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4
13화
“수고하셨소, 카칸 경. 케이슨 경.”
“수고하셨습니다.”
버드런트 공작의 차하를 시작으로 지휘관들이 차례로 군례를 취했다. 마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고는 버드런트 공작의 맞은편 자리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고, 케이슨은 깊게 고개를 숙인 후 마현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 모습에 익숙한지, 아니면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것인지 버드런트 공작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마현이 자리에 앉고 나서야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하멘 평원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총 길이 30킬로미터가 조금 넘소.”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마현이었다.
모두 마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일주일이오. 귀국의 무한한 영광과 함께 승리를 바란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일주일 동안 하멘 평원 안에서 버티시오.”
마현과 흑풍대가 빠져나간 내일부터는 전장의 흐름이 바뀌게 될 것이다.
그걸 알기에 마현도 무리를 해서 전선을 이곳까지 밀어붙인 것이었다.
드르륵.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마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는 귀관들의 몫이오.”
마현의 말에 버드런트 공작과 지휘관들은 굳은 의지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현이 중앙지휘실을 나가고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케이슨이 대신 앉았다. 이제부터 마현의 공백을 케이슨이 메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 시각.
테누타 왕국 측 모든 지휘관들과 어제 새로이 투입된 왕실 소속 마법병단을 이끄는 왕실수석마법사 엘프레터는 중앙지휘실이 아닌 왕국 전용 임시 워프게이트진 주위에 모여 있었다.
“아직입니까?”
페로스 공작의 부관이 엘프레터에게 약간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는……. 왔네!”
대답하던 엘프레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급히 워프게이트진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마나에 민감한 엘프레터는 워프게이트진에서 서서히 응집되는 마나를 느낀 것이다.
이윽고 워프게이트진에서 미약한 울림이 만들어졌고, 희미한 빛무리가 번쩍 터졌다.
빛무리가 사라지고 워프게이트진 중앙에는 네 명의 백마법사, 마탑주들이 서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외다.”
이베른이 워프게이트진에서 내려오며 페로스 공작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니오.”
페로스 공작은 긴장한 얼굴로 이베른 앞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굳게 잡았다.
“자자, 이럴 것이 아니라 중앙지휘실로 가시지요.”
악수가 끝난 후 페로스 공작은 살짝 비켜서며 상당히 크게 만들어진 군막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렇게 그들은 중앙지휘실 군막 안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어차피 서로의 목적이 확실하고, 어느 정도 상대방에 대해 알고 있는 상황인지라 형식적인 소개는 생략하고 곧바로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그 회의는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됐다.
* * *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저벅 저벅 저벅.
이슬로 인해 질퍽해진 발자국 소리가 새벽의 고요를 깨웠다. 그 발소리의 주인공은 월코트 자작을 비롯해 트로켄 왕국에서 엄선된 열 명의 기사들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소.”
월코트 자작의 말에 마현이 고개를 돌려 뒤에 시립한 왕귀진을 쳐다보았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주군.”
“좋아.”
약간의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할 때였다.
푸히이잉!
풍이 옅은 울음을 터트리며 달려왔다.
“녀석!”
마현은 풍이의 머리와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조금만 떨어져 있자구나.”
풍은 그 말뜻을 알아듣는지 머리를 내밀어 마현의 가슴을 마구 비벼댔다.
“케이슨, 잘 부탁합니다.”
마현은 풍이를 따라 나온 케이슨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사석인지라 마현은 케이슨을 전처럼 대했다.
“잘 돌봐주겠네.”
“이봐, 주군.”
제이든이었다.
“몸조심해.”
그 말에 마현은 피식 웃음을 보인 후 고개를 돌려 흑풍대와 월코트의 기사단을 쳐다보았다. 왕귀진과 월코트 자작은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로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마현의 짧은 명에 흑풍대와 월코트 기사단은 그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모였다. 그리고 빛과 함께 그들의 모습은 자취를 감췄다.
‘응?’
고급 침상에서 자고 있던 이베른은 급히 눈을 떴다.
잠결이라 정확하지 않지만 트로켄 왕국 진영에서 상당한 마나의 유동을 느낀 것 같았다.
짹짹짹.
귀를 기울여 보니 전장과 어울리지 않은 새소리도 들렸다.
‘벌써 아침인가?’
군막 입구에 가려진 두꺼운 천 사이로 여명이 살짝 보였다. 이베른은 자리에서 일어나 군막 밖으로 나갔다. 인기척을 느끼고 군막 위 지붕에 앉아 있던 새 몇 마리가 푸드득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침 특유의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와락 달려들었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이베른은 고개를 돌려 트로켄 왕국 측 진영을 쳐다보며 기감을 열었다. 특별히 걸리는 느낌은 없었다.
‘워프게이트진인가?’
전장에서 워프게이트진의 운용은 흔한 일이었다.
병력의 빠른 투입이라든지 긴급한 물자의 지원 등에 종종 쓰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예민해진 모양이군.’
이베른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웃음은 곧 지워졌다.
이베른은 싸늘한 눈으로 트로켄 왕국 진영을 노려보았다.
* * *
푸핫!
하멘 평원을 넘어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선 숲에서 빛과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마현과 흑풍대, 그리고 월코트 기사단이었다.
“허어. 이거 정말 놀랍군.”
월코트 자작은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성을 보자 그만 감탄사를 터트렸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한 모든 기사들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 뿐이지 다들 놀란 표정들이었다.
그들은 긴장된 눈으로 전면을 주시했다. 숲 위로 우뚝 솟은 거대한 성이 어디던가.
켄타키 성.
요새라고 불려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만큼 견고한 성으로, 테누타 왕국 서남쪽의 주요 거점지였다. 수도로 진격하기 위해서 반드시 무너트려야 할 성인 것이다.
마현의 능력이라면 굳이 이 성을 거치지 않고서도 충분히 테누타 왕국의 수도로 입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현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멘 평원 전선에서 테누타 왕국 수도에 이르기까지, 최단 거리에 위치한 켄타키 성을 비롯해 주요 거점인 5개의 성을 하루에 하나씩 무너트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계획을 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대외적으로 트로켄 왕국의 진격을 알려 확실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중 켄타키 성을 첫 번째 목표로 삼은 이유가 있었다. 이 성에서 하멘 평원 전선까지의 거리는 대략 50킬로미터이다. 이곳은 서남쪽 주요 거점인 동시에 하멘 평원 전선으로 나가 있는 테누타 왕국의 후방 지원을 담당하고 있다.
그렇기에 만일 켄타키 성이 무너진다면 트로켄 왕국 측에서 좀 더 쉽게 전쟁을 풀어갈 수 있게 된다. 적군은 후방이 불안해서 제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테니까.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정오였다.
다수의 인원을 데리고 두 번 연거푸 워프네비게이션 마법을 펼친 터라 마현은 상당히 지쳐 있었다.
“여기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한다. 켄타키 성의 진격은 오후 3시다. 각자 알아서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하도록.”
마현은 흑풍대, 월코트 기사단을 가리지 않고 명을 내렸다.
그 명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육포 등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마현은 커다란 나무 둥치 아래 자리를 잡은 후 가부좌를 틀었다. 마나가 고갈되어 텅 빈 서클 단전에 다시 마나를 충만하게 채워야 했다.
그러자 흑풍대가 원을 그리며 마현의 주위를 에워쌌다. 호법을 서주기 위함이었다.
“후우.”
가느다란 숨을 천천히 내쉬며 마현이 눈을 떴다.
운기조식을 마친 터라 조금 전까지 약간 창백하던 마현의 낯빛에는 홍조가 감돌고 있었다.
“시간은?”
대략적인 시간을 유추할 수 있었지만 정확한 시간을 알기 위해 물은 것이다.
“2시가 막 지났습니다.”
“2시라…….”
예상보다 시간이 일렀다.
마현은 켄타키 성을 바라보다 제각기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월코트 기사단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과 마주친 월코트 자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현 곁으로 다가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이른데 괜찮겠소?”
마현의 물음에 월코트 자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오기까지 힘든 일은 없었다.
말 그대로 눈을 두 번 감았다가 뜨니 바로 켄터키 성 근처였던 것이다. 그리고 간단하지만 끼니도 때웠고, 넘치도록 휴식도 취했다. 피곤할 리 없었다.
“저희들도 문제없습니다.”
왕귀진이었다.
“좋아. 계획했던 것보다 시간이 이르지만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마현은 하멘 평원에서 지금쯤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고 있을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떠올렸다.
“모두 준비하라.”
월코트 자작은 상기된 얼굴로 짧게 명을 내렸다. 그러자 기사들답게 일사분란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모여들었다.
“어떤 방법으로 기습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월코트 자작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에 오면서 어떤 방법으로 테누타 왕국 수도까지 진격할 것인지 대략적인 것만 들었지 상세한 것은 듣지 못했다. 그로서는 그것이 가장 궁금했던 것이다.
“특별한 작전은 없다.”
“……?”
“힘으로 부수고 나간다.”
“……!”
더더욱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월코트 자작의 눈은 더 커지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 월코트 기사단이 염려해야 할 것은 스스로의 목숨이다. 나머지는 나와 흑풍대가 알아서 한다.”
“하, 하지만…….”
마현은 월코트 자작의 말을 더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가자!”
그리고는 발을 내딛었다.
그 뒤로 흑풍대가 걸음을 맞췄다.
완전히 들러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될 거라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현과 흑풍대의 힘을 알기에 더 이상 의견을 피력하지도 못하고 묵묵히 그들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말에 조금은 불만스러웠지만, 지금으로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불만도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도, 그리고 그의 기사단도 알지 못했다.
저벅 저벅 저벅.
마현과 흑풍대, 그리고 월코트 기사단은 성으로 향하는 관도를 따라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분명 기습한다고 했다.
그런데 해가 쨍쨍 떠 있는 훤한 대낮에, 모습을 감추기는커녕 켄타키 성루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관도를 따라 이처럼 여유를 부리고 걷고 있으니 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들이 다가가자 성곽 위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로 짐작되는 그림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어렴풋 보였다.
‘이것 참.’
월코트 자작이 입맛을 쓰게 다시며 주위를 살폈다.
자신이 꾸린 기사단원들의 표정은 그저 멍했다. 반면 성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흑풍대의 표정은 서서히 냉혹하게 굳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