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9
8화
마현 앞에 히메네스와 안드리치가 핏기가 없는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케이슨의 목숨을 살려줬다고?”
“내 복수가 먼저였을 뿐이오.”
히메네스가 냉소 어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래?”
마현은 피식 웃음을 삼켰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우리를 데려온 것이오?”
마현의 질문에 히메네스가 되물었다.
“글쎄……. 나도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묻는 것이야. 어떻게 해줄까?”
마현은 깍지 낀 양손을 꼬고 있는 다리 위에 얹으며 등을 소파 등받이에 깊숙하게 묻었다.
“미겔, 그자 죽었소?”
히메네스는 고개를 돌려 케이슨을 쳐다보았다.
“아직.”
케이슨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자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 후에 나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오.”
“복수의 화신인가? 후후.”
마현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내뱉었다.
마치 조롱이 담긴 웃음처럼 보인 까닭에 히메네스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거기에 대해서 가타부타 입을 열지는 않았다. 다만 입술이 더욱 굳게 다물어졌을 뿐이었다.
“미겔이라는 자를 직접 보고 싶군. 도대체 그자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모두가 죽이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군.”
마현은 고개를 돌려 케이슨을 쳐다보았다.
“주군 뜻대로…….”
케이슨은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모습에 히메네스와 안드리치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들이 알고 있기로는 케이슨은 단장이고, 마현은 부단장이었다. 그런데 단장인 케이슨이 마현에게 주군이라고 했다.
“버리자니 아깝고, 삼키자니 뜨겁고…….”
마현은 속으로 계륵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아이작, 한 3년 남았나?”
“정확히 2년 10개월 남았습니다.”
“그걸 일일이 다 계산하다니…… 생각보다 털털하지 못한 성격이군.”
“털털하지 못하다고 하기보단 그냥 꼼꼼한 성격이라고 해주면 좋겠습니다.”
“뭐 그렇게 해주지.”
마현은 피식 웃음을 삼키며 다시 안드리치와 히메네스를 쳐다보았다.
“그럼 삼켜볼까? 조금 뜨겁겠지만.”
마현은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중얼거림이었지만 제법 큰 목소리였기에 히메네스와 안드리치는 마현의 말을 똑똑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 뜻을 어렴풋이 느꼈기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얼떨결에 마현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들의 자유를 걸고 나와 내기 하나 할까?”
“……?”
“간단하다. 둘이 동시에 덤벼라. 나를 이기면 풀어주겠다.”
“지면?”
“2년 10개월 간 나의 노예가 되는 거다. 물론 위험한 일도 있을 테니 그 사이 죽을 수도 있다.”
내기라고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일방적인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조금은 불쾌했지만 히메네스는 거부할 수 없었다.
칼자루는 자신이 아닌 마현이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히메네스는 바로 수락할 수도 없었다. 안드리치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히메네스는 고개를 돌려 안드리치를 쳐다보았다. 그 역시 굳은 표정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히메네스의 시선을 받은 안드리치는 특유의 털털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리가 함께일 때 선택은 항상 네가 했어. 나는 그 선택을 따랐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너는 정말…….”
히메네스는 웃고 있는 안드리치와 달리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안드리치를 보며 생각에 잠긴 히메네스가 생기 어린 눈으로 마현을 쳐다보았다. 그의 손은 꽉 쥐여져 있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마현의 대답에 히메네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응하겠소.”
“좋아. 화끈해서 마음에 들려고 하는군.”
마현은 몸을 돌려 군막을 벗어났고, 이어 히메네스와 안드리치가 그를 따라 군막을 나갔다.
“일단 둘이 눈에 띄면 좋지 않으니…….”
마현은 마치 벌레라도 쫓듯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군막 앞에 마련된, 임시 연무장이라고 하기에는 크기가 조금 작은 빈 공터에 환영 마법이 걸렸다. 동시에 음파 차단 마법도 함께 시전되었다. 그 두 마법으로 인해 그 누구도 이 대련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함께 나온 케이슨 용병기사단과 흑풍대는 제외하고.
마현은 공터 중앙에 홀로 섰다.
히메네스와 안드리치는 중앙에 선 마현을 사이에 두고 자리를 잡았다.
스르릉!
히메네스는 자신의 롱소드를 뽑아들었고, 안드리치는 한 손으로 할버드를 억세게 움켜잡았다.
마현을 중앙에 두고 히메네스와 안드리치는 짧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파밧!
동시에 둘은 마현에게로 달려들었다.
후우웅!
쐐애액!
안드리치는 마현의 다리를, 히메네스는 마현의 목을 동시에 노렸다.
생각보다 뛰어난 합격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한 둘이었기에 눈빛만으로 서로의 의중을 파악한 덕분이리라.
마현은 허공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사삭!
마현의 발 아래로 히메네스의 롱소드가 스치듯 지나갔다.
그 순간 안드리치와 히메네스의 눈빛이 번뜩였다.
“하압!”
히메네스는 마현을 따라 허공으로 뛰어올랐고, 안드리치는 아래서 마현의 하체를 노렸다.
어느 곳으로 가도 피할 수 없어 보였다.
‘이겼다!’
히메네스와 안드리치의 얼굴에 승리에 대한 확신이 표정으로 살짝 나타났다.
히메네스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제아무리 마현이 뛰어나다 해도 그도 소드마스터이고 자신들도 소드마스터다. 애초에 결과가 뻔한 승부였다. 단지 변수가 있다면 애꾸가 된 자신의 눈이었고, 팔 하나를 잃은 안드리치의 균형 감각이었다.
이제 밀러의 목숨을 취하러 테누타 왕국으로 잠입하는 일만 남았다.
히메네스가 승리를 확신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마현의 신형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그 흔한 잔상조차 남기지 않았다.
“헉!”
너무 놀라 히메네스는 헛바람을 토해냈다.
팡!
그 순간 히메네스의 발아래, 안드리치의 등 뒤에서 둔탁한 타격음이 터졌다.
“컥!”
안드리치의 짧은 신음을 토하며 앞으로 쓰러져 땅바닥을 몇 바퀴 굴러야만 했다.
히메네스는 안드리치가 서 있던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마현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어떻게?’
히메네스는 마현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실력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소드마스터도 다 같은 소드마스터가 아님을.
안드리치는 그다지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지, 아니면 맷집이 좋아서인지 재빨리 몸을 털고 일어나 당황스러운 얼굴로 히메네스 곁으로 다가왔다.
그런 둘을 향해 마현은 들어오라는 표시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히메네스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롱소드를 들었다.
그리고는 마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후우웅!
이번에는 오러가 담겼다.
순간 히메네스의 검이 여러 개로 늘어난 것처럼 대여섯 개의 오러가 마현의 몸 곳곳을 노리고 빠르게 들어왔다.
‘호오?’
마현의 눈에서 이채가 어렸다.
무림과 비교하면 그다지 뛰어난 쾌검의 묘리를 담은 환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곳 하르센 대륙이라면 말이 다르다. 상당한 경지에 오른 고급 검술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히메네스의 등 뒤에서 큼지막한 그림자가 허공으로 불쑥 솟아올랐다.
안드리치였다. 거구답지 않게 표홀하게 신형을 허공으로 띄운 것이다.
“흐아압!”
안드리치의 우렁찬 기합과 함께 할버드에 두툼한 오러가 담겼다.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뒤로 물러나는 것일 뿐.’
히메네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안드리치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힘차게 할버드를 휘둘렀다.
마현이 뒤로 물러나는 순간 히메네스는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 마현의 목을 노릴 생각이었다.
이 검술은 생사가 걸린 싸움에서 언제나 히메네스에게 승리를 안겨준 비상의 한 수였다.
하지만 마현의 움직임은 히메네스의 생각과 달리 움직였다.
마현의 무게 중심이 살짝 아래로 내려가며 그의 롱소드가 허공으로 올라가는 듯싶었다.
마현의 검이 아주 천천히 궤적을 그렸다.
그런 그의 검에 오러가 담겼고, 오러는 얇은 막을 만들어냈다.
바로 검막이었다.
따다다당!
히메네스의 롱소드는 마현이 만들어낸 검막을 뚫지 못하고 허무하게도 뒤로 튕겨났다.
“크윽!”
히메네서는 짧은 신음을 삼키며 힘겹게 롱소드를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쾅!
거의 일격필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안드리치의 일격 역시 마현의 얇은 검막에 막혀 튕겨났다.
시큰거리는 손목의 통증이 가시기도 전에 그들은 다시 한 번 손목에 강한 충격을 받아야 했다.
쾅! 쾅!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바싹 다가선 마현이 그들의 롱소드와 할버드를 후려친 것이다.
“큭!”
“컥!”
둘의 롱소드와 할버드는 힘없이 날아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졌다.
그것도 완벽한 패배였다.
아쉬움조차 남지 않을 만큼 확실한 실력 차이에 눌린 것이다. 게다가 곰 같은 안드리치까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할 만큼 힘의 차이 또한 압도적이었다.
“……졌소.”
히메네스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혹시 소드크리에이터(sword creator)입니까?”
안드리치는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마현을 쳐다보며 힘겹게 물었다.
“소드크리에이터라…….”
막연한 경지.
하르센 대륙의 검사들은 소드마스터 위에 소드크리에이터라는 상상의 경지를 올려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칭만 있는 경지였다. 대륙의 소드마스터 중 누구도 오르지 못한 경지였다.
한 마디로 막연히 소드마스터가 끝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만들어진 검사들의 상상의 경지인 것이다.
“나는…….”
마현은 롱소드를 거두며 말을 이었다.
“흑마법사다.”
그 대답에 안드리치와 히메네스의 눈은 화등잔처럼 크게 떠졌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들의 눈동자는 요동치고 있었다.
* * *
자정이 훌쩍 넘긴 밤.
스윽.
순찰을 도는 병사들과 기사들의 조용한 발자국 소리만이 유일하게 정적을 깨는 칠흑 같은 밤, 어둠보다 더욱 검은 그림자가 군막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그림자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단검을 뽑아들었다.
단검의 날조차 검게 칠해져 있었다.
찍, 찌지직!
그가 고작 3센티미터 길이의 군막 지붕의 천을 찢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10분이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최대한 소리를 죽여야 했기 때문이다.
지루하리만큼 길게 10분의 시간을 들여 미세한 구멍을 만든 그림자는 긴 대롱을 꺼내 군막 안으로 조용히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대롱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훅, 하는 바람 소리가 들릴 법도 하건만 대롱에서는 그 어떤 미세한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치 잠을 청하려는 듯 그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1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