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0화 프롤로그
쿨럭쿨럭.
시야가… 붉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한 붉은 언덕.
공장 지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50구역 정중앙에 있는 이 언덕을 사람들은 ‘피의 언덕’이라 불렀다.
오늘처럼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이면 붉은 흙먼지가 흩날려 핏빛을 띠곤 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아니, 아마도 50구역 주민들이 자신의 신세를 자조하며 붙인 명칭이었을 것이다.
“부당하게 빼앗긴 권리를 돌려받고.”
“잃어버린 자유를 쟁취할 것이며.”
붉은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우리는 맹세했다.
“약자를 위해 앞장설 것이고.”
“평등한 미래를 위해 싸울 것을.”
언덕의 정상에 세워진, 정체 모를 검은 탑 앞에서.
“이 탑 앞에 맹세하노니…….”
다섯의 젊은 혁명가가 맹세한 그날과 같이 탑은 흙먼지 속에서도 검게 빛나고 있었다.
“너희들, 어쩌다 그렇게 된 거냐. 어쩌다가… 괴물이 된 거냐.”
탑은 그대로이건만, 맹세는 깨졌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신태일. 네가 무모한 생각만 하지 않았어도 우린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거다.”
빼앗긴 생명력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어째서 무모함이 된 걸까?
“그래. 이 지경까지 이르진 않을 수도 있었어. 네놈의 그 비현실적인 이상이!”
부여받은 생명력만큼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 과연 비현실적인 이상인 걸까?
“아직 늦지 않았어, 신태일.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꿔라.”
…아니, 늦었다.
제 동료를 살해한 세 명의 배신자가 한때 그들의 리더였던 태일을 향해 각자의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한때는 함께 관리자를 쓰러뜨리고, 시민을 해방시킨 동지들이다.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믿은 이들이다.
태일은 피식 웃으며 배신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탐이 났냐, 사람들로부터 빼앗은 생명력이? 그 힘이?”
태일은 인간의 탐욕을 과소평가했다.
이들을 믿었다.
“그 힘을 우리가 쓴다면 더 효율적으로 적과 싸울 수 있어.”
…개소리.
“동지들이 피 흘려 얻은 것이다. 부조리에 순응하던 멍청이들에게 그냥 건네주자고?”
…처음부터 그런 바보짓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아직 우리의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우리에겐 그 힘이 필요하단 말이야!”
…아니. 혁명은 이미 실패했다.
목적을 잃은 폭력에 정의니 혁명이니 하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기만일 뿐.
애당초 저들의 목적은 태일과 달랐는지도 모른다.
쿨럭.
피를 한 움큼 쏟아 낸 태일이 가만히 주머니에서 낡은 회중시계를 꺼냈다.
회중시계는 동지이자 연인이던 세연이 며칠 전 태일에게 준 선물이었다.
세연은 시계를 태일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시계 역시 멈추지 않을 거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시계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시계가 암시하는 결론을… 태일은 믿고 싶지 않았다.
살아 있을 것이다.
무사히 도망쳤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태일은 이를 악물고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신태일, 순순히 조각을 넘겨. 우리도 널 이렇게 죽이고 싶진 않다.”
생명력을 봉인해 놓은 창고의 열쇠.
혁명가들은 관리자들로부터 빼앗은 생명력의 열쇠를 총 다섯 조각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태일은 그중 두 개의 조각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아가야 할 생명력을 독점하려는 배신자들.
태일은 가만히 그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엿이나 먹어, 이 새끼들아.”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와 동시에 태일의 몸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지직, 지지직.
붉은 흙먼지 속, 태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여러 갈래의 푸른 줄기들이 선명하게 빛난다.
“쿨럭!”
그럴수록 히트맨들이 박아 넣은 총알들이 태일의 몸을 좀먹었다.
힘을 사용할수록 몸속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 터였다.
그럼에도 태일은 힘을 모조리 끌어냈다.
삶을 포기한 태일의 각오에 배신자들은 경악하며 물러섰다.
“저, 저런 미친!”
“독한 새끼! 기어코…….”
‘소울(Soul)’.
‘생명력’이라고도 불리는 인간 고유의 힘.
태일이 가진 소울은 ‘신의 힘’이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태일을 세계에서 단 네 명뿐인 1급 수배자로 만들어 준 힘.
15개 지역을 해방시킨 기적의 힘.
“젠장, 놈을 없애! 힘을 쓰게 내버려 두면 안 돼!”
“신태일, 힘을 쓸수록 죽음을 앞당길 뿐이야. 당장 멈춰!”
“이 개자식이……!”
배신자들이 저마다 아우성을 쳤다.
그 와중에 셋은 제각기 살기 위해 저마다 힘을 끌어냈다.
대머리의 배신자가 2미터에 이르는 석장으로 붉은 땅을 내려친다.
‘흙의 소울’, 스톤 퀘이크(Stone Quake).
대지가 마구 흔들리며 붉은 흙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주먹이 솟아올랐다.
사람 하나쯤은 가볍게 깔아뭉개 버릴 거인의 주먹이 태일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거인의 주먹이 땅을 강하게 내려치며 붉은 먼지를 일으킨다.
그러나 거인의 주먹은 곧이어 시퍼렇게 뿜어져 나오는 전류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한낱 붉은 먼지로 화한 주먹 속에서 푸른 전류가 선명히 빛났다.
“아직도 저만한 힘이… 이런 괴물 새끼!”
“죽어어어어어어어어!”
회색 머리칼의 배신자가 하늘을 향해 검을 들어 올리며 살기 가득한 눈으로 푸른 전류를 노려보았다.
‘어둠의 소울’, 코스믹 하울링(Cosmic Howling).
공중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며 사방이 어둠에 잠긴다. 이어 거대한 크기의 운석이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꽝!
거인의 주먹이 떨어진 그 자리를 운석이 연거푸 때리며 매캐한 연기를 내뿜었다.
붉은 대지 한가운데 떨어진 운석에 미처 타오르지 못한 불길이 시야를 가렸다.
그러나 깊게 파인 붉은 대지에는 태일의 흔적이 없었다.
“…제, 젠장, 어디로 사라졌어!”
“타, 탑 위다!!”
검은 탑 위, 태일이 차가운 눈매로 세 명의 배신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몸 주변에 푸른 칼날 같은 전류가 흐르고 있다.
“비켜서!!”
노란 장발의 배신자가 검은 탑을 향해 머스킷을 겨누었다.
‘바람의 소울’, 스톰 벨트(Storm Belt).
머스킷의 총구 끝에서 총알 대신 자그마한 돌개바람이 형성되었다.
빙글빙글 돌던 바람은 빠른 속도로 규모를 키워 가고, 어느새 거대한 토네이도로 성장했다.
붉은 흙을 두른 토네이도는 마치 피를 머금은 것처럼 보였다.
태일과 함께 검은 탑 자체를 부숴 버릴 기세로 토네이도가 돌진해 간다.
그러나 태일의 몸이 피의 토네이도에 휘말릴 것처럼 보인 바로 그 순간, 바람의 틈새를 뚫은 한 줄기의 푸른 벼락이 세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번개의 소울’, 핑거 라이트닝(Finger Lightning).
“컥!!”
벼락이 연달아 셋의 복부를 관통했다.
부서진 거인의 주먹, 까만 돌덩이로 남은 운석, 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토네이도.
그저 붉은 흙먼지만이 휘날릴 뿐이다.
세 사람은 온몸이 마비된 채 무릎을 꿇었다.
셋은 몸을 움찔거리며 망연히 검은 탑 위의 태일을 바라보았다.
“잊었나 본데… 너희 셋이 한꺼번에 덤벼도… 내 상대는… 아니었어… 쿨럭!!”
태일의 입에서는 한 줄기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몸이 불안하게 휘청이고 있다.
약해진 전력… 부정확한 조준… 혹은 망설임.
이유가 어느 쪽이든 태일은 세 사람을 죽이지 못했다.
이제 곧 태일의 숨은 끊어진다.
“열쇠는… 내가 저승까지… 가지고 간다.”
검은 탑 위에 서 있던 태일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순간, 세 배신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어 마지막 번개가 정확하게 검은 탑으로… 아니, 태일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태일아, 난 늘 너를 믿고 있어.”
마지막 순간, 태일은 가슴팍의 회중시계를 움켜쥐었다.
‘미안. 난 네 믿음에 부응하지 못했어. 난… 실패했어.’
그리고 번개나 내리치는 그 순간, 태일은 검은 탑의 울림을 들었다.
우우우우우우웅―
어째서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정체 모를 소리가 검은 탑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푸른 벼락 속에서 몸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태일은 탑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고통은… 없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