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5
19화
분명 무림의 일을 완벽히 마무리 짓지 않았지만 자신이 없어도 바로잡혔을 거라 낙관적으로 생각했었다. 어차피 사건의 원흉이었던 황사의 목숨이 끊어졌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 말인가?’
“이 썅, 뭘 봐?”
마현의 상념은 흑도의 험상궂은 말에 깨어졌다.
“으아악! 나 살려, 걸음아 나 살려라!”
몇몇 병사들은 병장기마저 잊은 채 줄행랑을 쳤다.
“제게는 어린 노모와 아직 젖조차 떼지 못한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저 목숨만은, 천벌만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바닥에 쿵쿵 머리를 찧으면서 발발 떠는 이도 있었고, 아예 거품을 물며 기절하는 이들마저 속출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윽박지르기도 어려운지라 흑도는 쌍심지를 켠 채 그저 입맛만 쩝쩝 다실뿐이었다.
“흑사신.”
“예, 주군.”
마현은 흑사신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일루젼!”
묵빛 마나, 어둠의 마나가 흑사신의 몸에 뿌려졌다. 그러자 다양한 빛깔의 머리색과 눈동자를 하고 있던 흑사신이 검게 물들며 중원인처럼 변했다.
하르센 대륙 토착민들의 몸을 새로 얻은 흑사신이었다. 그들이 그 모습 그대로 움직인다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게 분명했다.
좀 더 개방적인 마교 안이라면 상관없지만 그들이 마교에만 머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마현이 그들의 머리와 눈동자의 색을 바꾼 것이다.
이어 축골법(縮骨法)으로 몸에 큰 변화를 주지 않는 한도에서 얼굴 생김새도 살짝 바꾸었다.
약간 어색하기는 했지만 바뀐 모습은 누가 봐도 중원인이었다.
“일단 본교로 돌아가자.”
“명!”
흑사신은 나직하게 복명했다.
* * *
마현과 흑사신, 흑풍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마교의 외진 곳에 위치한 마구간 터, 지금은 섬광마지(閃光魔地)라 명명된 워프게이트진 위였다.
마현이 있을 때에는 마교에서도 중요한 요지였기에 철저히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었지만 그가 죽은 걸로 알려지며 이제는 하나의 상징적인 장소로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을 뿐이었다.
마현은 섬광마지를 벗어나 본교 내성으로 향했다.
“분위기가 어둡습니다.”
왕귀진이 주변을 감도는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렇군.”
마현은 발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자연스러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기 때문일까.
챙챙챙!
“걸음을 멈춰라!”
내성으로 통하는 성문을 지키고 있던 마인들이 긴장된 목소리로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외성에서 내성으로의 가늘 길이다.
전시가 아니라면 이 정도로 마기가 사방으로 충천해 있지 않을 것이다.
마현은 침음을 삼키며 자신들을 가로막은 이들의 수장을 찾았다. 마현은 반가운 마음에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군, 혈검대주.”
마침 내성으로 통하는 성문을 지키는 이들은 바로 혈검대였던 것이다.
“……!”
혈검대주의 눈동자가 마현을 향한 순간 파르르 떨렸다. 그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소, 소교주이시옵니까?”
혈검대주는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한 채 마현 앞으로 걸어왔다.
“소교……, 흑풍마군을 뵈옵니다!”
혈검대주는 소교주라는 단어에서 말을 흐리더니 바닥에 오체투지했다.
“잘 있으셨소?”
“다행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살아 돌아오셔서.”
혈검대주는 격앙된 목소리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흑풍마군을 뵈옵니다!”
“소교주님을 뵈옵니다!”
바닥에 부복하는 혈검대는 통일되지 않은 호칭으로 제각각 마현에게 예를 취했다.
“어서 대전에, 교주님에게 흑풍마군께서 살아서 복귀했음을 알려라! 어서!”
혈검대주는 고개를 돌려 수하에게 호통 치듯 명을 내렸다. 그러자 한 혈겸대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내성 안으로 사라졌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라, 혈검대주.”
마현은 혈검대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운 후 혈검대주를 불렀다.
“하명하시옵소서.”
“내가 없는 사이 소교주 직이 채워진 모양이군.”
마현의 말에 혈검대주의 몸이 움찔거렸다.
“사공찬인가?”
그 물음에 혈검대주의 몸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 그렇습니다.”
“사공찬이라…….”
마현의 중얼거림에 혈검대주는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잘 되었군.”
마현이 흡족한 미소를 보이자 오히려 혈검대주가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이런, 스승님은 무고하시고?”
“교, 교주님 말씀이시옵니까?”
혈검대주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본인에게 교주님 말고 스승님이 또 있던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혈검대주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소, 속하의 잘못을…….”
“하하하, 농담일세. 농담이야. 그래 무고하시고?”
“그렇습니다.”
혈검대주는 식은땀을 마현 몰래 닦아야 했다.
* * *
마교 대전, 마주전.
그곳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현 마교 교주인 허진만이 아니라, 태상교주가 된 사공소와 소교주 자리에 오른 사공찬, 오대 장로들과 군사 공효, 남만야수궁의 궁주 야율초재와 소궁주 야율황기, 마지막으로 북해빙궁의 궁주 설관악과 소궁주 냉천휘와 하얀 소복을 입은 설린이 자리하고 있었다.
“휴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두 시진 가까이 이어진 회의.
하지만 진척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무거운 침묵에 빠져 회의 자체도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대전 안에 간간히 튀어나오는 소리라고는 하나같이 깊은 한숨뿐이었다.
“무림맹 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야율초재의 답답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 대신 허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나마 걸왕과 소림방주께서 어떻게든 무림맹을 다시 세우고자 하지만 이미 사분오열된 무림맹입니다. 의견 통합은커녕 재건의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하오.”
“무당파는요?”
설관악이었다.
“황태후마마를 찾아뵈었다가 문전박대만 당했다고 하오.”
“허어……!”
하나같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본 것이 무당파이자 장문인인 청하진인이었다.
“이제 하루 지척이거늘……. 길어야 이삼 일…….”
사공찬이 중얼거렸다.
“제길! 마현, 그놈만 있었더라도…….”
죽도록 싫으면서도 그의 힘을 미치도록 그리운 사공찬이었다.
사공찬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하얀 소복을 입고 있던 설린의 몸이 움찔거렸다. 이윽고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그녀의 좁은 어깨가 가늘게 흔들렸다.
비록 그녀의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오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그녀가 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젠장, 그러게 왜 쳐 죽어? 쳐 죽길!”
야율황기가 울분에 찬 목소리를 삼켰다.
“흐윽, 흑흑흑!”
야율황기의 목소리까지 이어지자 설린의 입술에서 기어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황기야!”
야율초재가 야율황기를 나직하게 꾸짖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야율초재도 더 이상 야율황기를 꾸짖지 못했다. 애써 눈물을 꾹 참고 있는 야율황기의 벌게진 눈동자를 본 까닭이었다.
그때였다.
콰당!
대전 문이 부서질 것처럼 거칠게 열렸다.
“교, 교주님!”
그리고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이는 바로 혈검대주의 명을 받고 내원으로 달려온 혈검대원이었다.
“무슨 일이냐?”
대전 안에 모여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혈검대원에게 모아졌다.
“지, 지금…….”
혈검대원은 속 시원하게 말을 풀어내지 못했다.
그로 인해 허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흐, 흑풍마군께서……, 흑풍마군께서…… 생환(生還)하셨습니다.”
우당탕탕탕!
설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의자가 거칠게 뒤로 넘어졌다.
“가가께서?”
“뭐, 뭐라?”
허진은 빛살처럼 혈검대원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 말이 사실이더냐?”
마현이 죽었다는 날, 딱 그 하루를 빼고는 그동안 평정심을 유지했던 허진이었다. 그런 허진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자,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스승님.”
그 대답은 혈검대원의 뒤에서 들려왔다.
밝은 빛을 등지고 한 무리의 사내들이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 선두에 서 있는 이는 바로 마현이었다.
“흑풍대, 무사 귀환을 보고합니다!”
마현 뒤에 서 있던 흑풍대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우렁찬 목소리로 군례를 취했다.
“이제 스승님을 떠날 일은 없을 겁니다.”
남들은 모르지만 허진은 그 말의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랬던 것이냐?”
허진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그래, 일은 모두 해결한 것이냐?”
“본교의 철칙. 피의 값은 피로 갚는다, 그것을 이행하고 왔습니다. 제자는 본교의 마인입니다.”
“잘 했다, 잘 했어. 이제는 너를 떠나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구나.”
허진은 마현에게로 다가가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험험.”
그런 허진의 뒤로 사공소의 헛기침이 들려왔다.
“거 짧게 좀 하게. 뒤에 기다리는 처자가 불쌍하지도 않은가?”
사공소의 말에 허진이 눈물을 닦을 사이도 없이 ‘아차!’ 하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런 허진의 뒤로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설린이 서 있었다.
“미, 미안하구…….”
허진의 사과도 설린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설린은 허진을 밀치다시피 그 옆을 스쳐지나가 마현 앞에 섰다.
그런 그녀의 뺨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미안하오, 설린.”
“밉사옵니다, 소녀는 가가가 밉사옵니다.”
설린은 이번엔 입을 가리고 펑펑 울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지금의 울음은 기쁨이 깊이 배어 있었다.
마현은 그런 설린에게 한 걸음 다가가 어깨를 부여잡고 꼭 안아주었다.
콩 콩 콩!
설린은 그런 마현의 품에 안겨 그의 가슴을 자그만 주먹으로 때리고 또 때리며 연신 흐느꼈다. 마현은 그런 설린의 고사리 같은 주먹을 피하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그저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 * *
무거운 공기가 팽배한 자금성.
그 자금성에서도 다른 곳보다 더 경비가 엄중해 발을 들여놓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은 곳이 있었으니, 내원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태후궁이 바로 그곳이었다.
좌탁을 앞에 두고 한 노파가 오연하게 앉아 있었다. 그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인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등이 살짝 굽은 이 왜소한 노파를 자금성 내에서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이제는 그 노파의 말 한 마디에 수천수만의 목숨을 빼앗아갈 수 있는 무소불위의 힘이 실려 있었다.
그 노파는 바로 현 황제의 어머니인 황태후였다.
“어의가 들었사옵나이다, 태후마마.”
“들라 하라!”
매서운 눈빛만큼이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예이.”
가냘픈 환관의 목소리에 이어 문이 열리며 체격이 좋은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전대 어의인 구유의 제자이자 현 자금성의 어의로 있는 치천이었다.
어의 치천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낯빛이 어두웠다. 또한 살얼음판을 걷는 장정처럼 몹시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황태후 앞으로 걸어가 대례를 올린 후 착석했다.
“어찌 되었느냐?”
황태후의 목소리는 비수처럼 날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