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316화 (316/351)

# 316

15화

“월코트 자작.”

마차 앞에 내려선 마현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그를 불렀다.

월코트 자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마차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콰직!

마현은 다가오는 그를 본 후 마차의 문을 강제로 뜯었다.

“네, 네놈들은 누구냐?”

비대한 몸집의 한 중년 남성이 겁에 질린 얼굴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모습은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켄타키 후작인가?”

“마, 맞아요. 그가 켄타키 후작이에요.”

대답은 중년 남성이 아닌 그의 맞은편에서 앉아 있는 젊은 여인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겁에 질려 바르르 떨고 있었다.

“이, 이년이 지금……. 컥!”

마현은 실소를 머금으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막 여인을 향해 윽박지르려는 켄타키 후작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마차 밖으로 끌어냈다.

“얌전히 있으면 목숨은 살려주지.”

높낮이가 없는 마현의 차가운 어조에 여인은 열심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네, 네놈들은 누구냐?”

바닥에 무릎이 꿇리고도 켄타키 후작은 나름 위엄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오랜만이오, 켄타키 후작.”

월코트 자작이 다가왔다.

“그, 그대는?”

월코트 자작과 안면이 있었던지 켄타키 후작은 그를 보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떻게 그대가 여, 여기에…….”

“확실히 켄타키 후작이 맞군.”

마현은 들고 있던 롱소드를 들어 그의 목을 향해 가차없이 내리그었다.

* * *

“흠…….”

전장을 내려다보는 페로스 공작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개전 이후 첫 승리가 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로스 공작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유는 단 하나.

카칸과 십좌왕, 즉 흑풍대가 전쟁이 시작된 지 반나절이 지났지만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란 말이냐.’

페로스 공작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통신을 담당하고 있는 마법사가 다가와 페로스 공작 곁을 지키고 서 있는 부관에서 무어라 속삭였다. 부관은 마법사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페로스 공작에게 몸을 돌렸다.

“총사령관 각하.”

“무슨 일이냐?”

“켄타키 성에서 특급 통신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켄타키 성에서?”

페로스 공작은 고개를 잠시 갸웃거렸다.

어제 저녁 켄타키 후작과 전쟁에 필요한 물자 수송에 관한 얘기를 상세히 나눴고, 다른 자잘한 일들까지 모두 합의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 그러니 지금처럼 특급 통신을 요청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특급 통신을 요청해온 이상 무시할 수는 없었다.

페로스 공작은 카칸이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출전하지 않고 지휘소를 지키고 있는 총기사단장인 알베르 후작에게 전장의 지휘를 잠시 맡긴 뒤 마법통신 군막으로 향했다.

페로스 공작이 들어가자 마법통신구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마법사가 허리를 숙인 채 뒤로 물러났다.

“그럼 연결하겠습니다.”

페로스 공작이 마법통신구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 마법사가 통신을 연결하고는 조용히 군막을 빠져나갔다.

“무슨 일인가, 켄타키 후작?”

페로스 공작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마법통신구 속에 비친 켄타키 후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

“켄타키 후작?”

페로스 공작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페로스 공작의 눈은 부릅떠졌다.

왜냐하면 켄타키 후작의 머리가 위로 올라가며 절단된 목 아래로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장면이 마법통신구 속에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오, 페로스 공작.”

그리고는 낯선 이가 마법통신구에 얼굴을 내밀었다.

“네놈은 누구냐?”

페로스 공작은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본인은 트로켄 왕국의 월코트 자작이라고 하오.”

“……!”

페로스 공작은 그의 소개에 순간 숨이 막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이미 예상이라도 했는지 월코트 자작은 페로스 공작이 그러거나 말거나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현재 켄타키 성은 트로켄 왕국군의 손에 함락되었소.”

그 순간 페로스 공작은 쇠뭉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동시에 뇌리를 스치며 그를 내내 불안하게 했던 게 무엇인지가 떠올랐다.

그것은 오늘 하루 종일 따라다니던 찜찜함이 이유이기도 했다.

바로 오늘 전장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카칸과 십좌왕.

당했다.

그것도 제대로 당한 것이다.

“그럼 이만 통신을 끊겠소.”

그 말을 끝으로 월코트 자작은 일방적으로 마법통신을 끊어버렸다.

“……지금 당장 전장에서 군대를…… 철군시키라.”

페로스 공작은 뺨을 부르르 떨며 명을 내렸다.

* * *

“테누타 왕국 측이 철군합니다, 공작 각하.”

버드런트 공작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 검지로 목 부근 옷깃을 당겨 느슨하게 만들었다.

“휴우.”

그리고는 나직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공했구나. 성공했어.”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버드런트 공작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지휘관들을 소집하라.”

버드런트 공작은 그 어느 때보다 결연한 눈빛으로 명을 내렸다.

* * *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페로스 공작은 고개를 돌려 군수물자를 담당하고 있는 지휘관에게 물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열흘, 최대한 자원을 아낀다고 해도 보름 이상은 어렵습니다, 총사령관 각하.”

그나마 걱정했던 것보다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족한 군수물자의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당장 켄타키 성으로 지원 병력을 보내야 합니다, 각하.”

다른 지휘관이 흥분을 다스리지 못한 채 거칠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알베르 후작?”

페로스 공작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알베르 후작을 쳐다보았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켄타키 성으로 병력을 돌렸을 경우 하멘 평원을 잃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켄타키 성을 적국의 손에 계속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아군의 보급이 차단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 큰 것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알베르 후작은 비교적 차분한 목소리로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알베르 후작, 그대가 지원 병력을 꾸며보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알베르 후작의 대답을 들으며 페로스 공작은 고개를 돌려 이베른을 비롯해 마탑주들을 편치 않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마탑주들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곳에서 카칸을 기다리겠느냐, 아니면 켄타키 성으로 함께 가겠냐는 물음이었다.

이베른은 그 질문에 다른 마탑주들과 눈빛으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우리도 가겠소. 그 편이 조용히 일 처리하기에 더 좋을 것 같소. 그리고…….”

이베른은 눈매를 가늘게 만들며 말끝을 살짝 흐렸다.

“후에 본국 차원에서 적절한 보상을 하겠습니다.”

페로스 공작은 이베른의 속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대답이 흡족했던지 이베른 역시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그때였다.

며칠 전 전장으로 파견 나온 왕실수석마법사 엘프레터가 사색이 된 얼굴을 하고 군막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부관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뭐, 뭐라고요?”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도 잊은 듯 부관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당연히 모든 이목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게 저, 정말입니까?”

부관은 지휘관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엘프레터를 쳐다보며 재차 물었다.

“그, 그렇네.”

엘프레터의 대답을 들은 부관의 낯빛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페로스 공작이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그게…….”

엘프레터의 말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부관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포, 포보토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부관의 보고를 듣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킨 페로스 공작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어, 어떻게?”

어제 켄타키 성이 함락되었다.

그런데 켄타키 성에서 자그마치 100킬로미터나 떨어진 포보토 성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부관의 보고가 잘못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페로스 공작은 그 보고를 믿고 싶지 않았기에 그렇게 부정하려 한 것이다.

“확실히 카칸다운 전략이군.”

이베른은 미간의 골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함께한 이들이 모두 그 목소리를 들었다. 워낙 주위가 조용했기 때문이다.

“카칸, 그자라면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오.”

이베른은 하멘 평원과 켄타키 성이 함께 그려진 지도 위로 시선을 돌렸다.

“예상 인원은 카칸을 비롯해 20여 명 안팎. 무리한다면 하루에 두 번, 워프 네비게이션 마법을 펼친다면 100킬로미터쯤은 이동할 수 있소. 완전히…… 허를 찔렀군.”

이베른은 눈매를 가늘게 만들며 마지막 말을 살짝 흐렸다.

“단순한 의견일지는 모르나…….”

좌중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베른이 한참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도 카칸이 노리는 것은……, 테누타 왕국의 수도일 것이오. 그러니까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테누타 왕국의 왕실, 그리고 비슬라바 국왕이 아닐까 싶소이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페로스 공작의 눈이 화등잔처럼 크게 떠졌다.

지휘관들과 마탑주들이 모여 있는 탁자 위로 무거운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그, 그게 가능한 일이오이까?”

페로스 공작은 너무 놀라 말을 더듬었다.

“무리수라고 한다면 무리수일 수도 있겠지만 만일 하고자 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오.”

이베른의 눈빛은 서서히 차갑게 변해갔다.

“굳이 그런 무리수를…….”

“카칸이니까.”

이베른의 몸에서 짙은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성공한다면 그자는 비슬라바 국왕의 목숨을 담보로 전쟁에서 유리하게 협상을 하겠지. 그리고 우리의 목에 칼을 겨눌 것이요.”

이베른은 마현을 키웠다. 누구보다 마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현의 심증을 간파한 것이었다.

자신의 목에 내밀어질 차가운 칼날을 떠올리자 이베른의 가슴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살심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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