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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무림에 가다-313화 (313/351)

# 313

12화

“이건 또 다른 치욕이고 고통이다. 기억하고 또 기억해라. 머리가 나빠 기억할 수 없다면 뼈에라도 새겨라. 그래야만이 우리의 조국이 산다.”

툭!

버드런트 공작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 * *

붉은 석양으로 인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평원에 봉긋 솟아난 두 개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그 무덤 위에는 피에 절은 롱소드 한 자루와 할버드가 마치 비석처럼 하나씩 꽂혀 있었다.

바로 안드리치와 히메네스의 무덤이었다.

그 두 무덤 앞에는 마현과 흑풍대, 그리고 케이슨 용병기사단이 서 있었다.

“잘 가시오.”

케이슨이 고급 위스키인 시랠의 뚜껑을 따 그들의 무덤 위에 콸콸 쏟아 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슬픔은 없었다. 적으로 만났지만 짧은 시간 동안 동료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처럼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 * *

자박 자박 자박.

어둠이 짙게 깔린 밤거리.

이베른은 깊은 상념에 빠진 채 조화, 스플린 마탑에서 회동을 가진 후 태양, 스피네타 마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마차를 타고 돌아갔겠지만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고 생각을 정리할 겸 걷고 있는 것이다.

‘이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해.’

이베른은 조화, 스플린 마탑에서 테누타 왕국의 페로스 공작과 통신 마법으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그렇기에 이베른은 그 자리에서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협상하기 위함이었다.

카칸이 있는 곳은 전장이다.

반드시 기회는 있다.

문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카칸을 칠 것인가이다.

그때였다.

문득 섬뜩한 기운이 이베른의 머리를 노리고 무섭게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의 공기였다.

이베른은 본능적으로 마나를 끌어올려 실드를 쳤다.

카강!

아니나 다를까, 얇은 막 위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실드의 표면을 긁은 것이다. 보지 않아도 무언지 알 수 있었다.

암살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단검이었다.

‘어쌔신?’

이베른은 실드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마나를 눈으로 돌려 투시 마법을 펼쳤다. 그리고 재빠르게 사방을 훑었다. 그런 이베른의 눈이 어느 한 지점에 멈추더니 반짝 빛을 냈다.

어두운 그림자 속에 한 인영이 몸과 기운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감히!’

이베른의 눈에서 분노가 일었다.

희미한 붉은빛을 그 자리에 남기며 이베른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어쌔신 바로 앞이었다.

“홀드!”

붉은 마나가 어쌔신의 몸을 뒤덮은 뒤 스며들었다.

이베른이 갑자기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키던 어쌔신이 석상처럼 굳었다.

이베른은 손을 내밀어 어쌔신의 목줄기를 움켜잡았다.

“감히! 이 몸을 노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안에는 찐득한 살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때 어쌔신의 눈동자가 회색빛으로 변했다.

“그분이 전하시기를…….”

쇠를 긁어대는 듯한 쉰 목소리에 이베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그라스가 자폭하기 전에 자신에게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또 다른 선물이다!”

“이, 이!”

몸을 부르르 떨던 이베른의 왼손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피어올랐다.

화르륵!

그 불덩이는 단숨에 어쌔신의 얼굴을 집어삼켰다.

어쌔신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땅에 쓰려진 어세신의 어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카칸! 카칸, 이 노옴……!”

푹, 쐐애애액!

분노에 일갈을 내지르는 그때.

이베른의 발아래에서 시퍼런 날이 번뜩이며 롱소드가 튀어 올라왔다.

“……!”

위험을 느낀 이베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고, 그는 서둘러 몸을 옆으로 틀었다.

사각!

하지만 롱소드를 온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그의 뺨에 긴 혈흔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베른은 다시 불덩이를 만들어 땅바닥에서 튀어 올라온 그림자를 태워 버렸다.

화르르륵!

까만 숯으로 화해 죽어가는 어쌔신을 보며 이베른은 그저 뺨을 바르르 떨 뿐이었다.

“으아아아아!”

그러더니 분노에 젖어 울부짖었다.

* * *

이베른이 마탑주실로 돌아와 보니 상황은 더 가관이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마탑주들도 모두가 어세신에게 암습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모두가 하나같이 죽기 전에 카칸의 전언을 남기면서 말이다.

“협상 같은 건 더 이상 필요 없다. 우리가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당장 네놈의 목을 따주리라!”

이베른은 분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통신을 할 수 있는 마법 수정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늘 오후 통신을 나눴던 페로스 공작 측에 다시 연결을 시도했다.

“지금 공작 각하께서 막 잠자리에 드셔서…….”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페로스 공작을 연결하라!”

만약 통신을 받은 테누타 왕국 측 왕실마법사가 눈앞에 있다면 그 자리에서 찢어 죽였을지도 모른다.

극도로 분노한 이베른에게 지금은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가 않았다.

살기 가득한 협박 때문인지, 아니면 전황이 그만큼 위급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후 페로스 공작의 모습이 수정구에 비춰졌다.

“무슨 일이오?”

짜증이 날 법도 한데 페로스 공작은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어떤 조건도 내걸지 않겠소.”

차가운 이베른의 말을 듣자 페로스 공작의 표정에 살짝 변화가 생겼다.

“그 뜻은?”

“모든 정보를 넘기시오. 이틀, 늦어도 삼 일 후 마탑이 전장으로 가겠소.”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라고 페로스 공작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는 페로스 공작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마탑의 지원만 받을 수 있다면 정보 정도는 언제든지 넘겨 줄 수 있었으니까.

“알겠소. 내일 아침 부관을 통해 넘기겠소.”

이베른은 주먹을 말아 쥔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시각.

짙은 피비린내와 살점이 썩어가는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하멘 평원의 붉은 대지 위에 마현이 서 있었다.

앞뒤의 진영에서 찌릿한 긴장감과 살기가 느껴지는 전장 한가운데이건만 마현은 마치 산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좋군.’

마현은 걸음을 멈춘 채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주위를 둘러보는 마현의 눈동자는 본래의 흑안이 아니라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현의 회색 눈동자에는 수천수만의 귀기 어린 망자들이 보였다. 마현의 귀에는 그 망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마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죽음을 관장하는 나 카칸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이제부터 너희들의 죽음을 이 카칸이 관장하겠노라!”

마현의 몸에서 흘러나온 회색 기운이 마치 옅은 안개처럼 주위를 뒤덮어갔다. 그러자 망자들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울부짖음을 멈춘 망자들은 자발적으로 마현에게로 모였고, 곧 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사방에서 코를 찌르는 시독도 망자들과 함께 흡수되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인가?’

마현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전쟁이 끝나는 날…….’

마현은 이제 남은 네 명의 백마법사들을 떠올렸다.

‘너희들은 죽는다!’

마현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번뜩이다가 사라졌다.

* * *

트로켄 진영의 지휘관들 중에서 가장 먼저 눈을 뜨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버드런트 공작이었다. 나이가 있어 밤잠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이 전쟁에서 조국 트로켄 왕국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이 전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흐으읍……!”

깊게 숨을 들이마시던 버드런트 공작은 평소와는 다른 아침 공기를 느끼곤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장에는 전장만의 특유한 냄새가 있다.

꼭 코로 직접 느껴지는 피비린내라든가 시신이 썩어가는 퀴퀴한 냄새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살기와 원한이 뒤엉킨 전장 특유의 음습한 기운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것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이상한 일이군. 전쟁터에서 상쾌함을 느끼다니!’

아침 공기는 시원하다 못해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이건 마치 이른 아침 울창한 숲지대 사이로 난 자그만 오솔길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아닌가.

버드런트 공작은 눈을 크게 뜨고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어제와 별반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누런 대지였던 하멘 평원은 피로 인해 붉어져 있었고, 미처 거두지 못한 시신들이 즐비하게 쓰러져 썩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평원 위에는 까마귀 떼가 새까맣게 내려앉아 이른 아침부터 시선을 뜯어먹고 있었다.

‘왠지…… 이상하군.’

어제와 똑같은 광경인데도 불구하고 음습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상념에 잠겨 있던 버드런트 공작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카칸 경.”

버드런트 공작 뒤에는 마현이 서 있었다.

“무얼 그리 바라보십니까?”

마현은 그런 버드런트 공작 곁으로 바투 다가섰다.

“전장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소.”

버드런트 공작은 뒷짐을 살짝 지며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매일 보시는 거 같습니다.”

버드런트 공작은 그 말에 놀란 듯 다시 마현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전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잊지 않으려고 본다오.”

버드런트 공작의 목소리는 쓰디썼다.

짧지만 그 말에는 많은 의미가 들어 있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오늘은 어제와 느낌이 달라 조금 더 오래 보고 있었소이다.”

“그런가요?”

마현의 반문에 버드런트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착각이겠지요. 아니면 나이를 먹어 감각이 무뎌졌거나……. 뭐 노인네의 쓸데없는 감상일 뿐이오.”

마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맞다.

전쟁으로 인해 한이 서린 망자들과 그 시신들이 썩어가면서 내품는 시독을 어젯밤 흡수했기 때문이다.

마현은 몸을 돌려 군영을 둘러보는 버드런트 공작의 뒷모습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처럼 노련한 수장이 있었기 때문이군.’

왜 하르센 대륙의 최약소국인 트로켄 왕국이 여태껏 무너지지 않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얼마 후, 기상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군영 안은 분주해졌다.

* * *

그로부터 삼 일이 흘렀다.

하멘 평원 중앙에 위치하던 전선이 동북쪽, 하멘 평원 끝자락까지 밀려올라갔다.

거리는 대략 10킬로미터 내외.

트로켄 왕국은 연일 승전을 거듭하며 영토를 확장하게 된 것이고, 테누타 왕국은 패배를 거듭하며 후퇴를 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마현은 케이슨과 함께 지친 얼굴로 저녁 회의이자 이 전선에서 가질 마지막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중앙지휘실 군막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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