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2화 (3/220)

2화 망가진 시계, 움직이다 (2)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걸까?

소매치기를 당한 순간부터?

태일은 그런 소녀를 보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한편, 근처에 있던 두 남자가 태일과 중년 남자 쪽으로 다가왔다.

“어르신, 무슨 일 있습니까?”

주황색 머리칼에 똑 닮은 얼굴, 언뜻 보아 구별이 잘 가지 않는 쌍둥이였다.

“아, 자네들. 이 친구가 소매치기를 당했지 뭔가.”

“형씨, 운이 없구만. 대체 뭘 잃어버린 거야?”

“쯧쯧, 놈들은 골목 곳곳에 숨어들어서 찾기 어려운데…….”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사람 좋은 얼굴로 태일의 어깨를 두들겼다.

“날 따라오게. 근처에 상인연합이 있으니, 그쪽에 미리 말해 두면 자네가 잃어버린 물건을 팔러 오는 꼬마를 붙잡을 수 있을 게야.”

잠시 생각하던 태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태일을 보며 중년 남자가 빙긋 웃어 보였다.

잘 손질된 갈색 콧수염이 더해져 마치 귀족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래, 너무 걱정 말게. 꼭 찾을 수 있을 테니.”

두 남자가 중년 남자의 말에 맞장구쳤다.

“이 동네에서 상인연합을 거치지 않고 유통되는 물건은 없다고 봐야지.”

“어르신, 마침 저희도 상인연합에 일이 있어서 가고 있던 참인데, 함께 가시죠.”

“오, 그러지.”

셋은 태일을 위로하며 친절하게 길을 안내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안내를 받는 태일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넓은 도로를 지나 골목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호객 행위를 하는 목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화려한 건물들의 모습 역시 더는 보이지 않았다.

대로변 화려한 모습과 달리 골목 뒤쪽의 모습은 어두침침하고도 지저분했다.

“이놈들, 저리 꺼지지 못해!”

“엿이나 먹어, 빌어먹을 뚱땡이!”

웬 뚱보가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가 가득 담긴 통을 내던지자, 불량스럽게 생긴 아이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카아아악~퉤! 이 망할 놈들, 어디 두고 보…….”

달아난 녀석들을 보며 한창 욕설을 늘어놓던 뚱보가 고개를 돌리다가 태일의 앞에 선 중년 남자를 보더니,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건물 뒷문으로 들어가 버렸다.

중년 남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름길이라 이쪽으로 들어왔는데, 거리가 조금… 지저분하군. 이해하게.”

‘조금’ 지저분하다?

그건 지나치게 부드러운 표현이었다.

담배를 뻑뻑 피우며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거리를 바라보는 여자, 술에 취한 채 쓰러져 있는 배불뚝이 남자.

곳곳에서 들려오는 욕설과 역겨운 냄새.

황금빛 거리의 뒤편은 어둡고도 역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환락가이지만, 한 꺼풀 벗겨 내면 불량배, 주정뱅이, 중독자가 썩어 가고 있는 진창.

태일이 그 무엇보다 혐오하던 것들이었다.

“그보다 이 골목에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여긴 무슨 일로 온 건가?”

“차림새로 봐서는 군인 같기도 한데, 이 구역 군복은 아니군.”

쌍둥이는 나름 불편한 장면을 가릴 생각인지, 태일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러나 태일은 말없이 중년 남자를 따라갈 뿐이었고, 머쓱해진 둘은 곧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불빛이 거의 들지 않는 골목 안, 웬 건물 앞에서 비로소 중년 남자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낡아 빠진 문, 처마 밑을 기어 다니는 주먹만 한 거미, 미약하게 풍겨 오는 술과… 피의 냄새.

주변에 인적은 없다.

“…도착한 건가?”

“그래, 이곳이 바로 상인연합이지.”

규모가 꽤나 크지만, 세상 그 어떤 상인들도 이런 흉가에 연합을 차리고 싶진 않을 것이다.

양옆에서 쌍둥이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자식, 바보 아냐? 킥킥킥.”

“뭐, 틀린 말은 아니잖아? 우리도 뭔가 판매를 하긴 하니까 말이야.”

중년 남자가 천천히 뒤돌아서고, 그때껏 태일의 곁에 바짝 달라붙어 서 있던 남자 둘이 뒷길을 막아섰다.

나름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모양이었다.

한편, 돌아선 남자의 얼굴에는 더 이상 꾸며진 친절도, 잘 만들어진 미소도 없었다.

한쪽 입꼬리가 불량스럽게 치켜 올라간 남자의 민낯은 처음 태일에게 접근한 신사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쌍둥이는 히죽 웃으며 제각기 주머니에서 은색 너클을 꺼내 들었다.

“멍청한 놈. 도망갈 기색조차 없네?”

“아주 그냥 바짝 얼었군. 보기 안쓰러울 정도야.”

“…….”

대꾸하지 않는 게 겁에 질렸기 때문이라고 여겼는지, 중년 남자를 포함한 셋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태일을 바라보았다.

태일은 본색을 드러낸 셋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물건만 돌려주면 모두 아무 일 없을 거야.”

순간, 분위기가 가라앉으며 태일을 둘러싼 세 사람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멍청한 놈 같으니. 우리가 그저 그런 불량배로 보이는 모양이지?”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했나 본데…….”

쌍둥이가 뒤쪽에서 태일에게 한 발자국씩 가까이 다가섰다.

“어르신, 어떻게 할까요? 속을 비울까요?”

“인마, 딱 보면 모르겠어? 나름 반반하게 생겼고, 몸도 쓸 만해 보이잖아. 어르신께서 여기까지 사지 멀쩡하게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뭐겠어?”

한편, 태일은 그제야 건물에서 풍겨 오는 피 냄새의 정체를 깨달았다.

인신매매, 장기 매매 혹은 소울 추출.

몸뚱어리도, 영혼도 ‘돈’이 된다.

이들은 인간을 사고파는 상인들이었다.

태일이 살던 세계에서도 공공연히 벌어지던 역겨운 거래.

“…생각이 바뀌었어.”

“흐흐, 이제야 달아날 생각이 들었나?”

태일의 손에서 미세하게 스파크가 튀었다.

“너희는 여기서 죽는다.”

눈을 가늘게 뜨고 태일을 노려보던 중년 남자가 자신의 콧수염을 매만지며 차갑게 말했다.

“아직 제 주제를 모르는 것 같군. 적당히 손봐 줘. 자칫 망가지기라도 하면 값어치 떨어지니까 조심하고.”

“걱정 붙들어 매십쇼.”

주황 머리칼의 쌍둥이가 히죽 웃으며 태일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태일의 푸른빛이 태일의 몸을 감쌌다.

잠깐의 눈부심에 쌍둥이가 미간을 찡그렸다.

휘두른 주먹이 채 닿기도 전에 태일이 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 뭐지?”

“이 자식… 설마!”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른 뒤, 균형이 무너져 휘청거린 둘이 당황한 순간.

“으윽!!”

“컥!”

태일의 양손이 각각 쌍둥이의 뒷목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제야 자신들의 힘만으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둘이 다급히 외쳤다.

“자, 잠깐!”

“사… 살려…….”

하지만 이미 태일의 손을 타고 고압 전류가 흘러나온 뒤였다.

“끄, 그그그그극!!”

“카아아아아악!!”

쌍둥이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무릎을 꿇었다.

새파란 불빛이 어두운 골목 전체를 밝혔다.

주변을 느긋하게 기어 다니던 거미들이 황급히 빛을 피해 어디론가 숨어들었다.

그 빛에 비춰진 중년 남자의 입이 떡 벌어진다.

발광체처럼 빛을 내며 온몸에 전류를 두른 쌍둥이의 눈이 급기야 완전히 뒤집혔다.

흰자를 드러낸 채 혀를 내민 둘의 모습은 그 자체로 끔찍했다.

그렇게 고압 전류를 흘려보내는 동안 태일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팔아먹었지?”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입에 거품을 문 가운데,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으니까.

“얼마나 많은 이들의 심장을 빼냈나? 얼마나 많은 이들의 생명을 훔쳤어?”

태일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사이, 쌍둥이의 몸뚱어리에서는 고기 타는 냄새가 나면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히, 히이익!!”

중년 남자는 푸른 전류 속에서 빛나는 태일의 얼굴에 혼이 나간 듯 허겁지겁 등 뒤의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본 태일이 쌍둥이로부터 손을 뗐다.

완전히 구워진 쌍둥이의 몸뚱어리가 앞으로 쓰러지듯 넘어갔다.

“똑같군.”

태일은 양손을 내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분명 태일이 있던 곳과 다른 곳이지만… 다르지 않다.

태일이 살던 곳, 그중에서도 50구역 유흥가 뒷골목은 하수처리장의 밑바닥과도 같았다.

도시에 발을 붙이고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밀려난 끝에 도착한 곳.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장애인이나 사생아들이 모여들었고, 도시의 찌꺼기들이 흘러들었다.

그런 가운데 유흥가에는 악랄한 인신매매와 밀수가 뿌리를 내렸다.

그랬기에 태일은 50구역 뒷골목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했다.

약자의 손에 칼과 총을 쥐어 주었고, 범죄 조직들을 무릎 꿇렸다. 그렇게 힘을 모아 세계의 ‘관리자’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태일은 자신이 칼과 총을 쥐어 준 자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잠시 중년 남자가 도망쳐 들어간 건물을 바라보고 있던 태일이 천천히 뒤돌아섰다.

건물에 들어가기 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만 나오지?”

“…….”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소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피의 언덕에서 처음 만난, 소매치기를 당한 장소에서 태일을 지켜보고 있던 바로 그 아이였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

대답이 없다.

전봇대 뒤에 숨은 채 태일을 지켜보던 소녀는 당시 열심히 입을 움직였다.

도… 망… 쳐.

어떻게든 중년 남성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리려 했으리라.

하지만 정작 위험한 쪽은 태일이 아니라 소녀였다.

소녀는 태일이 일부러 이곳까지 놈들을 따라오는 내내 몰래 뒤를 쫓은 것이다.

만약 놈들이 소녀의 기척을 눈치채기라도 했다면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소녀 때문에 태일은 여기까지 오는 내내 셋을 놓치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일단 무사하니 안심이지만.

“여긴 위험하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

그제야 소녀가 입을 열었다.

“…천사 아저씨.”

‘천사’라…….

번개를 다루는 태일의 모습을 보고 천사를 연상한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태일은 그 번개를 사용해 사람을 구워 버렸다.

적어도 천사가 할 일은 아니겠지.

“말했잖아, 난 천사가 아니라고.”

“저기를 없앨 거예요?”

소녀의 손가락이 낡은 건물을 가리켰다.

중년 남자가 도망쳐 들어간 바로 그곳.

안쪽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태일을 맞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리라. 아니면 도망칠 준비를 하거나.

“…그래. 그럴 거야.”

“그럼 전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요.”

“…….”

이번에는 태일의 입장에서 할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아저씨는 천사가 맞아요. 내가 기도해서 여기 온 거야.”

“뭐?”

“난 저길 없애 달라고 기도했으니까.”

태일이 가만히 소녀를 바라보았다.

돌아갈 곳을 없애 달라고 기도한 소녀.

사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중년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도, 이곳까지 오는 동안 무사할 수 있던 것도 소녀가 이곳에 속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소녀의 얼굴과 목덜미, 어깨에 난 멍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10대 초반에 불과한 소녀가 이런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겪어야 할 일들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지옥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가장 크게 상처 입는 존재는 바로 아이들이다.

태일은 물끄러미 소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주 중요한 물건을 도둑맞았어.”

“…알아요.”

“그 물건을 가져간 녀석이 누군지 아니?”

“…….”

소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꼬마, 네 친구야?”

“지우는 나쁜 애가 아니에요. 저한테 몰래 빵을 주기도 하고, 대신 매를 맞아주기도 했고, 또…….”

“해치려는 게 아니야.”

태일이 급히 말을 이으려는 소녀의 말을 끊었다.

“저 건물 안에 너나 지우 같은 아이들이 많이 있어?”

소녀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태일은 태어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50구역에 버려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매치기나 뒷골목 불량배들의 끄나풀 역할을 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걱정 마라. 너희 같은 꼬마들에겐 죄가 없어. 죄는…….”

파지직.

태일의 양팔에서 푸른 전류가 흐른다.

“어른들에게 있는 거야.”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