻밤 사이에 복합 군사 기업 BW의 본사를 홀로 쓸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을 일으킨 남자는 며칠 뒤 온몸에 구멍이 난 채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지만, 사건의 반향은 컸다.
그가 습격한 BW은 각종 총기류를 자체 생산하여 유통하는 군수 업체일 뿐만 아니라, 용병 조직까지 운영하는 민간 군사 기업이었다.
그런 기업의 본사이기에 당연히 최고라 칭해지는 용병들과 최신식 보안장치로 무장되어 있었지만, 그만한 ‘요새’를 제대로 무장조차 하지 않은 남자가 홀로 부숴 버린 것이다.
그 충격적인 사건 이후, 50구역에서는 ‘소울벌룬(SB)’이라는 비약이 암암리에 유통되기 시작했다.
비약에는 ‘BW를 무너뜨린 약물’, ‘악마의 구름’ 따위의 수식어가 붙었다.
BW를 무너뜨린 남자가 마신 약물이라는 소문이 돈 것이다.
생명 본연의 힘을 최대치까지 끌어 올려 주는 비약.
그것은 일종의 스테로이드제와 같았다. 강력한 근육을 선물하지만, 그것은 달콤한 유혹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SB를 흡입한 이들에게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몇 달쯤 지나자 언어장애를 앓았고,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했다.
또다시 몇 달이 지나자 기억이 흐릿해졌고, 급기야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다.
자아와 인성이 완전히 망가질 때 즈음, 투약자들의 살점이 썩어 들어갔다.
결국 살육에 대한 욕구만 남은 좀비들이 50구역을 누비게 되었고, 바로 그때쯤 중앙정부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영웅들’이 공화정을 무너뜨린 뒤, 50구역 사태 해결에 나선 것이다.
영웅들에 의해 50구역은 대대적으로 ‘정화’되면서 정상을 되찾았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졌다.
태일이 열 살이던 해의 일이었다.
* * *
태일이 전류를 거두었을 때, 이미 방 안은 완전히 불길에 휩싸인 뒤였다.
탁상과 각종 집기들이 타들어 가며 부서지기 시작했고, 시꺼먼 연기가 시야를 덮었다.
태일은 아직 미처 타 버리지 않은 탁상 위 녹색 가루들을 움켜쥐었다.
8,000미터 아래의 심해 속에서만 발견되는 미르파우더를 빻아 만든 가루.
SB의 제조법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아이들에게 비약을 제조하도록 명령한 누군가가 남아 있다.
놈을 남겨 두면 이 끔찍한 약은 다시금 제조될 것이다.
태일은 이미 겪어 보았기에 SB가 유통될 경우 벌어질 일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반드시 막는다.’
시계만 찾은 뒤, 이 우스꽝스러운 집을 나가겠다는 처음의 생각은 바뀌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뒤쪽에서 분장실의 문이 닫혔다.
철컥.
누군가가 밖에서부터 문을 잠근 것이다.
“혀, 형님, 분장실 작업이 멈추면…….”
“시끄러! 놈은 괴물이야. 놈을 죽이는 게 먼저란 말이야!”
태일은 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이 정도로 자신을 가둘 수 있으리라 판단한 걸까?
바로 그때, 문이 강하게 흔들렸다.
“아저씨!!”
앨리스의 목소리.
문을 열려고 시도한 듯 문고리가 흔들린다.
그러나 이어 요란하게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망할 꼬맹이가!!”
“무슨 짓이야! 그 더러운 손 저리 치워!”
웬 소년의 목소리.
태일의 다리에 다시금 푸른 전류가 감기기 시작했다.
쾅!
전류를 두른 태일의 발차기에 반 토막 난 문이 허무하게 쓰러졌다.
“뭐, 뭐야?!”
양복을 갖춰 입은 열댓 명의 남자들이 침팬지, 고릴라, 좀비, 광대 등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다.
좌측 계단 앞, 광대 가면을 쓴 남자가 앨리스를 사로잡은 가운데 웬 소년이 그의 팔을 물고 있다.
“이 망할 놈이!! 놔, 안 놔?!”
광대 가면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 역시 낯설지 않았다.
태일을 이 집까지 데려온 바로 그 중년 남자의 목소리다.
흥분에 찬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웁! 우웁!!”
“지, 지우야!!”
앨리스는 악착같이 남자의 팔을 물어뜯는 소년을 보며 안타깝게 울부짖었다.
비로소 소년을 기억해 낸 태일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시계를 훔쳐 간 꼬마, 바로 그 녀석이다.
한편, 방문이 부서지면서 새어 나온 연기가 복도를 뒤덮기 시작했다. 가면 남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허둥대고 있었다.
“쿨럭쿨럭… 젠장, 분장실이 완전히…….”
“앞이 안 보여!”
그 와중에 태일의 시선은 놈들의 리볼버에 고정되어 있었다.
리볼버. 수십 년 전에 끝나 버린 산업 시대의 유물, 구시대의 잔재.
SB를 제조하는 놈들이 고작 그런 ‘장난감’을 들고 태일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돌도끼를 들고 대포에 맞서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습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 일단 쏴! 놈을 죽이라고 했잖아!”
“문 쪽이야!”
탕! 탕!! 탕!
리볼버 총구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한편, 광대 가면은 복도에서 들려오는 사격음을 들으며 자신의 팔을 물어뜯고 있는 소년의 머리를 리볼버 손잡이로 강하게 후려쳤다.
“커어억!!”
그제야 소년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지우야!!”
그 와중에 광대 가면의 오른팔에 목덜미를 붙잡힌 앨리스가 목청껏 울부짖으며 발버둥 쳤다.
광대 가면 뒤, 남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매캐한 연기로 인해 눈이 맵고, 열기로 인해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은 상황에서 남자의 머릿속은 진탕이 되어 있었다.
정체 모를 놈을 잘못 데려오는 바람에 애꿎은 부하들을 잃었다.
쌍둥이 녀석들에 이어 테디까지 놈의 손에 죽은 것이다.
심지어 보스가 아끼는 분장실까지 몽땅 태워 먹었다.
이 모든 사태에 대해 내려질 처분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보스는 용서를 모르는 인간이니까.
그런데 그 와중에 망할 꼬마들이 주제도 모르고 자신에게 덤벼들었다.
“…죽인다, 전부. 그러면 되는 거야.”
그래. 애당초 저 남자를 꾀어 들인 건 소매치기 꼬마, 지우가 아니었던가.
지우가 시계만 훔치지 않았다면, 저 괴물 같은 놈이 여기까지 올 일은 없었다.
게다가 놈을 분장실에 가뒀을 때, 앨리스는 그를 꺼내 주려고 했다.
“이 모든 게 너희 둘 때문이야. 저 괴물 같은 놈을 끌어들여서 여길 모조리 날려 버리려던 거야. 그렇지?”
지우에게 시계를 훔치도록 지시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진실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사태를 야기한 꼬맹이들과 놈의 시체를 가져간다면 보스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개자식! 전부 당신이 시켜서…….”
지우가 악을 쓰면서 눈을 번뜩였다.
마침 분장실 문 쪽에서 들려오던 리볼버 소리가 완전히 멈추었다.
이미 놈의 몸 구석구석에 총알이 박혀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눈앞의 두 꼬마를 없애는 일뿐.
남자는 씩씩거리는 지우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잘 가라, 꼬맹이.”
마지막 인사와 함께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겼다.
사격음이 들리지 않았다.
불발탄일까?
그 와중에 푸른 불빛이 번쩍였다.
…푸른 불빛?
파직.
“…어?”
어째서인지 자신의 팔이, 리볼버가 쥐어진 손이 공중에 떠올라 있었다.
“우,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팔이… 내 팔이!!”
팔이 통째로 잘려 나갔다.
광대 가면은 바닥에 내팽개쳐진 자신의 팔을 보며 마구 비명을 질러 댔다.
바로 그때, 귓가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쓰레기 같은 놈.”
태일이 푸른 스파크를 내뿜으며 노려보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 속, 태일의 등 뒤로 쓰러져 미동조차 않는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태일을 향해 리볼버를 발사한 부하들 모두가 쓰러져 있었다.
광대 가면은 벌벌 떨며 뒷걸음질 쳤다.
혹시 몰라 인질로 삼으려 한 앨리스는 어느새 풀려나 쓰러진 지우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인질?
잠깐 사이에 무장한 부하들을 모조리 쓰러뜨린 괴물이다. 그런 남자 앞에서 인질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사, 살려…….”
콰직.
순간, 광대 가면의 눈에 비치는 세상이 기울었다.
바닥이 천장으로, 천장은 바닥으로.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그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기우뚱하며 앞으로 넘어지는 자신의 몸뚱어리였다.
태일은 광대 가면이 벗겨지면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중년 사내의 얼굴을 본 뒤, 고개를 돌려 계단 쪽으로 향했다.
계단에 주저앉은 지우가 넋이 나간 얼굴로 태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일이 지우를 향해 다가가자, 앨리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태일의 앞을 막아섰다.
“아, 아저씨, 지우는…….”
그러나 태일은 가만히 앨리스의 어깨를 옆으로 밀어내며 계단을 올랐다.
“아저씨!”
“비켜서.”
이제는 앨리스도 알 것이다.
이 집에 들어와 채 20분이 지나기도 전에 열댓 명을 살해한 태일은 ‘천사’와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사신’에 가깝다.
태일은 여전히 엉덩이를 계단에 붙인 채 완전히 얼어붙어 있는 지우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으윽!”
광대 가면에게서 내던져진 통증 때문인지 지우가 신음 소리를 냈지만, 곧 비틀거리면서 제자리에 섰다.
“아저씨, 시계는…….”
“너에게 없다는 거, 알고 있어.”
태일이 지우의 말을 가로막고는 말을 이었다.
시계는 위층에 있다.
“애들 데리고 이 집에서 나가.”
“…네?”
앨리스와 지우가 태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 해?”
“…알겠어요. 가자, 앨리스!”
“하, 하지만…….”
“앨리스, 모르겠어? 애들이 아직 건물 안에 있잖아!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지우가 망설이는 앨리스의 팔을 붙잡은 채 서둘러 움직였다.
확실히 머리 회전이 빠른 녀석이다.
서두르는 와중에 땅바닥에 나뒹구는 리볼버를 챙길 정도로 판단력도 좋았다.
한편, 태일을 보며 망설이던 앨리스 역시 아이들에 대한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이며 지우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일은 그런 둘을 뒤로한 채 천천히 계단 위로 올랐다.
* * *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뛴다.
온몸의 혈액이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흐르는 느낌이었다.
콰직!
태일의 앞을 가로막은 비곗덩어리 남자의 몸이 양단되어 갈라진다.
“도, 도망쳐!”
“괴, 괴물이야! 제기랄!”
파지지지! 쿵!
태일의 손가락 끝에서 쏘아진 번개가 빵모자를 쓴 놈들의 심장을 관통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숨통이 끊어진 제 동료들의 모습을 본 대머리남자가 두꺼운 장갑을 벗어 던지고는 허겁지겁 권총을 꺼내 들었다.
“빌어먹을!!”
탕! 탕! 탕!!
총구가 연신 불을 내뿜었지만, 그렇게 발사된 총탄은 태일의 몸을 감싸고 있는 전류의 막을 뚫지 못한 채 그대로 땅바닥을 굴렀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태일을 본 대머리의 입에서 넋을 잃은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그리고 다음 순간, 대머리의 목이 잘려 땅바닥을 굴렀다.
쓰레기들을 모두 청소한 태일이 방마다 내걸린 현판들을 바라보았다.
계단에 붙은 ‘인형 제작소’라는 현판을 시작으로 방마다 ‘꼭두각시 인형’, ‘그림자 인형’, ‘장대 인형’ 따위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1층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이 2층으로까지 옮겨붙는 와중에 인형 제작소가 그 끔찍한 실체를 드러냈다.
쿵, 쿵!
‘꼭두각시 인형’이라 표시된 방은 수술실이었다. 눈과 심장, 간, 신장 등 돈이 될 만한 기관들을 모두 뽑아내는 장소.
거대한 식칼을 들고 태일의 앞을 가로막았던 비곗덩어리는 마치 고기라도 썰 듯이 수술실 위에 놓인 인간을 난도질했을 것이다.
쿵, 쿵, 쿵, 쿵!
‘그림자 인형’이라 표시된 방은 고문실이었다. 전기의자와 온갖 기괴한 형태의 집게들이 진열되어 있고, 방 깊숙이 남은 욕조에는 상처투성이 여인의 시신이 남겨져 있었다.
태일을 보고 도망치던 빵모자는 바로 이 방에서 나왔다.
쿵쿵쿵쿵쿵쿵쿵쿵!
마지막 ‘장대 인형’의 방은 냉동 창고였다. 발가벗겨진 젊은 남녀의 시신들이 마치 얼음 조각상처럼 캡슐에 담겨 진열되어 있었다.
방한복을 입은 대머리는 이 방 안에서 나왔다.
태일은 ‘인형 제작소’의 모든 것을 확인한 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부터 몸집을 키워 가고 있던 동그란 구체가 태일의 손 위로 떠오른다.
푸르게 빛나는 구체 안에서는 마치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거대한 전류가 응축된 구체는 폭탄과도 같았다. 이것이 터지는 순간, 수만 갈래의 번개가 반경 50미터를 완전히 날려 버릴 것이다.
태일은 당장에라도 터질 듯 진동하는 구체를 2층 정중앙에 남겨 둔 채 3층으로 올랐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