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
21화
푸학―
곧 군신 아이벤의 강림을 불러내는 오망성 마법진에서 검은 빛이 솟구쳤고, 마현은 그 검은 빛에 휘감겼다.
검은 빛은 마현의 몸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검은 빛은 순수한 어둠의 기운이었다.
어둠의 기운은 마현의 마기와 섞여 하나가 되었다. 쇠약해졌던 마현의 마기는 어둠의 기운에 힘입어 더욱 짙어지고 충만해졌다.
그리고 급속도로 마기의 양은 증폭되었다.
서클 단전으로 응집된 더욱 강렬해진 마기는 노도처럼 기경팔맥으로 치달았다.
우우우웅―
그 여파로 마현의 몸에서 작은 울림이 일어났다.
후우우웅!
그 울림은 서서히 커져갔다.
노도처럼 기결팔맥을 내달린 마기는 단전을 휘감은 서클로 스며들었다.
네 마탑주의 공격으로 인해 뒤틀리고 금이 간 서클은 새롭게 재구성되었다.
그렇게 더욱 탄탄해진 7개의 서클.
그 위에 또 하나의 서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8번째 서클이었다.
마현의 눈이 번쩍 떠졌다.
쩡!
그와 동시에 마치 웅혼한 종소리 같은 맑은 소리가 마현의 몸에서 울려 퍼졌다.
그의 눈에서 엄청난 마기가 폭사되며 폭풍처럼 대기를 뒤흔들었다.
* * *
늦은 오후.
태양의 마탑 정문이 보이는 대로 한편에서 흑도가 벽에 기대고 팔짱을 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지만 그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조용히 눈을 감고 서 있었다. 가끔 눈을 뜨기는 했지만 아내 다시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그런 흑도가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다시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 가득 대로 위를 걷는 네 명의 마법사가 담겼다. 그들이 걸어오는 방향으로 보아 외부에서 볼일을 마치고 마탑으로 돌아가는 듯싶었다.
흑도는 눈동자를 살짝 아래로 내려 그들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가슴에는 붉은 수실로 태양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흑도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뜩였다.
흑도는 천천히 벽에서 몸을 뗐다.
파밧!
그리고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라진 흑도의 신형은 마탑으로 돌아가는 네 마법사 앞에 다시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흑도의 모습에 길을 걷던 네 마법사는 흠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누구…….”
앞서 걷던 수석마법사는 팔을 뻗어 휘하 마법사들을 뒤로 물리는 것과 동시에 경계 어린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스르릉.
하지만 그 마법사가 물음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흑도의 손에서 도가 뽑혀졌다.
“저, 적이…….”
섬뜩할 정도로 살기를 담은 흑도의 눈빛에 맨 앞에 서 있던 수석마법사가 재빨리 뒤로 물어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보다 흑도의 도가 더 빨랐다.
쐐애애액― 서걱!
흑도는 소리치려는 수석마법사의 목을 그대로 베어버린 것이다.
단칼에 절명한 수석마법사의 몸이 허물어지기도 전에 흑도는 이미 뒤로 물러나 있는 세 명의 마법사 틈에서 그들을 베어가고 있었다.
흑도의 도에는 한 치의 자비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푸학!
동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네 명의 태양의 마탑 소속 마법사들은 대로 위에 흥건하게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꺄아아악!”
그때 찢어질 듯한 여인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 명의 마법사 뒤에서 걷고 있던 여인이었다.
그 소리에 대로를 걷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흑도와 그 발아래 피를 뿌리며 죽은 네 명의 마법사에게 모아졌다.
“아아악!”
다른 비명도 이어서 터져 나왔다.
“살인이다! 살인이 일어났다!”
“태양의 마탑 마법사가 죽었다!”
이어 고함과 비명 등이 뒤섞이며 대로에는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흑도는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 * *
“스승님!”
태양의 마탑 대제자인 사크스가 이베른을 다급히 부르며 그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도 호들갑인 것이냐?”
가뜩이나 테누타 왕국의 일로 머리가 복잡한 이베른이기에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사크스에게 호통을 쳤다.
“댈라스 제후령으로 출장을 갔던 수석마법사와 그 휘하의 세 제자가 마탑 앞 대로에서 살인을 당했습니다.”
“뭐라? 살인?”
이베른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수석마법사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한 명의 수석마법사가 죽었다면 그 공백이 적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자리를 채울 다른 수석마법사는 얼마든지 있다. 그의 분노를 가져온 이유는 단 한 가지.
벌건 대낮에, 거기에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집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마탑 바로 앞 대로에서 수석마법사가 살해당했다는 것에 있었다.
“흉수의 정체는 알아냈느냐?”
이베른은 애써 노기를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일단 목격자를 중심으로 정보를 수집하고는 있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스승님. 그자가 마법사들을 살해하고 귀신처럼 사라져 버렸다고 하니 말입니다.”
사크스의 보고에 이베른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때였다.
“마탑주님, 부마탑주 마이런입니다.”
장년의 마법사가 이베른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수석마법사와 그 휘하 세 제자가 암살당한 때와 비슷한 시각에 샤메일, 듀란, 스플린 마탑에서도 몇몇 제자들이 대로나 식당가에서 암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뭣이라?”
이베른은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샤크스 역시 적잖게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샤메일, 듀란, 스플린 마탑이라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마탑주님.”
부마탑주 마이런의 대답에 이베른의 눈덩이에 경련이 일어났다.
바다, 샤메일 마탑. 대지, 듀락 마탑. 그리고 조화, 스플린 마탑에 동시에 일어난 마법사 암살.
‘우연인가?’
그 자문에 이베른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결코 우연일 리가 없다.
한날한시에 네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이 암살을 당했다.
‘카칸의 망령이 이토록 질긴 것인가?’
이베른은 앉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탁자 위에 올려 놓은 손을 말아 쥐었다.
“마이런 부마탑주.”
“예, 마탑주님.”
“지금 세 마탑주에게 기별을 넣게. 회동을 가지자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탑의 모든 제자들에게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외출을 삼가라고 명을 내리고.”
“그리하겠습니다.”
이베른은 고개를 돌려 대제자 사크스를 쳐다보았다.
“하명하십시오, 스승님.”
“이 사건을 네게 일임하겠다. 세 마탑과 연계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라. 감히 마탑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 그 간악한 흉수를 반드시 찾아 내거라.”
“예.”
“흉수를 조사할 때 케이슨 용병기사단과 십좌왕 쪽도 은밀히 염탐해 보거라.”
“케이슨 용병기사단과 십좌왕 말씀이십니까?”
사크스의 미간에 빗금이 그어졌다.
안 그래도 그들이 반마탑을 천명한 터라 적잖게 분노를 느꼈던 참이다.
그들이 관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는지 사크스는 차가운 눈빛을 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곧 둘이 나가고 이베른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책상 위에 움켜쥐고 있던 주먹은 풀리지 않았다.
‘네놈의 망령마저 모조리 말살시켜 버리겠다!’
이베른의 뺨이 바르르 떨렸다.
* * *
커다란 원탁에 케이슨 용병기사단원들과 흑풍대가 모두 모여 있었다.
“현 상황으로 흑탑은 힘듭니다. 하여 우선은 흑검탑을 세우는 걸로 결정하겠습니다.”
케이슨이었다.
그의 말에 이견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모두 수긍하는 뜻을 내비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지휘체계입니다.”
사실 마현의 복수에 의견일치를 보았고, 그가 원했던 흑탑을 세우기로 마음을 모았다.
그러려면 지휘체계를 가진 조직도가 필요했다.
지금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해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가장 먼저 대두가 된 일은 누가 수장 자리에 앉느냐다.
거기에 가장 적합한 이는 의지를 이어받은 밀러였다.
하지만 밀러는 후에 흑마탑을 이끌어야 하기에 자동적으로 수장 자리에서 배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대상은 케이슨과 왕귀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 한 사람이 밑으로 들어가기에는 둘 다 껄끄러운 사이였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침묵이 길어졌다.
“차라리 지금처럼 가는 건 어떤가?”
밀러였다.
오랜 침묵 끝에 흘러나온 말이기에 모두의 이목이 밀러에게로 집중되었다.
“지금처럼이라고 하심은?”
“쌍두마차. 이원체계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 물론 흑검탑이 방대해지면 다시 체계를 잡아야 하겠지만 말일세. 일단 우리의 목표가 주군의 복수이니 당분간 이원체계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네.”
“흠…….”
케이슨은 팔짱을 끼며 고심에 찬 침음성을 삼켰다. 그 역시 그것이 현재로선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왕귀진을 쳐다보았다.
“나쁘지 않은 듯하오.”
왕귀진의 말에 케이슨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진 님.”
늑대왕 용병대 부대장인 아그논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왕귀진의 귀에다 몇 마디 속삭였다.
왕귀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럼 속하는 이만…….”
보고를 마친 아그논은 군례를 취한 후 회의실을 다시 빠져나갔다.
“무슨 일이오?”
“흑사신 어른들이 행동에 나선 모양이오.”
“……?”
“오늘 오후 네 마탑 소속 마법사 몇이 대로나 식당가에서 죽었다는 전갈이오.”
왕귀진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하나같이 굳어졌다.
흑사신이 폐관수련을 마치고 빌더 시로 왔다는 것을 어제 알랜을 통해 들었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움직임이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마탑을 상대로 그렇게 내놓고 무모한 일을…….”
아이작이 낯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케이슨 용병기사단원들은 그 말에 동의를 하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고 있었다.
흑사신의 진면목을 모르는 그들이었기에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다.
“아이작 경.”
“말씀하시지요.”
“그대 눈에 흑사신 어른들이 가벼워 보일지 몰라도 그들은 한 세상을 풍미했던 대종사들이었소.”
“……?”
“그런 분들이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폐관수련을 하고 다시 세상에 나왔다는 거요.”
“……?”
아이작은 물론 다른 이들도 좀처럼 왕귀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모르긴 몰라도 아이작 경, 그대와 같은 검사가 백 명이 덤벼도 흑사신 한 분도 이기지 못할 거라는 뜻이오.”
그 말에 아이작의 눈매가 굳어졌다.
제이든은 입을 쩍 벌렸다.
“우리 흑풍대 전원이 덤벼도 그분들 중 어느 한 분도 이기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오.”
“그, 그걸 지금 나 보고 믿으라는 소리입니까?”
“조만간 우리 앞에 나타나실 거요. 정 궁금하면 그때 한 번 알아보시오.”
왕귀진은 입술 끝을 살짝 말아 올렸다.
그 의미심장한 미소에 아이작의 눈매는 더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