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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무림에 가다-323화 (323/351)

# 323

22화

간신히 복구공사에 들어간 테누타 왕궁 외성.

쩌저적!

그 외성 중앙 공터의 땅이 지진을 난 듯 갈라졌다.

번쩍!

그 틈으로 검은 마기가 빛처럼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이내 그 주변은 짙은 마기로 가득 찼다.

우드득, 드득!

흙더미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푸학!

땅거죽을 뚫고 손 하나가 튀어 올라왔다.

그 손은 땅바닥을 강하게 내려짚었다.

그그극!

이어 땅이 불룩 솟아오르며 갈라지더니 한 사내가 지상 위로 올라왔다.

그는 바로 마현이었다.

마현이 일어난 곳은 테누타 왕국의 외성, 네 마탑주에게 당한 바로 그 자리였다.

“후우.”

땅 위로 올라선 마현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결을 따라 짙은 마기가 흘러나왔다.

“흐읍!”

마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스스스슷―

그 숨결을 따라 외성 공터에 가득 찼던 마기가 마현에게 모두 스며들었다. 동시에 마현의 눈에서 폭사되던 마기도 완전히 갈무리되었다.

마현은 주먹을 억세게 말아 쥐었다.

몸 안에 팽팽하게 흐르는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 이 느낌이라면 자신을 가로막는 건 무엇이든 부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마현은 마법사이기도 하지만 무인의 길에도 한 발을 걸치고 있었기에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힘의 깊이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힘은 조금 아쉬운 감이 있었다.

원래 군신 아이벤과의 계약은 8서클에 오른 뒤 하려고 했었다.

그 힘을 매개로 8서클에서 9서클로 올라가서 다시 무림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었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랴?’

흑풍대를 믿고, 또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믿었기에 자만하다가 당해 버린 자신의 탓인 것을.

하지만 스승 허진이 그랬다.

산이 있다면 반드시 정복할 수 있다고.

‘나는 좀 더 어려운 산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마현의 고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단은 네놈들부터다!’

마현의 눈에서 살기가 감돌았다.

그때였다.

“누구냐?”

그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현은 상념을 털어버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테누타 왕궁의 외성이군.’

마현은 그때서야 자신이 당했던 장소에서 다시 깨어났음을 알아차렸다.

주위를 둘러본 마현의 눈은 자신에게 소리친 두 명의 기사에게서 멈췄다.

테누타 왕국 왕실기사단 소속으로 짐작되는 두 명의 기사가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일단 자신이 네 마탑주에게 당한 뒤 어떻게 상황이 흘렀는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자박 자박 자박!

마현은 경계 어린 고함을 질렀던 두 기사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냐! 어서 정체를 밝히지 못할까?”

기사들은 마현이 아무런 대꾸도 없이 다가오자 서슴없이 검을 뽑아들며 다시 한 번 고함을 질렀다.

삐이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현이 걸음을 멈추지 않자 재빨리 피리를 입에 물고 길게 불었다.

하지만 이 둘은 알지 못했다.

자신들의 목소리와 피리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마현은 그들과 대략 3미터가량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그 둘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찢어진 양팔의 소매가 마치 거센 바람을 만난 듯 펄럭거렸다. 그의 손에서 무형의 기운이 쏘아져나가 두 기사의 몸을 휘감았다.

“헉!”

“크헉!”

두 기사는 뒤에서 무언가로부터 떠밀리듯 마현이 양손을 내민 곳으로 끌려갔다. 그 둘은 그 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로 인해 주변의 대기가 출렁거렸다.

마현은 전신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발버둥 치던 둘은 마치 단단한 줄에 포박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 정도일 줄이야.’

마현은 8서클이 가진 마력의 힘에 놀랐다.

그의 입술 끝이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갔다.

그 둘을 잡아당긴 건 마법이 아니었다.

순수한 마력으로 일으킨 유형의 힘, 바로 허공섭물이었다.

단순한 물건도 아니고, 마나를 수련한 두 명의 기사를 허공섭물로 끌어당긴 것이다.

굳이 번잡하고 소란스럽게 일을 알아볼 필요는 없었기에 마현은 섭혼술로 그 둘의 심령을 제압했다.

“안내하라, 비슬라바 국왕이 있는 곳으로.”

쪼르르르.

빈 잔에 황갈색의 위스키 시랠이 채워졌다.

비슬라바 국왕은 채워진 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크으.”

꽉 다물어진 입새를 헤집고 독한 술 냄새가 흘러나왔다. 시랠이 원래 독한 술이기는 하지만 그에게 오늘따라 유달리 더 독하게 느껴졌다.

기분 탓이리라.

그렇기에 비슬라바 국왕의 입가에 고소가 걸렸다.

가볍게 여겼던 전쟁이 아니던가. 하지만 패전으로 인해 테누타 왕국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었다.

나라의 버팀목이 되어 주던 소드마스터들을 잃었다.

거기에 하멘 평원까지.

국력이 급격히 쇠약해질 것이 분명했다.

이 틈을 타고 쉬라즈 왕국이 곧 야심으로 번뜩이는 이빨을 드러낼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트로켄 왕국과 평화협정을 맺었다는 것 정도다.

10년간의 불가침 조약.

오랫동안 최약소국이라고 얕봤던 트로켄 왕국에게조차 이젠 고개를 숙여야 할 처지였다. 역설적이게도 테누타 왕국은 트로켄 왕국과의 평화협정을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상황이 아무리 나빠지더라도 앞으로 10년간 쉬라즈 왕국의 압력만은 이겨내야 한다.

“휴우.”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비슬라바 국왕은 다시 술잔을 들었다.

어느새 술잔은 비어 있었다. 비슬라바 국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시랠 병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누군가가 먼저 시랠 병을 들어 그의 술잔을 채웠다.

“고맙…….”

고맙다는 말을 하려던 비슬라바 국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침실.

요 며칠 왕비도 찾지 않았다. 즉, 현재 홀로 있는 침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신의 빈 잔에 술을 채운 것이다.

한껏 오른 취기가 갑자기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비슬라바 국왕은 잔뜩 긴장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술기운으로 눈이 침침해져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사이 그 낯선 이는 비슬라바 국왕 앞에 마주 앉았다.

그사이 침침함이 가시자 비슬라바 국왕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얼굴이었다.

비슬라바 국왕은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누군가?”

침착한 모습을 보이고자 했지만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카칸.”

나직한 중저음이 흘러나왔다.

“카칸?”

금세 누군지 떠올리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이름을 몇 번 읊조리던 비슬라바 국왕의 눈이 갑자기 화등잔처럼 크게 떠졌다.

“카칸!”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진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가득 담겨 있었다.

“주, 죽지 않았던가?”

애서 왕으로서의 권위를 지키려고 했던 의지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비슬라바 국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마현을 쳐다보았다.

“훗!”

마현의 냉소에 비슬라바 국왕은 체념이 가득 담긴 얼굴로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자 가슴속에 가득 찬 두려움이 약간 가시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소리를 질러봐야 아무 소용이 없겠군.”

정신을 차린 비슬라바 국왕은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그대를 죽이러 온 것은 아니니.”

하지만 비슬라바 국왕으로선 그 말을 쉽게 믿을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다.

“몇 가지만 묻지. 왜 네 마탑주가 수도에 있었는지, 그리고 내가 죽었다고 알려진 후 전쟁은 어떻게 끝났는지.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군.”

비슬라바 국왕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휴우.”

비슬라바 국왕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손을 뻗어 술잔을 잡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이 떨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술잔에서 술이 탁자 위로 몇 차례 쏟아졌다. 하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단숨에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런 후에 비슬라바 국왕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 마탑주가 수도로 온 것은…….”

비슬라바 국왕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마현은 묵묵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렇게 된 것이다.”

제법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마친 비슬라바 국왕은 고개를 들었다.

“흠!”

마현은 양손으로 탑 모양을 만들며 엄지손가락 위에 턱을 괴고 있었다. 약간 시선이 아래로 향한 것으로 보아 깊은 생각에 잠긴 모양이었다.

비슬라바 국왕은 그런 마현의 모습에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트로켄 왕국을 집어삼키고 그 기세를 몰아 하르센 대륙을 호령할 대제국으로 국력을 키워 가자고, 그렇게 단꿈에 젖어 있었다.

측근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자신을 안심시켰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 꺼질지 모르는 나약한 촛불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비슬라바 국왕.”

마현은 턱을 괸 채 시선만 올려 비슬라바 국왕을 쳐다보았다.

“야망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지. 그 야망의 속성을 알기에 이 일은 이쯤에서 덮지.”

그 말에 비슬라바 국왕이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고 할 때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덮기에는 내가 손해가 너무 많아. 그렇지 않은가?”

칼자루는 마현이 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좋든 싫든 비슬라바 국왕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마현이 요구하는 것이 부디 테누타 왕국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이기를 비는 것밖에 없었다.

“단지 내가 당한 것을 돌려주고 싶을 뿐이다.”

“그, 그 말은?”

“네 마탑주를 모두 불러 모으려면 그대의 짐이 너무 무거워질 테니…….”

마현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섬뜩한 웃음을 대하자 비슬라바 국왕은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어야 했다.

“급한 용무를 핑계로 마탑주 한 명만 이곳으로 소환시켜. 그걸로 그대에게 받아내야 할 피의 빚을 지워주지.”

비슬라바 국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현의 심증을 간파한 까닭이었다.

네 마탑주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되갚아 줄 심사인 것이다.

“언제까지 부르면 되겠는가?”

“이삼 일 정도……. 자연스럽게 부르는 게 좋겠군.”

“그리하겠노라.”

그 대답을 끝으로 비슬라바 국왕은 짙은 패배감을 삼키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영토에 대한 야심 때문에 빚어진 테누타 왕국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몇 개의 촛불에 의해 간신히 어둠만 면한 어두컴컴한 밀실.

그 중앙에 마현이 서 있었다.

아래로 향한 마현의 시선 끝에는 하나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어둠의 신과 계약을 맺기 위한 역오망성 마법진. 그 역오망성 마법진을 내려다보는 마현의 눈동자는 그답지 않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신 카디악!’

눈앞에 그려진 역오망성 마법진이 현신시킬 어둠의 종신은 다름 아닌 사신 카디악이었다.

흔들리던 눈빛이 어느 순간 딱 멈추더니 마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피식.

그리고 흘러나온 한 조각의 웃음.

‘당신도 내가 마음에 안 들겠지만 이해하시오. 나는 당신의 힘이 필요하고, 당신은 내가 있어야 이 땅에 권능을 뿌릴 수 있으니…….’

마현은 더 이상 망설임 없이 역오망성 마법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테누타 왕국에서 워프게이트진 설치 및 정비 의뢰를 해왔다고?”

조화, 스플린 마탑주 벨로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능하면 서둘러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안 봤는데 비슬라바 국왕, 참으로 뻔뻔하군.”

벨로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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