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2
11화
그 눈길 끝에 히메네스 역시 막 싸움을 끝낸 듯 피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안드리치를 향해 히메네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그것을 신호로 안드리치와 히메네스는 동시에 케이슨과 생사를 건 싸움을 하고 있는 미겔를 향해 군마를 몰아 달려 나갔다.
“미겔!”
안드리치는 우렁찬 목소리로 미겔을 부른 후 안장을 발로 박차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안드리치의 몸놀림은 상당히 날렵했다.
“어림없다!”
미겔은 말을 뒤로 물리며 단숨에 안드리치의 생명줄을 끊어버리려는 듯 그의 심장을 향해 바스타드소드를 찔러 넣었다.
‘……!’
순간 미겔의 눈이 화등잔처럼 크게 떠졌다.
카이샨 메일의 투구 사이로 보이는 안드리치의 눈동자는 분명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안드리치는 손에 익은 거대한 할버드를 버리고는 오른팔을 활짝 펼쳐든 것이다.
푸욱!
미겔의 바스타드소드가 안드리치의 심장을 관통했다.
안드리치의 눈동자가 고통으로 인해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흔들리던 눈동자에 독기가 서리며 눈매가 매섭게 변했다. 그리곤 통나무 같은 굵은 오른팔로 미겔의 허리를 안아버리는 것이었다. 미겔은 안드리치의 육중한 무게에 짓눌려 군마에서 낙마했고 바닥을 몇 차례 굴렀다.
“큭!”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신음을 흘린 주인공은 심장에 검이 꽂힌 안드리치가 아니라 바로 미겔이었다.
“이, 이놈!”
미겔은 안드리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심장에 박힌 바스타드소드를 마구 비틀었다. 그럴수록 안드리치는 미겔의 허리를 움켜쥔 오른팔에 더욱 힘을 주어 끌어안으며 육중한 몸으로 위에서 내리눌렀다.
“히메네스!”
안드리치는 꺼져가는 마지막 생명을 간신을 붙들고 목청껏 소리쳤다.
히메네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뒤엉킨 둘 위로 몸을 날렸다. 땅에 내려선 히메네스는 먼저 안드리치의 얼굴을 살폈다.
“안드리치.”
안드리치를 부르는 히메네스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하핫, 나 먼저 간다.”
안드리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더니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히메네스는 그 말에 대답하며 역수로 쥐고 있던 롱소드를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뭐, 뭐하는 것이냐?”
미겔은 안드리치의 육중한 몸 아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둘의 대화와 히메네스의 검을 보자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죽어라, 미겔!”
히메네스는 있는 힘껏 롱소드를 아래로 내리찍었다.
푹, 푹!
오러가 담긴 히메네스의 롱소드는 안드리치의 몸을 가르고 미겔의 몸을 관통했다.
“컥!”
미겔의 눈이 화등잔처럼 크게 떠졌다.
검이 몸을 관통하는 고통에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몸부림조차 마음대로 칠 수 없었다. 안드리치가 여전히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크크크, 가자. 나와 함께.”
안드리치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살기 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저승길이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히메네스는 롱소드를 뽑아 다시 아래로 내리찍었다.
푹, 푹!
이번에도 안드리치의 몸을 뚫고 들어간 검은 미겔의 심장을 찢어발겼다.
히메네스가 검을 뽑아냈을 때 안드리치의 몸은 아래로 축 늘어졌고, 미겔 역시 몸을 부르르 떨다가 고개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아, 안 돼!”
뒤늦게 케이슨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지만 이미 안드리치와 미겔은 죽은 후였다.
“이게 무, 무슨 짓인가?”
케이슨의 진노한 호통에 히메네스는 그저 입술을 비틀어 올릴 뿐이었다.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오. 그리고 이 승부는 내가 이겼소.”
입술을 비틀며 웃음을 흘리던 히메네스가 롱소드를 들어 자신의 배에 꽂았다.
“큭!”
턱이 살짝 꺾이며 히메네스는 힘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 이…….”
케이슨은 미처 말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망연한 얼굴로 내려다볼 따름이었다.
“크크크크, 크하하하하!”
아래로 떨어진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린 히메네스는 마지막 유언을 웃음으로 전하더니 영원히 눈을 감았다.
* * *
콰과과광!
전장에서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콰르르르르!
지축을 뒤흔드는 지진도 일어났다.
감당하기 힘든 마법의 힘이다.
전장을 내려다보는 페로스 공작의 눈에 핏발이 섰다.
“제길!”
테누타 왕국의 총사령관인 페로스 공작은 거친 욕설을 입에 담았다.
그의 욕설은 비단 대단위 마법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믿었던 검은여우 용병대가 몰살당했고, 귀한 소드마스터가 둘이나 죽었다.
또한 테누타 왕국에서 자랑하는 기사단이 힘없이 무너지는 광경이 그에게 욕설을 입에 담게 만든 가장 큰 이유였다.
이빨에 짓이겨진 페로스 공작의 입술이 힘없이 열렸다.
“후퇴를…… 명하라.”
둥둥둥둥둥둥!
후퇴를 알리는 북소리가 빠르게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
“트로켄 왕국 만세! 만세!”
이어 테누타 왕국 측에서 들려오는 승리의 함성에 페로스 공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 * *
테누타 왕국 총사령관인 페로스 공작은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이대로는 필패야, 필패!’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휴우.”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페로스 공작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전쟁이 각국의 기사단이나 군사력이 아닌 한낱 용병들의 손에 좌지우지하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의 생각은 고스란히 얼굴에 투영되고 있었다.
‘카칸…….’
어디서 그런 자가 튀어나왔을까.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자라면 진즉에 두각을 나타냈어야 한다. 하긴 흑마법사이니 평생 어둠 속에서 몸을 숙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하필 이번 전쟁에 모습을 드러내 상황을 이토록 심각하게 만든단 말인가.
“총사령관님.”
그의 부관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 어떻게 되었나?”
페로스 공작의 질문에는 절실함이 배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부관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가?”
페로스 공작은 허탈한 얼굴로 소파로 걸어가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테누타 왕국의 일곱 소드마스터 중 다섯 명이 이 전장에 출전했다. 더 이상의 지원은 무리라는 것을 페로스 공작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요행을 바라고 왕실에 추가 지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국왕 전하의 뜻은 아무리 어려워도 보름만 전선을 유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보름이라…….”
그나마 위안이 되는 왕명이었다.
“왕실마법병단은?”
“오늘 자정을 기해 도착할 거라는 전갈입니다.”
“그렇군. 지금 당장 알베르 후작과 살바토레, 쿳시 백작을 부르게.”
“……저기 공작 각하.”
부관은 조심스럽게 페로스 공작을 불렀다.
“왜, 아직 더 보고할 게 남았나?”
“공식적인 것은 아니옵고…….”
부관은 둘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페로스 공작 곁으로 바투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마탑에서 은밀히 연락이 왔습니다.”
“마탑?”
페로스 공작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군, 그래!’
그때서야 페로스 공작은 카칸이 흑마법사임을 떠올린 것이다. 더불어 아직까지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또 한 명의 흑마법사도 동시에 떠올렸다.
“뭐라고 하던가?”
꺼질 듯 위태롭던 촛불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마탑에서는 일단 전장의 분위기를 비롯해 카칸에 대한 정보를 요구해왔습니다.”
“흠…….”
당장이라도 그 동아줄을 움켜잡고 싶었지만 이럴수록 더 냉정하고 꼼꼼하게 앞뒤를 살펴야 한다는 것을 페로스 공작은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제가 마탑에 관한 정보를 조금 알아봤습니다.”
페로스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보고하라고 채근했다.
“전쟁이 개시된 날, 이상한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태양, 스피네타 마탑 최상층, 그러니까 마탑주실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폭발?”
“마탑 측에서는 화염 마법 실험 중 벌어진 일이라고 발표를 했지만 분위기나 여러 소문 등을 고려해 보면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또 그 사건 이후 매일같이 마탑주들이 모임을 갖는 것으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흠…….”
“공교롭게도 그 일이 있은 후 우리가 어떤 지원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마탑에서 먼저 연락이 온 것입니다.”
페로스 공작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것은 분명 기회다.
하르센 대륙에서 마탑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렇게 높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여 준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그것도 기울어져 가는 승패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부관.”
“예, 공작 각하.”
“정보를 알려주되 반드시 그들의 참전을 이끌어내도록.”
“하면 국왕 전하께도…….”
부관의 말에 페로스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렇게 되면 위험부담이 너무 커져. 마탑주들에게도 알리게. 이 일은 왕실이 아닌 그들과 나의 계약임을. 아마 그들도 분명 그걸 바랄 거야.”
“알겠습니다, 공작 각하.”
“아니다. 내가 가지. 직접 그들과 이야기할 것이다.”
어둡던 페로스 공작의 눈동자가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 * *
“대승입니다, 대승.”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속이 시원한 날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지휘관들은 화색이 가득한 얼굴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상당히 들뜬 분위기 속에서 오로지 한 명, 총사령관인 버드런트 공작만은 서서히 얼굴빛이 누르락붉으락 변해갔다.
쾅!
결국 화를 참지 못한 버드런트 공작이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못나도 이렇게 못난 것들을 봤나!”
버드런트 공작은 상당히 진노한 목소리로 지휘관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지휘관들은 한순간 핼쑥해진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뭐가 어쩌고 어째? 대승? 속이 시원해?”
버드런트 공작은 지휘관들이 떠들었던 말로 되물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는 것인가?”
그 호통에 다들 움찔거렸지만 왜 버드런트 공작이 이렇게 진노하는지 다들 모르는 눈치였다.
“이게 너희들 손으로 이룬 승리더냐? 너희들이 테누타 왕국을 쳐부쉈느냔 말이다!”
탁자 위에 여전히 움켜쥐고 있는 버드런트 공작의 주먹은 분노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남의 손으로 이룬 승리가 진정한 승리라고 생각하는가? 남의 손으로 지켜진 평화가 얼마나 갈 것 같은가?”
버드런트 공작의 계속되는 호통에 지휘관들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