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3
2화
검은여우 용병대가 있어 어쩔 수 없이 한 발 물러나 있었지만 이제는 그 족쇄가 풀렸다. 더는 거리낄 것 없이 마현을 죽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두 물러나라!”
네이폴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심장에서 마력을 분출시켰다.
고오오오―
네이폴을 중심으로 마나의 파장이 용솟음쳤다.
휘몰아치는 마나의 소용돌이에 주위의 흙과 돌멩이들이 뒤섞여 사방으로 비산했다.
“거친 바람이…….”
네이폴은 자신이 펼칠 수 있는 7서클 마법 중 가장 위력이 강한 마법을 시전하려 했다.
그때였다.
쿠오오오오!
전장 중앙에서 갑자기 하늘로 검은 불덩이가 무서운 기세로 치솟아 올랐다. 그와 동시에 바람을 타고 짙은 어둠의 향이 날아왔다.
‘흐, 흑마법?’
네이폴의 눈동자가 화등잔처럼 크게 떠졌다.
단순히 허공으로 치솟은 마법이 흑마법이라서가 아니었다. 비록 자신보다는 못하지만 느껴지는 마나의 파장으로 미뤄 짐작해 보건데 그것은 6서클의 대단위 마법이 틀림없었다.
네이폴의 몸이 저려오며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카칸이 있는 전장에 흑마법이 나타났다는 건 결코 무심코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6서클의 흑마법이라면 그 공격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위력을 담고 있을 게 뻔했다.
네이폴은 끌어올린 마력을 거두며 시선을 돌렸다.
흑마법의 진원지는 트로켄 왕국의 본진 중앙이었다.
“스, 스승님.”
“네이폴 마탑주님.”
6서클의 흑마법을 본 마법병단 소속의 마법사들이 경악성을 터트리며 네이폴을 불렀다.
끝을 모르고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검붉은 불덩이는 잠시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네이폴은 잠시 거둬들였던 마력을 다시 분출시켰다.
저 흑마법으로 아군의 희생은 있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카칸의 죽음이었다. 반드시 죽이리라 마음을 먹고 온 곳이 바로 이 자리였다.
비록 카칸이 그저 이름만 같은 자일지라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죽어 마땅했다.
“거친 바람이 휘몰아치니 그 어떤 것도 앞을 가로막지 못할지어다, 토네이도 어택(Tornado attack)!”
네이폴의 바람의 마나가 전장으로 날아올랐다가 빠르게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곳은 바로 검은여우 용병기사단과 케이슨 용병기사단이 뒤엉킨 전장 한가운데였다.
마법사의 마나, 즉 마력에 누구보다 민감한 이는 바로 마현이었다.
당연히 네이폴의 토네이도 어택 마법이 시전되는 것을 전장에서 가장 빨리 알아차렸다.
‘결국 실패한 것인가?’
마현은 전장에 나서기 전에 밀러에게 마법병단의 이목을 끌어줄 것을 당부했었다. 하지만 네이폴이 들고 나온 응수는 아군의 희생보다 마현, 자신의 목숨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다.
네이폴의 마법 공격이 밀러의 흑마법과 자신에게 집중된 까닭에 흑풍대를 완전히 놓쳐버렸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7서클 대단위의 마법이다. 모두 뒤로 물러나, 어서!』
마현은 전음으로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말로 얘기하면 검은여우 용병기사단 역시 그 소리를 듣고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현의 전음을 듣고 케이슨 용병기사단원들은 매우 발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쑤아아아아!
케이슨 용병기사단이 잽싸게 몸을 뺀 전장 한가운데에 칼날 같은 바람이 용오름 치솟았다. 광포한 바람은 순식간에 주변 일대를 무서운 속도로 휘감았다.
“으아아아!”
“사, 살려줘!”
장정 네다섯이 붙어도 감싸 안기 힘들 정도로 두터운 회오리바람이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을 집어삼켰다.
토네이도에 붙들려 공중으로 솟구친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원들은 바람이 만들어낸 칼날에 베이고 찢겼다. 자욱한 피와 살점, 그리고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은 토네이도에 갇혀 사방으로 비산하지 못했다.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원들의 피와 살로 인해 새하얀 바람은 붉어지며 그 덩치를 더욱 키워나갔다.
‘저건 미겔의 뜻인가, 아니면 네이폴의 뜻인가?’
적도 아군도 구별하지 않고 시전한 토네이도 어택 마법에 마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처럼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공격하게 한 것이 누구의 뜻인지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미겔이든 네이폴이든, 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할 테니까.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을 남김없이 집어삼키며 더욱 덩치를 키운 토네이도의 힘을 느끼며 마현은 서둘러 마력을 끌어올렸다. 잠시 후면 모두 응징할 테니까.
“디그!”
푸학!
마현의 발 아래로 큼지막한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모여!”
마현은 구덩이 아래로 풍이와 함께 뛰어내리며 소리쳤고, 그 명에 따라 케이슨 용병기사단원들도 마현을 뒤따라서 구덩이 아래로 몸을 피했다.
“실드!”
마현은 구덩이 위에 방어막을 쳤다.
곧이어 실드 위로 더욱 거대해진 토네이도의 칼바람이 뒤덮였다.
* * *
“키키키키키!”
평소 점잖던 밀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밀러는 얼굴 가득 기괴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거기에 핏발까지 솟아 벌겋게 충혈된 눈은 그를 더욱 비정상적으로 보이게 했다.
“광기는 불덩이마저 미치게 만드노라, 매드니스 플레임(Madness flame)! 키히히히히!”
밀러는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리며 허공으로 서너 발의 불덩이를 쏘아 올렸다.
푸학 푸학 푸학―
불덩이는 적진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오르지 않았다.
때로는 구불구불하게, 때로는 벼락이 치듯 하강하다가 다시 솟구쳐 날아갔다.
밀러의 마법을 막기 위해 적진 마법병단 측에서 밀러의 흑마법에 대항하는 여섯 발의 6서클 마법이 치솟아 올랐다.
콰광, 콰광, 콰르릉!
밀러의 매드니스 플레임이 막혔다.
그러자 밀러의 얼굴이 더욱 광기로 물들며 누르락붉으락 변했다.
밀러의 공격 마법이 정확히 적진에 떨어진 것은 처음 한 번뿐이었다.
그 뒤로는 여섯 마탑에서 파견한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마법병단의 6서클 마법사들에게 마법 공격이 번번이 가로막힌 것이다.
“키히히히히! 너희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는 세상을 미치게 만들어 버리겠다.”
밀러의 몸에서 조금 전과는 달리 검은 기운이 선명하게 뿜어져 나왔다. 모든 어둠의 기운을 일시에 끌어올린 것이다.
“이히히히! 미친다, 세상이 미친다. 그로 인해 세상 땅 위에 발을 딛고 선 모든 이들이 미친다, 크레이지 월드(Crazy world)!”
밀러의 몸을 가득 덮은 어둠의 기운이 마치 폭발하듯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쏴아아아악!
일일이 눈으로 하나둘 셀 수 있는 수가 아니었다.
그 빛줄기가 얼마나 되는지는 시전자인 밀러만이 정확히 알 정도로 수백 줄기의 묵빛 기운이 일시에 치솟아 올랐다.
“막아봐! 막아봐! 이히히히히,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라고! 키키키키.”
밀러는 전장으로 날아가는 수백 줄기의 어둠의 기운을 보며 더욱 기괴한 웃음을 짓더니 곧이어 제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췄다.
적군 마법병단 측에서 밀러의 크레이지 월드 흑마법에 대항하는 마법들이 속속 솟아올랐지만, 그 정도로는 밀러가 날려 보낸 모든 어둠의 기운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절반 정도는 가로막혀 허공에서 사그라졌지만 나머지 절반은 적군 진영이나 전장에 떨어졌다.
퍼석!
어둠의 기운이 떨어진 곳에서 폭발은 없었다. 다만 자욱한 안개가 사방으로 퍼질 뿐이었다.
“흡!”
위험을 느낀 병사들이나 기사들이 다급히 코를 막고 등을 돌렸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크흐흐흐!”
그 기운을 들이마신 이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광기 어린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왜, 왜 그래?”
어둠의 기운을 들이마시고 광소(狂笑)를 흘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빠르게 숨을 참았던 동료들이 걱정 어린 눈을 하고 물었다.
그때였다.
고개를 떨어트리고 웃음을 흘리고 있던 자들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하늘로 치켜들었다.
“크하하하!”
그들의 입에서 다시 광소가 터져 나왔다.
“죽여! 모두 죽여라!”
주위를 휘둘러보는 그들의 번들거리는 눈동자에도 시퍼런 광기가 가득했다.
쐐애액!
광기에 사로잡힌 자들은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그로 인해 전장은 더욱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바닥에는 잘린 팔다리가 즐비했고, 머리가 날아간 시신의 목에서 피가 용솟음쳤다. 실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키히히히. 미쳐라, 미쳐라. 세상아, 미쳐라. 이히히……, 끄륵!”
그 광경을 쳐다보며 춤을 추던 밀러는 순간 눈동자를 뒤집더니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마침내 어둠의 마나가 완전히 고갈된 것이다.
* * *
마현은 구덩이 아래에서 투시 마법으로 전장 곳곳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전장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병기를 휘두르고 있는 자들은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바로 밀러의 크레이지 월드 마법 때문이었다.
마현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는 흡족함이 담겨 있었다.
밀러는 마나의 고갈로 쓰러지기 전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펼쳐 보인 것이다. 그것도 하르센 대륙을 주름잡는 막강한 마법병단을 향해 당당하게.
이제 자신과 흑풍대, 그리고 케이슨 용병기사단 차례였다.
어느새 케이슨 용병기사단과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이 뒤엉켰던 전장을 모두 집어삼킨 토네이도는 서서히 힘을 잃고 사라져가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그때를 맞춰 테누타 왕국 진영에서 수십 기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바로 검은여우 용병대였고, 그 선두에는 미겔이 있었다.
“단장, 옵니다.”
“……?”
“미겔.”
“이제야 오는 건가?”
바스타드소드를 움켜쥔 케이슨의 손등에 굵은 힘줄이 불룩 솟아올랐다.
강력한 토네이도가 전장에서 완전히 소멸되자 마현은 실드 마법을 거둬들였다. 토네이도의 여파로 여전히 바람이 매섭게 불긴 했지만 견딜 수 있을 정도였다.
마현과 풍이 먼저 구덩이에서 뛰어나갔고, 케이슨 용병기사단원들이 그 뒤를 따라 뛰어나갔다.
눈앞에 펼쳐진 전장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크으!”
피가 작은 연못처럼 흥건히 고인 전장 중앙에 두 사내가 온몸에 피칠을 하고 서 있었다.
바로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의 단장인 히메네스와 부단장인 안드리치였다.
둘의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히메네스의 왼쪽 눈에는 검 조각으로 보이는 금속 파편이 박혀 있었고, 그 때문에 얼굴 반쪽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안드리치의 상태는 더욱 나빠 보였다. 그는 왼팔이 거의 다 찢겨져 있었는데, 질긴 살가죽으로 인해 떨어지지 않고 간신히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리겠어!”
안드리치가 고함을 버럭 내지르며 덜렁거리는 왼쪽 팔을 거칠게 뜯어 땅바닥에 처박았다.
그것을 냉랭한 눈으로 바라보던 히메네스가 얼굴에 박힌 검의 조각을 무표정한 얼굴로 뽑아냈다. 그 검 조각 끝에는 흉물스럽게 실핏줄을 매단 눈알이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