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망가진 시계, 움직이다 (1)
죽은 건가?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양손과 양발이… 움직인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 역시 생생하다.
몸에 박힌 탄알의 존재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귓가에 바람 소리가 들린다.
“천사?”
어린애의 목소리.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갑작스럽게 밝은 빛에 노출된 탓에 태일은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붉은 흙.
그리고 태일의 몸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검은 탑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 있었다.
탑의 뒤쪽으로 저물기 시작한 태양과 어지럽게 부는 바람, 그리고 붉은 흙먼지.
방금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아니, 온갖 기술들이 펼쳐진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태일은 양손을 들어 올려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낙뢰가 떨어진 순간, 몸은 잿더미로 변했어야 한다.
그러나 자그마한 화상 자국조차 없었다.
배신자들과의 싸움에서 몸 구석구석에 남겨진 크고 작은 상처들도, 몸 안에 퍼지던 독 기운도 완전히 사라졌다.
‘꿈인가?’
가슴팍에 손을 댄 태일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
세연에게 받은 회중시계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자신이 눈을 뜨기까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혁명은 끝났다.
완벽히 실패한 것이다. 믿었던 동료들이 탐욕에 젖어 등에 칼을 꽂아 넣었고, 그 바람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연인을 잃었다.
살아남았다 한들 모든 것을 잃은 지금, 태일에게 생의 의지는 없었다.
“천사… 아저씨?”
그때, 누군가가 멍하니 검은 탑을 바라보고 있던 태일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어린 꼬마 아이의 목소리.
태일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지저분하게 산발이 된 머리칼, 언제 세탁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한 멜빵바지, 오랜 기간 굶주린 듯 하얗게 뜬 얼굴과 비쩍 마른 몸.
열 살 남짓 된 여자아이다.
“내 기도를… 들은 거예요?”
“…뭐?”
태일의 눈을 본 소녀가 살짝 겁에 질린 듯 조심스럽게 붙잡고 있던 옷소매에서 손을 땠다.
태일의 눈동자에는 생기라고는 하나 없고, 그저 절망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우물쭈물 말했다.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냥 가면 또 맞을 테니까… 맞으면 아프니까… 그래서 난 천사님이 내려와서…….”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태일은 한숨을 내쉰 뒤, 소녀를 지나쳐 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수록 알 수 있다. 몸에 이상은 없었다.
…싸울 수 있다.
그렇다면 끝맺지 못한 복수를 마무리해야 했다.
혁명이니 뭐니 하는 것은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세연을 살해한 놈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것이다.
움켜쥔 주먹에서 미세하게 스파크가 튀었다.
“처, 천사 아저씨!”
소녀가 다시금 태일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뭘까, 이 꼬맹이는.
태일은 가만히 소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난 천사 같은 게 아니야.”
굳이 표현하자면 악마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한때 동료였던 자들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테니까.
“하, 하지만… 내가 기도를…….”
“신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아.”
신이라는 작자가 기도를 들었다면 모든 것을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뜨릴 리 없겠지.
태일의 냉정한 대답을 들은 소녀는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눈시울을 붉혔다.
더는 태일의 옷소매를 붙잡으려 들지 않는다.
태일은 그런 소녀를 무시한 채 그대로 등을 돌려 언덕을 내려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태일을 졸졸 따라왔다.
‘언제까지 따라올 생각이지?’
태일의 발걸음에 맞추기 위해 거의 뜀박질을 해야 했지만, 한사코 따라오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소녀가 어떤 존재를 기다렸든 적어도 자신은 아니다.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붉은 흙먼지가 잦아들면서 50구역이 눈에 들어왔다.
태일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시꺼먼 매연.
오랫동안 멈춘, 아니, 태일이 멈춰 세운 공장이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배신자 놈들의 짓일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녀석들이 아무리 자신을 배신했다 해도, 아무리 탐욕에 눈이 돌아갔다 해도 50구역의 공장을 돌릴 정도로 타락할 수는 없다.
“콜록!”
뒤에서 자그마한 기침 소리가 들린다.
잠시 생각하던 태일은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막상 태일과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 제 입을 막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제 딴에는 몰래 따라왔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자신의 기침 소리 때문에 태일이 화난 것이라 여겨 겁을 먹은 걸까?
태일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뒤, 겁에 질린 듯 보이는 소녀를 불렀다.
“꼬마야, 이리 와 봐.”
“…저요?”
“그래.”
잠깐 망설이던 소녀는 슬금슬금 태일의 앞으로 다가왔다.
“혁명군들은 모두 어디로 떠났니?”
문득 눈앞의 소녀에게서 의미 있는 정보를 들을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도리어 되물었다.
“혁명…군?”
“저 멀리 보이는 공장들을 멈춰 세우고, 문 앞을 지켜 선 사람들 말이야.”
“공장이요?”
뭔가 제대로 알아듣긴 한 걸까 의심스럽던 와중에 소녀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저씨, 저 공장들은 멈춘 적이 없어요.”
“…뭐?”
소녀는 태일이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작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저 공장들, 하루도 멈춘 적 없어요.”
“그럴 리가…….”
태일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고는 곧이어 소녀를 내버려 둔 채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아, 아저씨!”
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태일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50구역은 중금속과 매연으로 인해 늘 공기가 탁하고, 사람들의 목에서는 늘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만 7세가 되면 방적기에 기어 들어가 끊어진 실을 맞추며 열 시간에서 열두 시간의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운 좋게 10대 중후반까지 살아남는다면 탄광에 들어가 수레를 끌었다.
죽음에 맞닿아 있는 노동.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노동의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 지옥 같은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은 버텨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지 못한다면 길거리의 부랑자로 버려지고 말 테니까.
정말로 사회에서 완벽하게 버려지고 말 테니까.
노동자들은 삶을 버텨 내는 와중에 조금이라도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퍼마셨고, 일하는 시간 외에는 순간의 쾌락에 의존했다.
그런 노동자들의 밤을 위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장소가 바로 피의 언덕 입구 쪽 유흥가였다.
태일이 혁명군을 이끌고 50구역을 장악한 날, 태일은 가장 먼저 유흥가를 철저하게 박살 냈다.
아편굴을 불태우고, 악덕업자들은 쫓아냈으며, 집 없이 떠돌던 이들을 위한 공동주택을 지었다.
도시의 쓰레기통이자 음지였던 50구역 유흥가는 그렇게 사라졌다.
분명… 그랬을 터다.
“오빠, 여기예요, 여기! 오늘은 여기서 놀다 가! 산바람이 좋다구!”
그러나 지금 태일의 눈앞에 공동주택 따위는 간데없고, 터무니없이 화려한 유흥가, 아니, 환락가가 떡하니 자리해 있었다.
슬슬 해가 지기 시작한 지금, 거리는 당시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했다.
건물마다 악기 소리가 들려오고, 화려한 장식품들이 사방에서 번쩍거렸다.
짹짹!
황금 새장 속 화려한 구관조들이 우아한 깃털을 뽐내며 넓은 새장 안을 맴돈다.
옷을 반쯤 벗은 사람들이 흐느적거리며 돌아다녔다.
황금빛의 대로가 펼쳐진 가운데, 거리 곳곳에서 취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자~ 자~ 오늘 물이 아주 좋습니다! 붉은 산 바로 근처에서 특별한 경험을!”
…붉은 산? 특별한 경험?
태일이 기억하는 한, 피의 언덕은 결코 그렇게 운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언덕은 50구역 주민들의 끔찍한 처지를 상기시킬 뿐이었으니까.
‘여긴…….’
대로를 걷다가 나타난 사거리에 멈춰 선 태일은 고개를 돌려 뒤쪽 피의 언덕을 바라보았다.
분명 태일이 어릴 때부터 보아 오던 바로 그 언덕이다.
언덕 위의 검은 탑까지도 그대로다.
하지만…….
‘내가 알던 그곳이 아니야.’
태일은 확신했다.
전혀 다른 장소다.
이곳은 태일이 기억하는 50구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바로 그 순간, 가슴팍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째깍째깍…….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시끄러운 현장의 한가운데 서 있지만, 지금 이 순간 아주 자그마한 소리가 태일의 귀를 파고들었다.
시계의 태엽이 움직이는 소리.
태일이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 있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세연에게 받은 회중시계.
순간, 다리가 풀려 버린 태일이 비틀거렸다.
“이럴… 수가!”
시계가 움직이고 있다.
“이 시계는 나의 소울과 연동되어 있어.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시계 역시 멈추지 않을 거야.”
손을 타고 전해 오는 시계태엽의 떨림, 소리, 움직이는 초침까지.
세연이 살아 있다.
그녀 역시 태일처럼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이쪽으로 넘어오게 된 걸까?
이곳 어딘가를 해매고 있는 걸까?
태일은 급히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넣고 황금빛 거리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바로 그때, 묵직한 뭔가가 태일의 옆구리에 들이받혔다.
퍽!
“큭!”
“우, 우와아아앗!!”
웬 꼬마 하나가 좌측에서 달려 나와 태일과 부딪친 것이다.
태일은 그 바람에 살짝 휘청거렸지만, 정작 와서 들이받은 꼬마는 요란스럽게 나가떨어졌다.
“아!! 아, 아파!”
다행히 그리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소년은 곧장 일어나 태일을 쏘아보았다.
“아저씨, 길 한가운데서 뭐 하는 거야!”
“이봐, 와서 들이받은 건 너잖아.”
꼬마는 살짝 짜증을 내는 태일을 향해 혀를 비죽 내밀어 보이더니, 곧 도로 반대편으로 달려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지금 태일에게 그런 꼬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찾아야 한다. 아니, 찾을 것이다.
한세연, 그녀가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이런…….’
…주머니에 시계가 없었다.
‘그 녀석이군.’
방금 와서 부딪친 소년이 아주 짧은 틈에 솜씨 좋게 빼 간 것이다.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긴장을 푼 게 화근이었다.
그때, 태일을 지켜보고 있던 양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이보게. 자네, 뭐라도 잊어버린 겐가?”
태일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부연했다.
“아까 그 꼬맹이… 뭔가 수상해 보여서 말이야. 이 구역에는 소매치기들이 많거든.”
“…….”
태일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소년이 사라진 골목을 바라보았다.
이미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쯧쯧, 소매치기 꼬맹이들은 복잡한 골목 곳곳에 숨어들기 때문에 잡는 건 거의 불가능하네.”
중년 남자가 딱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뭔가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 겐가?”
“그래. 반드시 찾아야 하는 물건이지.”
“이런, 꽤나 값이 나가는 물건이었나 보구먼.”
“…….”
태일은 다소 수다스러운 남자에게 더는 붙잡혀 있고 싶지 않았기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잠깐 기다리게.”
그러나 중년 남성은 사람 좋은 얼굴로 태일을 붙잡은 채 그치지 않고 말을 늘어놓았다.
“무작정 그 꼬마를 찾아다녀 봐야 의미가 없어. 내 이곳에 아는 상인들이 많으니까, 수소문해서 놈들이 그 물건을 팔기 전에…….”
남자를 쳐 내지 못한 채 살짝 귀찮아지려는 찰나, 태일의 눈에 한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피의 언덕에서 만난 바로 그 소녀가 남자의 등 뒤, 전봇대에 몸을 숨긴 채 태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