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2
16화
“무릎을 꿇어라, 그러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
마현의 마기가 폭풍처럼 피어올랐다.
엄청난 어둠의 마나가 피비린내 자욱한 용병들의 거리를 한순간 뒤덮었다.
그 압도적인 기운에 통합 마탑의 마법사들은 저항의 의지를 버렸다.
쿵!
누군가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쿵쿵쿵쿵!
그걸 시작으로 마탑 마법사들이 두려운 얼굴로 하나 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와아아아아!”
“이겼다! 우리의 승리다!”
용병들과 대장장이, 샤토 마탑의 마법사들은 두 손을 번쩍 치켜세우며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흑풍대주.”
마현은 그 함성을 들으며 무거운 목소리로 왕귀진을 불렀다.
“예, 주군.”
“점혈로 금제를 가하라.”
“명!”
마현의 명에 흑풍대는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은 마탑 마법사들을 점혈하기 시작했다.
“휴우.”
마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피비린내가 자욱한 용병들의 거리와는 달리 하늘은 청명하기만 했다.
자신의 복수가 너무나도 많은 피를 불러왔다. 그 피의 무게가 마현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주군!”
마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전열을 정비하라. 지금 바로 통합 마탑으로 갈 것이다. 오늘로 모든 것을 마무리 한다!”
* * *
통합 마탑 1층 한구석에 위치한 비상용 텔레포테이션과 같은 곳에는 순간 이동 좌표 마법진이 설치돼 있었다.
그곳에 밝은 빛 무리와 함께 카네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양, 스플린. 바다, 샤메일. 대지, 듀락의 주축 마법사들이 모두 빠져나간 통합 마탑의 1층은 매우 한산했다.
“카네티 탑주님?”
비상용 순간 이동 좌표 마법진에 카네티가 모습을 드러내자 통합 마탑 소속의 한 마법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카네티를 불렀다.
“마탑주님은 어디 계시냐?”
“아마 대전에…….”
통합 마탑 마법사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카네티는 대전으로 통하는 7층 문 앞으로 다시 순간 이동했다.
콰당!
그리고는 대전문을 벌컥 열었다.
“마, 마탑주님! 크, 큰일이…….”
사크스는 대전 태사의에 앉아 있는 이베른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 들어가며 보고했다.
“그래, 카칸이 네놈에게는 무얼 전하라고 하더냐?”
이베른의 차가운 목소리에 카네티의 몸이 굳어졌다.
냉정을 되찾으니 이베른이 앉아 있는 단상 앞에 피투성이가 된 채 부복해 있는 마이런이 보였다.
드르륵!
태사의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카네티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베른이 자리에서 일어나 느린 걸음으로 단상 아래로 뚜벅뚜벅 걸어 내려왔다.
카네티는 화들짝 놀라 바닥에 몸을 바싹 엎드렸다.
“카칸이 지금 온다고 마탑주님께…….”
“지금? 크크크크, 크하하하하!”
이베른은 고개를 젖혀 광소를 터트렸다.
콰르르르르!
그 울음에 대전이 괴로운 듯 비명을 내질렸다.
이베른은 바닥에 바싹 엎드려 덜덜 떨고 있는 두 탑주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쐐애애액― 서걱!
두 줄기의 바람이 마이런과 카네티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큭!”
“꺼억!”
마이런과 카네티의 눈이 동시에 부릅떠졌다.
그런 그들의 목 주위로 붉은 선이 그려졌다. 붉은 선에서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며 그들의 로브를 적셨다.
“이, 이럴 수…….”
“어떻게 우리에게…….”
마이런과 카네티는 마지막 유언을 끝까지 내뱉지도 못했다. 그 전에 그들의 목이 툭툭 떨어져 대전 바닥을 뒹굴었기 때문이다.
이베른은 바닥에 번지는 핏물을 보며 잠시 눈살을 찌푸렸을 뿐 마이런과 카네티의 수급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태반의 제자들을 잃었다.
아마도 사크스도 죽었을 것이다.
카칸의 지독한 심성이라면 충분히 그랬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물론 사크스가 죽은 건 조금 아까웠다.
나름 애정을 들인 제자였으니까.
그렇지만 애제자의 죽음도 그에게는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했다.
중요한 건……, 바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이니까.
그리고 다시 한 번 카칸을 죽이고 절대자의 자리에 앉을 생각이었다.
그거면 된다.
어차피 제자들이야 다시 키우면 되니까.
재능 있는 아이들을 데려와 마탑 마법사로 키워도 되고, 재능이 떨어지는 마탑 마법사들에게는 좀 더 많은 양의 마법서를 풀어 능력을 끌어올리면 된다.
어차피 모든 것을 허물고 새로 짓고 있는 통합 마탑이었다.
여러 개의 마탑이 아닌 하나의 마탑.
그 자리에, 그 권좌에 자신이 앉으면 된다.
주인으로서.
절대자로서.
저벅 저벅 저벅.
이베른은 묵직해 보이는 커다란 창문으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창문 아래로 넓은 마탑 광장과 그 뒤로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 모든 것이 이제 다 내 것이 될 것이다.’
이베른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창문 아래로 몸을 날렸다.
* * *
콰당탕탕탕!
의자가 볼품사납게 나뒹굴었다.
탕!
의자의 주인인 알랜이 책상마저 부숴 버릴 기세로 양손을 들어 내려쳤다.
“뭐, 뭐라구요?”
흥분과 감격이 뒤섞인 외침.
하지만 너무나도 감정이 격하게 실리다 보니 마치 발악하는 듯한 어투였다.
“내가 한 말 그대로이네.”
그런 알랜의 반응에 밀러는 담담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밀러의 담담하고 부드럽던 표정이 문득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눈동자에서 어둠의 마나가 넘실거렸다.
“낄낄낄. 그러니까 지금 당장 마탑 광장으로 모든 용병들을 모아! 일생일대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우히히히히! 용병계의 미래가 걸린 싸움이니까. 독재의 길이 펼쳐질 것인가, 아니면 평등한 마법계가 될 것인가가 판가름 나는 싸움. 우히히히히!”
밀러는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휴우.”
그런 밀러의 모습에 알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광란의 신, 블로흐의 권능의 부작용이라면 저처럼 한순간에 사람이 변해 버린다는 것이다.
몇 번이나 봤지만 밀러의 변화는 익숙해지지 않는 장면이기도 했다.
“뭐 해?”
밀러는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알랜의 엉덩이를 뻥 걷어찼다.
“어서 전서를 띄우지 않고. 그리고 가는 거야, 나와 함께. 낄낄낄! 우히히히히!”
알랜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용병 길드 본부장을 찾으러 뛰어나갔다.
* * *
과거에는 태양의 마탑이 있었던 곳, 지금은 통합 마탑의 이름으로 오연하게 내려다보는 드넓은 광장.
그곳으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용병들의 거리에서 이곳까지의 이동시간은 도보로 대략 1시간.
이백여 명이 조금 안 되던 인파가 단 1시간 만에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늘어났다.
그 선두에 마현이 걷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마현은 마나의 힘을 쓰지 않고 산책을 나온 듯 천천히 걸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마현의 마음은 무거웠다.
단지 복수를 위해 걸음을 내딛었을 뿐인데 너무나 많은 피를 보았다. 과연 그들 중에 죽어도 되는 이가 몇이나 될까 싶었다.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간사하다지만, 지금 되돌아본 스스로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처음 복수행을 시작했을 때, 그리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런 개별적인 죽음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도 이제 멀고도 멀었던 복수행의 끝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많은 생각과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드디어 마탑 광장으로 들어섰다.
툭!
그런 마현의 앞으로 이베른의 그림자가 내려섰다.
대략 3미터 거리를 두고 둘이 마주서자 광장 주위를 빼곡하게 채운 군중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점점 커져갔다. 아울러 광장을 빼곡 들어찬 사람들이 이베른을 향해 내뿜는 살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후후후.”
이베른은 그 살기를 즐기기라도 하는 듯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카칸.”
이베른은 과거 자애롭던 시절처럼 마현을 부드럽게 불렀다. 물론 그 모습 또한 그의 거짓된 탈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내가 오랜 삶을 살면서 깨달은 것이 있지.”
이베른은 적대감이 가득한 광장의 눈빛들을 미소를 지으며 둘러보았다.
“지독한 원한도 치가 떨리는 복수심도 감당할 수 없는 힘 앞에서는 공포가 되고, 거부할 수 없는 권능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는 것을.”
이베른이 입술을 비틀며 차갑게 웃었다.
“나는 만인에게 보여줄 생각이야. 국경을 초월한 절대자의 힘을. 그리고 나는 군림할 것이다. 천 년, 만 년 죽어서도…… 말이지.”
이베른의 눈가에는 웃음으로 인한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잡혔다.
“어리석군.”
마현은 고소를 머금었다.
“어리석다라…….”
이베른은 마치 중얼거림처럼 마현의 말을 되씹었다.
“좋군, 좋아. 그게 바로 너다운 말이지.”
이베른은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마탑의 마법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있었다.
통합 마탑 광장 중앙에 선 이베른과 마현을 중심으로 마탑 마법사와 용병들이 반으로 갈라서 마주선 것이 묘한 대치를 이뤘다.
이베른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은 아름다웠다.
“대륙에서 군림을 시작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군.”
이베른의 몸에서 마나가 폭사되었다.
“피를 보기에도 좋은 날이기도 하고.”
마현의 몸에서도 마나가 폭사되었다.
새하얀 빛과 어두운 빛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8서클의 마나가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했는데, 뭐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군.”
이베른의 얼굴에는 자신에 찬 미소가 드러났다.
그 말에 마현의 안색이 굳어졌다.
이베른은 이미 자신이 8서클에 오른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내가 이 자리에 섰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8서클인가?’
아니다.
이베른 역시 8서클이라면 저처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현의 의문에 마치 답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이베른의 새하얀 빛은 세 가닥으로 갈라지며 뚜렷한 색을 갖추기 시작했다.
“……!”
순간 마현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이베른의 몸을 휘감는 각각의 색을 가진 마나들.
원래 그의 것인 태양, 불의 기운을 가진 붉은 마나 외에도 바다, 즉 물의 기운을 가진 푸른 마나, 거기다 대지, 땅의 기운을 가진 황토빛 마나가 더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불현듯 마현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과거 이베른과 가깝게 지낼 때였다. 물론 그런 이베른의 자애로움은 거짓으로 꾸며진 것이긴 했지만.
어느 날 마현은 이베른의 연구실에서 그가 없을 때 얇은 마법서 한 권을 본 적이 있었다. 하나의 복잡한 마법진과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의 마법 수식들.
마나의 이동, 흡수, 재구성, 조합 등과 밀접해 보이던 마법 수식들.
‘흡정흡기법(吸精吸氣法)?’
금마공으로 치부되어 마교에서도 사장된 마공과 유사했다.
그것은 타인의 기를 강제로 흡수하는 마공이었다. 그런 마공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대부분 그런 류의 마공을 흡정흡기법이라 통일해 부르고 있었다.
‘그런 것인가?’
마현의 눈동자가 이베른의 눈을 직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