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325화 (325/351)

# 325

24화

“사람들을 모두 내성으로 물리게.”

“페, 페로스 공작 각하.”

눈앞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엘프레터에게 그의 명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국왕 전하의 뜻일세.”

“하, 하오나…….”

비슬라바 국왕의 허락이 있었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엘프레터는 선뜻 명을 따르지 못했다.

“엘프레터 경!”

결국 참다못한 페로스 공작이 역정을 내고야 말았다.

엘프레터는 그런 페로스 공작의 충혈된 눈빛을 보았다. 그리고 그 의미도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엘프레터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힘겹게 대답했다.

“모두 왕실마법궁으로 돌아가라.”

엘프레터는 왕실마법사들을 내성으로 물리고는 자신도 그들을 따라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엘프레터의 입술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휴우.”

그 모습에 페로스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페로스 공작은 마현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후 그 역시 워프게이트진이 설치된 곳을 벗어났다.

쏴아아.

페로스 공작이 워프게이트진이 설치된 곳을 빠져나가자마자 마나로 구성된 빛이 워프게이트진에서 뿜어져 나왔다.

워프게이트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농도가 진해질수록 마현의 눈에서 넘실거리는 살기도 더욱 짙어졌다.

파밧!

빛 무리가 터지고 워프게이트진 안에서 열 명의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벨로는 조화, 스플린 마탑의 마법사들을 대동한 채 워프게이트진에서 내려오다가 마현을 보자 걸음을 멈췄다. 그런 그의 얼굴은 서서히 창백하게 변해갔다.

저벅!

마현은 그런 벨로에게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 발걸음에 맞춰 벨로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어, 어떻게……. 분명 네놈은 죽었을 텐데.”

벨로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체스와프에게 이런 말을 했었지.”

마현은 벨로를 향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천천히 살의가 담긴 목소리를 내뱉었다.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고!”

후우우웅!

마현의 몸에서 극한의 살기가 피어올랐다.

“허억!”

“어, 어둠의 마력?”

마현의 몸 주위로 폭사되는 묵빛 마기에 벨로와 함께 온 조화, 스플린 마탑의 마법사들은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도, 돌아가야…….”

“훗!”

벨로의 다급한 명령에 마현은 냉소를 터트리며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퍼석!

그 손짓에 맞춰 워프게이크진을 구성하는 마나석이 산산조각이 났다.

“아무도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한다!”

마현의 마력은 한순간 그 주변을 장악했다.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채.

* * *

“엘프레터 경.”

페로스 공작이었다.

워프게이트진에서의 일이 마음에 걸린 모양인지 잰걸음으로 자신을 쫓아온 모양이었다.

“공작 각하.”

엘프레터는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잠시 나와 걷지 않겠나?”

페로스 공작은 착잡한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엘프레터는 그렇기에 조용히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음을 내딛었다. 둘은 방향도 목적지도 잡지 않고 그저 발걸음 닫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나를 탓하게.”

“무슨 말씀이신지…….”

엘프레터의 말에 페로스 공작은 걸음을 멈췄다.

“전하께서 그리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내게 있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네 마탑주를 끌어들였네. 그게 발단이 되어 이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페로스 공작은 이 일의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질 것임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그게 어떻게 공작 각하의 잘못이란 말씀이십니까?”

그와 함께 하멘 평원의 전장에 참여했던 엘프레터였다. 그렇기에 왜 네 마탑주를 끌어들였는지 그 이유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차라리 다시 네 마탑주에게 연락을 하지 그랬습니까. 그들이 시작한 일이니 그들 보고 일을 마무리 지으라고 하지 않으시구요.”

엘프레터의 말에 페로스 공작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카칸이 7서클의 흑마법사라면 그렇게 했겠지.”

순간 엘프레터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법사들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서클을 속이지 않는다지?”

엘프레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8서클이라고 하더군.”

페로스 공작의 무거운 한숨 섞인 말에 엘프레터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의 뜻을 거부하면 그 순간 왕국은 망하네. 그가 작심한다면 전하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왕국이 무너지게 될 터이니……. 그러니 나를 탓하게, 나를. 알겠나?”

페로스 공작은 힘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엘프레터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럼 나는 밀린 국정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네.”

점점 멀어지는 페로스 공작의 어깨가 그 어느 때보다 작아 보였다.

엘프레터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절망 그 자체였다. 그리고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원망이었다.

깨끗하게 보이던 주위 사물들이 흐릿해졌다.

눈에 습기가 찬 까닭이었다.

엘프레터가 힘없는 발걸음으로 왕실마법궁으로 들어가 자신의 연구실로 향할 때였다.

살짝 문이 열린 통신실에서 고함과도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흑마법사 카칸이 살아 있단 말이오! 그가 죽지 않았단 말이야! 그러니까 당장 이베른 마탑주를 연결해 달란 말이다. 이 개새끼야!”

그 소리에 엘프레터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무슨!’

믿기지는 않지만 카칸이 8서클이라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카칸이 마음먹는다면 당장 테누타 왕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콰당!

엘프레터는 통신실의 문을 박차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통신 수정구 앞에는 워프게이트진에서 카칸의 등장을 보았던 제자가 서 있었다.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제자의 젊은 혈기를 미처 생각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스승님!”

엘프레터는 뛰듯 제자 앞으로 다가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

“스, 스승님!”

제자는 자신이 왜 뺨을 얻어맞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당장 통신을 끊어라, 어서!”

“당장 마탑주를 불러…….”

“이놈!”

결국 엘프레터는 고함을 지르며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제자의 뺨을 후려치려 할 때였다.

『지금 뭐라고 했나? 카칸이 살아 있다고?』

경악에 찬 이베른의 목소리가 수정구에서 터져 나왔다.

엘프레터의 낯이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아닙니다. 제자가 잘못 본 것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엘프레터는 재빨리 부정했다.

『호들갑?』

이베른은 화가 난 목소리로 반문했다.

“정말입니다. 마탑주님.”

엘프레터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호들갑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하겠다!』

그 말에 엘프레터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런 변화를 놓칠 이베른이 아니었다.

“저, 정말 아닙니다.”

하지만 이베른은 이미 심상치 않은 낌새를 차린 후였다.

『경의 말이 사실이라면 엘프레터 경의 제자가,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대가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지금 당장 갈 터이니 좌표를 열게나!』

이베른의 말에 엘프레터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이마에 굵은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절대로 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마탑주님!”

엘프레터는 힘겹게 이베른을 불렀다.

“카칸은 살아 있습니다. 죽지 않았습니다.”

『……!』

당장에 분노에 찬 일갈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지만 의외로 이베른에게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경악에 찬 표정을 지은 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어, 어떻게?』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한 모양인지 이베른의 중얼거림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자를 잡아놓아라. 내 당장 마탑주들을 모아…….』

잠시 후 평정을 차린 이베른이 다급히 말했다.

“카칸에 대한 정보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엘프레터가 빠르게 그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마탑주님, 당신의 목숨과 직결된 정보입니다.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아니 이건 조건입니다.”

엘프레터는 언제 불안에 떨었는가 싶게 침착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을 건넸다.

『정보? 지금 나랑 말장난이나 하자는 건가?』

“아닙니다. 내 마나를 걸고 하는 말입니다. 그냥 오면 마탑주님, 당신은 죽습니다.”

달라진 엘프레터의 분위기를 느낀 이베른은 잠시 침묵했다.

『조건이 뭔가?』

“그와의 싸움에 테누타 왕국을 배제시켜 주십시오. 아니 테누타 왕국을 벗어나 싸우십시오. 그게 제 조건입니다.”

엘프레터는 이베른의 눈을 수정구를 통해 빤히 직시했다.

그의 의지를 느낀 탓인지 이베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 단, 하찮은 정보일 때에는…….』

“카칸은 7서클 흑마법사가 아니라 8서클 대흑마법사입니다.”

엘프레터는 다시 그의 말을 가차 없이 잘랐다.

『뭐, 뭐라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 수정구에 비친 이베른의 상체는 휘청거렸다.

“그러니 지금 오면 마탑주님, 당신은 죽습니다. 조화, 스플린 마탑주 벨로 님처럼…….”

『그, 그건 또 무슨 마, 말인가?』

“약속을 지키리라 믿겠습니다. 그럼 이만.”

엘프레터는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어버렸다.

빛을 잃은 수정구를 잠시 쳐다보던 엘프레터는 고개를 돌려 제자를 쳐다보았다.

제자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엘프레터는 그런 제자를 탓할 힘도 없었거니와 탓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지금은 제 한 몸 추스르기에도 벅찼기 때문이다. 엘프레터는 그런 제자를 홀로 두고 힘겹게 통신실을 빠져나와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8서클이라니……. 정녕 8서클이란 말인가?’

믿을 수 없었다.

자신도 평생 이루지 못한 경지가 아니던가.

하지만 엘프레터가 없는 말을 꾸며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상대로 거짓을 늘여놓기에는 담이 작은 자이다. 특히 마법사가 마나를 걸고 맹세를 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벨로!’

뒤늦게 벨로를 떠올린 이베른은 다급히 소리쳤다.

“조화, 스플린 마탑에 통신을 넣어라. 어서!”

이베른의 눈치를 살피던 마탑의 제자가 화들짝 놀라며 재빠르게 조화, 스플린 마탑에 통신을 신청했다.

“이베른 마탑주께서 벨로 마탑주와 통신을 원하십니다.”

『마탑주께서는 지금 부재중이시오.』

조화, 스플린 마탑의 응답에 마탑의 제자는 고개를 돌려 이베른을 쳐다보았다.

“어디로 갔는지 물어보라, 어서!”

“어디로 가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베른이 시키는 대로 마탑의 제자는 벨로의 행선지를 물어보았다.

『테누타 왕국 측에서 워프게이트진에 대한 설치 및 정비 의뢰가 들어와서 조금 전 그리로 가셨소.』

통신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베른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엘프레터의 말이 사실인 것이다.

이베른은 대략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알게 되었다.

지금 마탑을 괴롭히는 것은 카칸의 망령이 아니라 이목을 숨긴 채 어둠 속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며 사악하게 웃고 있는 카칸 바로 그 당사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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