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1
5화
통합 마탑에 초대받지 못하고 제외된 마탑이 있었다.
바로 대장장이, 샤토 마탑.
그리고 마탑주도 아니오 탑주도 아닌 수장 게오르게.
비록 저들의 하수인이 되어 마탑주 자리에 오를 때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래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은 되돌리지 못하는 법.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암암리 힘을 키우며 기회를 엿보는 것뿐이었다.
비록 고서클 마법사의 수는 다른 탑에 비해 적다고는 하나 대장장이의 신, 샤토의 마탑이다. 모자란 힘은 마법무구로 채울 자신이 있었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게오르게의 사제이자 지금은 부탑주인 케이디가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게오르게는 아래로 향했던 시선을 올려 마주앉아 있는 케이디를 쳐다보았다.
“가장 좋은 건 우리의 힘을 과시하며 동등한 조건으로 마탑에 들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
게오르게도 그것에 대해 그동안 숱하게 고민해왔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머리는 그리하라 하지만 내 심장은 그렇지 않아.”
“휴우.”
케이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딱 삼 일만 더 상황을 파악해 보죠. 그 정도면 그다지 늦지는 않을 겁니다.”
“삼 일이라……. 그래 그게 한계겠지?”
게오르게의 물음에 케이디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제자를 풀어 밖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빠짐없이 주시하겠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이왕 하는 거, 정보 길드도 동원해 보겠습니다.”
“미안하네.”
게오르게의 말에 케이디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원래대로라면 그런 게오르게를 설득해 마음을 돌려야 옳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 그와 같은 생각이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 *
마치 허름한 창고에 엉성한 탁자와 의자를 놓은 듯한 싸구려 주점이었다. 하지만 그 크기가 상당히 넓어 족히 오십여 명의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음에도 전혀 북적인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많은 인물들이 모여 있으면 시끌벅적한 소음이 있을 법도 하건만 주점 안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감이 흐를 정도였다. 그리고 모든 시선이 주점 정중앙으로 향해 있었다.
이목이 모여 있는 곳에는 왕귀진과 늑대왕 용병대 부대장 아그논이 마주앉아 있었다.
잠시의 침묵 뒤 왕귀진이 입을 열었다.
“강요는 하지 않겠다.”
그 말에 아그논은 오히려 입을 닫고 눈을 감았다.
고심에 빠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시 찾아든 정적이 너무 오래 이어졌던 까닭일까.
“고민할 거 뭐 있습니까? 이 기회에 옴팡 붙어보자고요. 콧대 높은 마법사들의 코 한 번 뭉개 봅시다.”
“와하하하! 그거 한 번 좋은 생각일세!”
“우리는 용병이다. 용병이 뭐야? 돈에 목숨을 건 놈들이 아닌가?”
“맞소. 아무리 늑대왕을 흠모해 자발적으로 참가했다지만 나는 먹여살려야 할 처자식이 있소.”
하나둘 터져 나오던 목소리는 어느새 시장 통을 방불하게 할 정도로 왁자지껄하게 변했다.
“조용!”
급기야 귀가 먹먹할 정도로 소음이 커지자 아그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뜻밖의 말씀인지라 당장 답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해한다.”
왕귀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아그논은 빠른 시일 내에 의견을 모아 답을 주기로 했다.
왕귀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점을 걸어 나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왕귀진의 무뚝뚝한 얼굴에 가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 표정이 서서히 변하며 어느 순간 얼굴 근육이 굳어졌다.
조금씩, 그리고 그물망처럼 촘촘히 좁혀오는 기운들. 그중 기감을 찌릿하게 찔러오는 몇몇 강대한 기운도 느껴졌다.
‘마탑인가?’
아마도 맞을 것이다.
이 정도의 동원력에, 모골이 송연하게 할 정도로 압박감을 줄 수 있는 집단이 얼마나 되겠는가?
자신은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왕귀진은 고개를 돌려 여전히 갑론을박하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용병들을 쳐다보았다.
“아그논!”
왕귀진은 급히 아그논을 불렀다.
비록 자신을 따르는 늑대왕 용병대라고 해도 실질적인 수장은 아그논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통한 지휘가 더 효율적이라 판단한 것이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의아해하던 아그논이 왕귀진의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급하다! 당장 전투태세를 갖추라!”
“……?”
“적이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는 대륙을 호령하는 십좌왕 중 수좌를 차지하고 있는 늑대왕이다. 결코 이런 일로 허언을 할 리 없다.
“덩컨! 바드!”
아그논은 늑대왕 용병대의 주축 인물이자 자신과 함께 용병대를 이끌고 있는 둘을 불렀다.
“전투 준비!”
“……?”
“부, 부대장. 전투 준비라니요?”
“늑대왕 명이시다!”
그 말만으로 충분했다. 굳이 다른 보충설명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들은 오로지 늑대왕 왕귀진 하나만 보고 모인 용병들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게다가 늑대왕 용병대가 창설되고 처음 떨어진 명이니 더더욱 그렇다.
“조용! 지금 당장 출전 편제로 전투를 준비한다!”
덩치만큼 걸걸한 목소리의 바드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러자 시끌벅적하던 주점 안의 분위기가 한순간 싸늘해졌다.
“젠장!”
그때 왕귀진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주점 구석 벽 앞이었다.
콰과과광!
왕귀진이 벽 앞에 나타나자마자 순간 벽면이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쐐애애액!
왕귀진은 마력을 폭출시키며 빠르게 검막을 펼쳤다.
크극 크그그극!
은은한 먹물처럼 펼쳐진 검막 위에 폭음과 함께 자욱한 돌가루로 이뤄진 먼지가 피어올랐다.
“급습이다!”
왕귀진 뒤에서 어정쩡하게 일어서던 용병들이 화들짝 놀라며 탁자를 들어 몸을 보호했고 동시에 각자의 무기들을 뽑았다.
기습 공격을 모두 막았다고 느낀 순간 왕귀진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콰과과과광!
다른 한쪽 벽이 터졌다.
“으아아악!”
“크아악!”
근처에 있던 용병 몇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보지 않아도 즉사했을 것이다.
그 비명을 시작으로 벽면 여기저기서 폭발이 일어났다. 뿌연 먼지구름이 주점을 뒤덮었다.
“중앙으로 모여라! 어서!”
하지만 그 명도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벽이 모두 허물어지면 건물 전체가 붕괴될 게 아닌가. 이대로 있다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할 게 뻔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갈 수도 없었다.
밖은 이미 마법사들이 단단하게 포위망을 구축하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자 아가리에 그대로 머리를 들이미는 꼴이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는 노릇.
“아그논.”
“예, 대장님.”
“내가 먼저 길을 뚫겠다. 지금부터 늑대왕 용병대가 우선시해야 할 것은 오로지 탈주다!”
무겁게 명령을 내린 후 왕귀진은 허물어져 밖이 훤히 보이는 구멍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마법사 무리 속으로 뛰어들어 난전으로 몰고 가는 것이 더 유리하겠지만 일단은 모든 이목을 자신에게 모아 어떻게든 주점 안에 머물고 있는 늑대왕 용병대에게 도피할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조금이라도 살아날 확률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터벅 터벅 터벅!
왕귀진은 마치 동네 어귀에 마실이라도 나온 것처럼 느긋한 걸음으로 주점 앞 제법 넓은 길에 발을 내딛었다.
마차 두어 대는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의 대로(大路)임에도 불구하고 빼곡하게 진을 치고 있는 마법사들로 인해 오히려 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왕귀진은 태연한 얼굴로 걷고 있었지만 롱소드를 쥐고 있는 손아귀에는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최대한 느긋하게 움직였고, 그리고 오연하게 턱을 살짝 들어 주위를 살폈다. 왕귀진이 제법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곳에는 대지, 듀락의 탑주 몬텔레와 그의 제자이자 부탑주인 티모시, 그리고 프리크가 서 있었다.
‘대지, 듀락의 탑?’
그들이 입고 있는 로브에 새겨진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는 마탑주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부탑주?’
카밀로의 죽음과 마탑의 통합을 알지 못한 왕귀진이었기에 그 정도만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추측도 그냥 자연스레 떠오른 것이지 굳이 추리하고자 애쓴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대지, 듀락의 마탑이 자신과 늑대왕 용병대를 노렸다는 것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했다.
공격 중 최상의 공격은 적의 틈을 노린 선제공격이다.
왕귀진의 왼손이 중지가 엄지 아래로 말려들어갔다. 그리고 그 두 손가락 사이로 강기로 이루어진 환이 만들어졌다.
폭마지(暴魔指)!
마교 교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마공 계열의 지법이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한 마디로 사장된 것이나 다름없는 지공이다.
폭마지가 마교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첫 번째 이유는 극심한 마력의 소모 때문이다.
어지간한 일류가 아니고서는 단 한 번 펼침으로 마력이 고갈될 수 있을 정도로 폭마지는 마력의 소모가 크다.
두 번째 이유는 워낙 공격이 단순한 까닭에 마교 교인이 아니더라도 정파 쪽에도 널리 알려져 있고, 그를 대비하기 위한 파훼법도 여럿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원 무림의 이야기.
이곳은 하르센 대륙이다.
비록 마력의 소모가 크겠지만 이제는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장강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마력이 몸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이잉―
미약한 마력의 울음이 토해지는 순간.
핑―!
왕귀진의 손에서 먹물 같은 강환이 빗살처럼 몬텔레를 향해 날아갔다.
“헙!”
몬텔레는 순간 엄습해온 위기감과 무시할 수 없는 마나를 느끼며 재빨리 몸을 틀었다. 하지만 왕귀진의 폭마지를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푸학!
몬텔레의 왼쪽 어깻죽지에서 붉은 핏방울이 튀었다.
“큭!”
몬텔레는 왼쪽 어깨를 잡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스, 스승님!”
곁에 있던 티모시가 놀라 주저앉는 몬텔레의 몸을 감쌌다. 이어 프리크가 그 둘을 등으로 가렸다.
“훗!”
왕귀진은 그 순간 프리크의 미간을 향해 폭마지를 펼쳤다.
핑!
가느다란 파음이 프리크의 미간을 꿰뚫었다.
붉은 핏물과 허연 뇌수가 프리크의 뒤통수에서 터졌다.
한 마디 비명도 없이 프리크의 몸은 썩은 고목나무처럼 뒤로 넘어갔다.
“마, 마법사다!”
“흑마법사다!”
폭마지를 처음 보는 탓에 대지, 듀락 탑의 마법사들은 왕귀진을 흑마법사로 오인했다.
“죽여라!”
티모시는 몬텔레의 몸을 감싸듯 부축하며 소리쳤다.
후우우우웅!
쿠오오오!
무려 백여 명에 달하는 마법사들의 마나가 왕귀진, 단 한 명에게 집중됐다.
이로써 늑대왕 용병대의 안전은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
비록 대마법사는 없다고 해도 백여 명의 마법사들이 내뿜는 마나는 숨쉬기도 벅찰 정도로 왕귀진을 압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귀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나오너라, 나의 전사들이여!”
왕귀진의 몸에서 일어난 마력이 다시 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 잠들어 있는 열 기의 다크나이트들을 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