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
17화
“……이베른!”
마현은 고개를 번쩍 들어 이베른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어렵게 살았으면 그냥 조용히 살지 그랬느냐?”
이베른의 목소리는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를 대하듯 한없이 자애롭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는 웃고 있었다. 명백한 비웃음을 한껏 담은 채.
“후욱, 후욱!”
마현은 숨이 막혀왔지만 간신히 크게 호흡하며 몸을 꼿꼿이 세웠다.
이베른은 눈을 돌려 마현 주위로 흩뿌려진 검붉은 자국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입언저리를 비틀었다.
“다크나이트였나?”
좀 더 자세히 살피면 그것이 핏자국이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만 이베른은 자신이 펼친 마법진 때문에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다. 사람이 한순간에 땅속으로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저 다크나이트가 어둠으로 강제 귀환 당했거나 빛의 힘으로 인해 소멸되었을 거라 짐작한 것이다.
마현이 갇힌 마법진의 세 방향에서 셰이머스, 카밀로, 그리고 벨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깜빡 속았었어. 그나저나 해우하자마자 다시 헤어지게 되었으니 꽤나 섭섭하군, 그래.”
카밀로였다.
“뭔 말이 그리 많은가? 어서 처리하세.”
벨로가 마현을 노려보며 노골적으로 이마를 찌푸렸다.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에도 마현은 마탑주들을 향해 차가운 눈빛을 날렸다.
완벽하게 당했다.
애초에 이베른과 다른 마탑주들이 술수를 부릴 거라는 걸 고려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과거에도 이렇게 당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크크크크크!”
마현의 어깨가 들썩이며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조가 짙게 배인 웃음이었다.
‘다시 이렇게 죽는 것인가?’
마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주, 주군!』
그때였다.
마현의 귓가로 왕귀진의 전음이 들려왔다.
다행히 큰 피해 없이 귀식대법을 펼쳐 몸을 숨긴 모양이었다.
“크하하하하하하!”
마현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더니 이내 광소가 터져 나왔다.
마현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미안하오, 설린. 죄송합니다, 스승님.’
슬픔의 담긴 눈동자가 다시 차가워졌다.
마현은 냉랭한 시선으로 이베른을 쳐다보았다.
그 한없이 시린 눈빛에 이베른은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귀진, 철용……. 다행히 너희들과의 약속은 지키는구나.”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주, 주군!』
다른 이들은 못 들어도 흑풍대는 마현의 목소리를 들었다.
“중원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스승님과 설린을 부탁하마.”
『……!』
마현은 이베른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내가 오늘 여기서 죽는다 해도…… 네놈들 역시 반드시 죽을 것이다!”
마현의 살심은 여지없이 이베른과 세 마탑주의 심장에 틀어박혔다.
“천만에! 네놈만 다시 죽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가공할만한 마나가 네 명의 마탑주의 몸에서 폭사되었다.
“태양이 이 땅 위에 현신하나 그건 곧 재앙이 되리라, 썬 디센트(Sun descent)!”
“바다의 재앙이 땅 위에 몰아치니, 스톰 웨이브즈(Storm waves)!”
“땅이 분노하니 지상의 모든 것을 지워 버리노라, 어쓰케이크(Earthquake)!”
“조화는 빛으로 시작하니 성스런 빛이 어둠을 몰살시키리라, 샤이닝 라이트(Shining light)!”
그 마나는 제각각 그들을 상징하는 불, 물, 땅, 그리고 순수한 빛으로 바뀌어 마현이 서 있던 곳으로 떨어졌다.
콰과과과과광!
마현이 서 있던 장소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마현이 죽음의 고통을 느낄 때였다.
―너의 근원이 나임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나를 찾지 않은 것이냐?
폭발에 휘말려 나락으로 떨어지던 마현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이벤!’
* * *
쏴아아아아!
어두운 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는 완전히 폐허로 변한 테누타 왕국의 외성 위를 마구 때렸다.
폭우를 쏟아내는 먹구름에 가려 하늘에선 달빛 한 줄기조차 비추지 않았다.
푹!
칠흑 같은 어둠 속, 외성 폐허 더미에서 손 하나가 땅거죽을 뚫고 삐죽 올라왔다.
후드득, 후드득!
땅속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이의 몸 위로 세찬 빗줄기가 쏟아졌다.
푹 푹 푹!
이어 그의 곁으로 다른 그림자들이 땅거죽을 뚫고 올라왔다.
“주, 주군!”
애써 오열을 참느라 몸을 부들부들 떠는 이는 바로 검세옥이었다. 그리고 그 곁으로 모인 이들은 다름 아닌 흑풍대였다.
애초 이베른이 만든 마법진에서는 큰 타격을 받지 않았지만 마현을 죽이기 위해 펼쳐진 카밀로의 대지 마법으로 인해 흑풍대는 혼절할 정도로 크게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당장이라도 땅속에서 뛰쳐나와 네 명의 마탑주를 비롯해 테누타 왕궁의 모든 이들을 죽이고 싶었지만, 그때 흑풍대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마현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최상의 몸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하루를 더 참으며 몸을 추스른 후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정신 차려라, 세옥!”
철용이 나직하게 검세옥을 꾸짖었다.
하지만 그런 철용의 눈에도 핏발이 붉게 채워져 있었다.
“모두 잘 들어라.”
왕귀진이 한 걸음 내딛으며 흑풍대원의 얼굴을 한 명씩 똑바로 쳐다보았다.
“우리는 주군의 뜻을 이어받는다. 주군이 하고자 했던 일을 마무리 짓는다, 그리고 네 명의 마탑주를 반드시 죽인다!”
왕귀진의 말에 비통함에 젖은 흑풍대원들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빛에 독기를 품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월코트 자작과 기사들의 신변부터 확보하는 것이다.”
왕귀진의 명에 흑풍대는 소리 죽여 복명했다.
* * *
쏴아아아―
겨우 어른 주먹만 한 환풍구를 통해 거센 폭우 소리가 스며들었다.
반지하 감옥 안, 환풍구를 통해 튄 물방울이 월코트 자작의 얼굴을 때렸다.
‘비가 오는가?’
밖이 거의 보이지 않는 환풍구를 향해 고개를 드는 월코트 자작의 얼굴은 피폐해져 있었다.
철컹 철컹.
월코트 자작은 비를 보고 싶은 마음에 환풍구 쪽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그의 몸을 꽁꽁 결박하고 있는 쇠사슬로 인해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설마 마탑주들이…….’
월코트 자작은 메말라 갈라진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일까, 월코트 자작의 입술은 너무나도 쉽게 찢어지며 턱 아래로 붉은 피가 번졌다.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핏물처럼 그의 눈동자에도 핏발이 섰다.
마탑주는, 그리고 마탑은 한 왕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각 왕국들은 마탑 건립을 앞에 두고 하나의 협정서를 체결했다.
내용은 간단하다.
전장의 참여는 자유다.
하지만 전장의 참여 여부는 무조건 개전 전에 전 왕국에 공표해야 한다는 것.
월코트 자작은 자신을 보며 비릿하게 웃던 네 마탑주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렇게 죽는 것인가?’
월코트 자작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감돌았다.
원래 전쟁에서 포로가 된 귀족들은 암묵적으로 작위에 걸맞은 예우와 함께 목숨을 보장받는다. 하지만 월코트 자작은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마탑주들.
‘그래도 즐거운 꿈을 꾸었군.’
월코트 자작은 힘없이 아래로 꺾이려는 목에 힘을 줘 환풍구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나마 폭우 소리가 고문으로 지친 심신을 달래주었기 때문이다.
‘고맙소, 카칸 경.’
월코트 자작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식사 같지도 않은 식사 배급 시간에 월코트 자작은 병사들끼리 떠들어대는 잡담을 들었다. 그건 바로 자신을 비롯해 수하들의 처형에 관한 것이었다.
그 시각이 바로 오늘 새벽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존재는 조용히 지워질 것이다. 적어도 테누타 왕국 안에서는 카칸이라는 이름과 함께 영원이 지워질 터였다.
철컹, 끼이익!
그때 입구 쪽에서 육중한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충!”
그리고 우렁찬 경례 소리가 들려왔다.
연이어 들려오는 소리에 월코트 자작의 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생각보다 빠르군.’
병사들의 얘기로는 처형은 새벽이라고 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차피 상관없었다.
새벽인들 한밤중인들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래봤자 몇 시간 먼저 가는 것뿐이다.
“트로켄 왕국의 영광을…….”
월코트 자작은 조용히 자신의 마지막 생을 그렇게 마감하려 했다.
쿵!
그때 마치 고목 하나가 쓰러지는 듯한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감고 있던 월코트 자작의 눈두덩이 파르르 떨렸다.
쿵!
이어 다시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월코트 자작의 턱이 가늘게 떨렸다.
아마도 벌써 처형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그것은 자신을 따라나선 충실한 수하들이 쓰러지는 소리이리라.
자신의 목숨은 상관없으나 그들이 죽어가며 내는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쓰려왔다.
끼이익!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철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죽기 전에 자신을 죽이러 온 자의 얼굴을 노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월코트 자작은 조용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진흙이 잔뜩 묻은 신발이었다.
뚝뚝뚝.
그 신발 주위로 빗물로 짐작되는 물방울이 연신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발 옆으로 삐죽 내려와 있는 검신에서 핏방울이 점을 만들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수하들의 핏물일 것이다.
하지만 이상했다.
아무리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라지만 분명 자신을 죽이러 온 자는 귀족일 텐데, 그런 자가 비를 흠뻑 맞으며 여기까지 걸어왔단 말인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렇게나 서둘러 자신의 목을 베려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
월코트 자작은 고개를 서서히 들어 그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 월코트 자작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의 눈동자는 물결치듯 파르르 요동쳤다.
“주군의 약속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
그는 바로 흑풍대주 왕귀진이었다.
“그, 그대는?”
너무 놀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쐐애액― 서걱!
왕귀진의 롱소드가 어두운 반월의 궤적을 그렸다. 그리고 그 궤적은 월코트 자작을 포박하고 있는 굵은 쇠사슬을 모두 끊어버렸다.
철커덩, 텅텅텅!
쇠약해진 월코트 자작의 몸은 그동안 쇠사슬에 의지하고 있었던지 무릎이 꺾이며 휘청거렸다. 월코트 자작은 재빨리 습기로 축축한 벽에 손을 짚어 볼썽사납게 바닥에 넘어지는 것을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