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6
20화
“화, 황공하옵나이다.”
좌불안석이 이런 것일까.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치천이 황태후의 서릿발 같은 물음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쾅!
그 순간 황태후의 얼굴에서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녀는 급기야 주먹을 들어 좌탁을 힘껏 내리쳤다.
그 파음에 치천의 몸이 움찔거렸다.
“네놈이 그러고도 어의란 말이더냐!”
황태후는 좌탁 위에 놓인 두꺼운 책을 집어서는 치천을 향해 냅다 내던졌다.
퍽!
두꺼운 책에 얻어맞은 그의 관모(官帽)가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기한이 이제 일주일 남았다. 내 더는 긴 말을 하지 않겠다. 일주일, 그때까지 황상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면 네놈의 목도 온전치 못할 것이다!”
황태후는 노기가 시퍼런 목소리로 최후 통첩을 했다.
마현이 흑풍대, 흑사신과 함께 하르센 대륙으로 차원 이동이 된 날. 황사 송겸의 자결에서 비롯된 폭발이 마현의 차원 이동만을 도운 것이 아니었다.
근처에 있던 황제에게까지 그 여파가 미친 것이다.
그 여파에 휘말린 황제는 그 자리에서 실신한 후 반사(半死)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그렇다고 딱히 죽은 것도 아닌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하여 황태후가 전면에 등장하며 반사 상태에 빠진 황제를 대신해 수렴청정에 들어갔다. 그런 그녀가 가장 먼저 명을 내린 것은 바로 어의 치천에게 황제를 쾌차시키라는 것이었다.
그 명을 받고 치천은 황제를 진맥했지만 아직까지 고칠 방도를 찾지 못했다.
황제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서 혼만 쏙 빠져나간 것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진맥을 했지만 그 어떤 병적 증상도 찾을 수 없었다. 어의는 황제가 깨어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아무런 차도도 보이지 않았다.
치천은 황제가 쓰러진 날 이후, 잠마저 줄이며 의학서란 의학서는 모두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의학서에도 지금 황제의 상태와 같은 증상은 없었다.
게다가 처음에는 건강하게 뛰던 맥까지 날이 갈수록 힘이 빠져갔고, 이제는 그 흐름마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황제가 반사 상태에 빠진 지 오늘로 40일 째.
비록 황태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다지만 언제까지 대전을 비워둘 수는 없는 법.
하여 조정 중신들은 황제가 반사에 빠진 그날을 시작으로 49일 후에도 황제가 깨어나지 못한다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 그를 선황으로 모시고 새로운 황제를 등극시키기로 이미 잠정 합의를 본 상태였다.
중신들의 그러한 의견은 황태후에게 전해졌다.
아무리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황태후일지라도 중신들의 그런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깨어나지 않는 황제를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자고로 황제는 만백성의 어버이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황태후는 지금 어의 치천에게 마지막 통첩을 날린 것이었다.
치천이 창백한 얼굴로 태후궁을 나서고 얼마 후, 군부 주요 대신 4명이 들어섰다. 전군도독부 도독동지 원직과 황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며 병부 좌시랑에서 상서가 된 장제, 그리고 죽은 조자경을 대신해 금군도독 자리에 오른 유기량, 마지막으로 황궁과 황도를 수호하는 경위지휘사사의 수장인 지휘사 황영기가 태후궁으로 들어왔다.
“어서들 오세요.”
군부의 대신들이 들어서자 조금 전과 달리 황태후의 목소리는 상당히 부드럽게 변했다.
“역도들을 말살시킬 무림말살정책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황태후가 수렴청정에 들어서며 가장 집중하는 일이 바로 무림말살정책이었다.
무림은 황태후에게 있어 황제인 아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 아니 자칫 승하할지도 모르는 참담한 일을 벌인,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무뢰배 집단일 뿐이었다.
그녀의 이런 정책이 힘을 받아 추진될 수 있는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이백 년의 유구한 역사와 삼대에 걸쳐 황사를 배출했던 대림학당 출신들 중 주요 관직에 있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송겸이 죽자 기꺼이 스승이 하고자 했던 일을 암암리에 이어받은 것이다.
거기다가 이번 일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려는 몇몇 군부의 인물들이 가세했다. 그 때문에 무림말살정책은 황태후의 지원에 힘을 얻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무리말살정책의 중심에 원직과 장제, 유기량, 그리고 황영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틀 후, 자랑스러운 명의 군사들이 일제히 무림문파를 이 땅 위에서 지우게 될 것입니다, 태후마마.”
현재 국경 수비에 필요한 군사를 제외한 전군의 칼날이 무림으로 향하고 있었다.
워낙 대규모 병력의 이동인지라 그 기간만도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마세요.”
“그리하겠나이다.”
원직은 허리를 숙이며 대답한 후 고개를 들었다.
“태후마마.”
원직은 무릎으로 기어 황태후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무슨 일이신가요?”
“소신이 감히 태후마마께 소개시켜 드리고픈 이가 있어 오늘 함께 동행했나이다.”
“본 태후에게?”
“그러하옵나이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본 태후에게 소개시켜 주려는지 몹시 궁금하군요.”
황태후의 말에 원직이 문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닫혔던 문이 열리며 자색 무복을 기품 있게 차려입은 중년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바로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묘였다.
“태후마마께 인사올립나이다. 신 제갈세가의 가주직을 맡고 있는 제갈묘라고 하옵니다.”
제갈묘가 자신을 소개하자 황태후의 얼굴에서 온화하게 감돌던 미소가 싹 가셨다.
“지금 본 태후를 농락하는 것이냐?”
사근사근했던 목소리도 다시 카랑카랑해졌다.
“그런 게 아니옵니다, 태후마마.”
원직이 서둘러 몸을 숙이며 고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어찌 본 태후 앞에 저자를 데리고 온 것이오?”
“신을 내칠 때 내치더라도 신의 말씀을 들어보신 후 내쳐주시옵소서. 태후마마.”
원직은 간곡한 어조로 아뢰며 머리를 조아렸다.
“큼!”
황태후는 마땅찮은 헛기침으로 허락을 대신했다.
“감히 황제폐하의 옥체를 상하게 한 간악한 무림의 역도들을 말살하기 위한 묘수와 방도를 일전에 태후마마에게 고한 바 있습니다. 헌데…… 실은 그 제안은 신들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옵니다. 그것은 전 무림맹의 맹주였던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묘와, 애통하게 돌아가신 송겸 황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짜낸 것이옵니다.”
원직의 말에 황태후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게 정말이오?”
“어찌 태후마마께 거짓을 고하겠사옵니까.”
그때 제갈묘가 나섰다.
“불경한 몸이오나 감히 신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나이까?”
황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라.”
“신의 가문은 과거 촉의 군사였던 제갈공명의 후예들이옵니다.”
“그러한가?”
제갈공명이 어떤 이인가?
황태후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노기가 가셔 있었다.
“그러나 애통하게도 촉이 위의 손에 멸망함에 따라 제갈가의 후손들은 그 후 오랫동안 야인으로 살아야 했사옵니다. 그런 역사적 과정을 지나오며 제갈가는 시류에 휘말리게 되었고 뜻하지 않게 무림문파를 세우게 된 것이옵니다. 허나 황제폐하의 백성 된 자로 그것이 잘못된 길임을 왜 모르겠습니까. 다시 조정에 뜻을 품으려 했으나 그것만이 만사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사옵니다. 언제 역도가 될지 모르는 무림의 폭도들을 두고 어찌 마음 편히 조정에 투신할 수 있겠나이까.”
제갈묘의 달변을 듣자 황태후의 표정은 서서히 부드럽게 변해갔다.
“황제폐하 곁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신의 가문을 부디 어여삐 봐주셨으면 하옵나이다, 태후마마!”
“이런. 그런 가슴 아픈 일이 있었을 줄이야.”
황태후는 평생 자금성 안에서 살아온 몸.
제갈묘의 말은 궤변에 가까웠지만 그 논리의 허점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아들이자 천자인 황제의 곁으로 올 수 없어 괴로워했다는 말만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될 뿐이었다.
“그러던 찰나, 오로지 황제폐하만 보고 살아오신 송겸 황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충정 하나로 언제 황제폐하에게 반기를 들지 모르는 저 간악한 역도들을 처단하기 위해……, 끄윽!”
제갈묘가 말끝을 흐리며 애절한 신음을 토해냈다.
“소신을 죽여주시옵소서. 황제폐하를 지키지 못한 소신을 죽여주시옵소서, 태후마마!”
제갈묘는 오열하며 바닥에 머리를 강하게 내리찧었다.
“그만 하라.”
황태후의 목소리도 어느새 잠겨 있었다.
“이런 충신이 있음을 여태 몰라본 건 본 태후의 죄요, 황상의 죄다.”
황태후는 잠시 소매를 들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찍었다.
“황상께서 어서 눈을 떠 그대와 같은 충신을 만나봐야 할 텐데…….”
“소신이 무슨 수를 쓰든 반드시 저 간악한 무림의 세력들을 말살시키겠나이다!”
“그대의 충심이 참으로 갸륵하구나.”
“황공하나이다, 태후마마.”
고개를 깊게 숙이는 제갈묘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 * *
“스승님, 그런데 대전 분위기가 어찌…….”
해후를 마치고 모두 자리에 앉자 마현은 마교 안팎과 대전에 드리워진 무거운 분위기에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황실에서 무림말살을 천명했다.”
“……!”
마현이 눈을 부릅떴다.
“대략 5만의 황군이 마교로 진군해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하루 정도의 거리다.”
“어, 어찌…….”
마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경험한 황제는 이런 일을 벌일 위인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교뿐만이 아니다. 수십만의 황군이 각 무림방파로 향했다는 정보가 개방에서 전해졌다.”
“믿을 수 없습니다. 황제폐하께서…….”
마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황제폐하를 만나봐야겠습니다.”
“앉거라, 지금은 만나려 해도 만날 수 없을 거다.”
이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가도 만날 수 없다니.
허진은 마현의 심정을 이해했다.
이 땅이 아닌 다른 차원에 다녀왔으니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그렇다 보니 마현이 황제가 반사에 빠진 것을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네가 황사 송겸과 동귀어진(同歸於盡)한 걸로 알려진 그 날, 황제폐하께서는 그 여파에 휘말려 반사 상태에 빠졌단다.”
마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현 조정은 태후마마께서 수렴청정하시고 있단다.”
“태후마마의 분노가 극에 달하셨다. 황제폐하가 깨어나면 모를까…….”
설관악이 허진의 설명을 이었다.
“휴우, 하지만 그런 바람도 이제 기댈 수 없을 거 같구나.”
야율초재의 한숨이 다시 그 뒤를 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상황이 안 좋았다.
당연히 마현의 얼굴에는 고심이 묻어날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과 연계를 하지 않았습니까?”
“제갈묘에 의해 사분오열된 무림맹이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형국이니 무림맹이 유지될 리가 있겠느냐? 걸왕께서 어떻게든 무림맹의 이름으로 정파들을 모으려고 한다만 쉽지 않은 모양인 것 같구나. 뒤늦게 몇몇 정파들이 힘을 합쳤다지만…….”
대략적인 설명만으로도 마현은 정파 쪽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암투와 배신이 끊임없이 난무했던 무림맹.
그렇다 보니 서로 믿고 등을 맡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풍전등화.
그야말로 바람 앞에 촛불이 아닌가.
황실와 대명제국의 황군이라는 거대한 바람 앞에 무림은 언제 꺼질지 모를 미약한 불씨만을 안고 있는 셈이다.
‘모든 일이 마무리가 되었다고 여겼거늘.’
마현의 마음도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