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
1화
“흑풍대는 산개, 목표는 마법병단이다! 중앙은…….”
마현은 고개를 돌려 바로 후미에 붙어 달리는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쳐다보았다.
케이슨, 아이작, 자브라, 밀러, 그레오, 야솝.
스쳐지나가듯 빠르게 그들을 쳐다보았지만 마현은 확실히 보았다. 자신감으로 충만한 굳건한 눈빛을.
“중앙은 케이슨 용병기사단이 맡는다!”
“명!”
“명!”
흑풍대는 짧은 복명을 외치며 부채모양으로 말을 몰아 산개했다.
“아이작!”
마현은 풍의 속도를 낮춰 뒤로 물러나며 아이작과 속도를 맞췄다.
“네가 선두다. 마음껏 날뛰어 봐!”
마현의 말에 아이작이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 했다고!”
아이작은 투기를 폭사시키듯 마음껏 드러내며 선두로 달려 나갔다.
“자브라, 아이작의 뒤를 부탁합니다.”
“호호호, 그러죠.”
자브라는 매혹적인 미소를 날리며 레피어를 뽑아들었다.
“나머지는 아이작과 자브라에 맞춰 마음껏 실력을 발산해봐!”
“우리는 나머지가 아니야! 이름 불러!”
역시나 제이든이었다.
딴에는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말 머리를 돌려 마현 곁으로 바싹 다가와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을 짐짓 지어 보이고는 아이작과 자브라 뒤로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
“단장, 우리도 가죠.”
마현의 웃음에 케이슨은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오늘 이후로……, 공적인 자리에서는 자네에게 더 이상 존댓말을 듣지 않겠네. 나 역시 자네에게 말을 높일 것이고.”
“……?”
“이건 자네가 좋아하는, 일방적 통보일세.”
케이슨은 자신의 말이 왠지 멋쩍은 모양이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서둘러 말을 끝내더니 마현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고삐를 당겨 앞으로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사람은 좋은데……, 아무리 봐도 재미없는 양반이야.”
마현의 입가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그렇지, 풍아?”
푸히이잉!
풍도 마현의 마음과 같았는지 전과는 달리 갈기를 길게 세우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럼 우리도 갈까? 오랜만에 날뛰어 보자! 이리얏!”
마현도 앞서 달려 나간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뒤를 따라 전력으로 질주했다.
* * *
두두두두두!
적국 테누타 왕국 진영이 갈라지며 한 무리의 기사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하멘 평원에 자욱한 먼지를 만들며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향해 돌진했다.
‘후우.’
아이작은 입술을 살짝 벌리며 그 틈으로 뜨거운 숨결을 천천히 토해냈다. 그러자 몸 안에서 마나가 꿈틀거리며 한 차례 전신을 휘감고 돌았다.
후우우웅!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기분 좋은 울림이 두 손에 움켜쥔 투핸드소드의 검자루에서 느껴졌다.
두근 두근 두근!
적국의 기사단을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힘차게 뛰었다. 그로 인해 뜨거운 피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화염에 휩싸인 것처럼 몸이 뜨거워지자 문득 함성이라도 내지르고 싶어졌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짜릿함이야. 이런 기분이라면 시원하게 한바탕 뛰어놀 수 있겠어.’
꾸욱!
아이작은 투핸드소드의 자루를 꽉 쥐었다.
2년 만에 돌아왔다.
전장으로.
소드마스터가 되어.
얼마 후 하멘 평원에 자욱한 먼지구름이 피워 오르며 적국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이었다.
단장인 히메네스의 호언대로 그들이 나선 모양이다.
“오라!”
아이작은 기사단 후미에 있는 히메네스를 쳐다보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투구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 순간 분명 아이작을 노려보며 조소를 짓고 있었다.
‘훗!’
아이작 역시 그런 히메네스를 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냉랭한 웃음을 머금었다.
“으랴앗!”
호기가 치솟은 아이작은 양발로 군마의 아랫배를 힘껏 걷어차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지이잉!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의 선두에 선 자의 바스타드소드에서 마나가 담겼다.
예전이라면 긴장했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단숨에 뚫는다!’
아이작은 투핸드소드를 옆으로 비스듬히 눕히며 마나 센타에 집약되어 있는 마나를 일시에 팔에 흘려보냈다. 마나는 빠르게 투핸드소드로 스며들었다.
“하압!”
아이작은 일갈을 내지르며 투핸드소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두에서 달려오는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원을 향해 내리그었다.
서걱!
투핸드소드와 바스타드소드 사이에서 터져야 할 쇠붙이의 파음은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날카롭게 베어지는 소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컥!”
스치듯 아이작을 지나쳐간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원의 입에서 짧은 단발마가 터져 나왔다. 그는 달려왔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붉은 피를 흩뿌리며 군마와 함께 허물어졌다.
사방으로 튀는 붉은 핏방울 속에 푸르른 오러가 요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소, 소드마스터?’
후미에서 둘의 부딪힘을 지켜보고 있던 히메네스가 경악하며 눈을 부릅떴다.
분명 카칸은 케이슨 용병기사단 후미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소드마스터 찰튼은 1년 전 케이슨 용병기사단에서 탈퇴했다.
그런 그가 이번 전쟁에 십좌왕의 한 사람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정보를 첩자로 심어둔 바쿠 용병대를 통해 들었을 때는 조금 놀라기는 했다. 하지만 그 정도쯤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지금 부딪히는 케이슨 용병기사단에 소드마스터는 카칸이라는 자 한 명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순식간에 벌어진 결과를 지켜보며 히메네스는 혼란에 빠진 것이다.
갑자기 선두에서 소드마스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혹시 찰튼?’
아니다, 그건 아니었다. 유심히 생각해 본 히메네스는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트로켄 왕국 측에서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흩어지는 십좌왕의 모습을 분명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출전했다.
“으아아악!”
그러는 사이 자신이 데려온 또 다른 기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드마스터의 손에 횡사했다.
“안드리치!”
히메네스가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안드리치의 행동은 그의 말보다 빨랐다. 히메네스가 지시하기도 전에 안드리치는 어느새 말을 몰아 아이작을 막아서고 있었던 것이다.
쾅!
오러와 오러가 부딪히며 대기가 갈기갈기 찢어지며 비명을 질러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국의 소드마스터가 안드리치에 막혀 잠시 주춤한 것이다. 안드리치의 활약으로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다.
‘카칸만 놓치지 않으면 우리가 이긴다!’
히메네스는 어느새 축축해진 손바닥의 땀을 무릎에 닦으며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더욱이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유일한 마법사도 빠졌다.
속이 쓰리지만 이 모든 정보는 자신의 힘이 아닌 미겔이 트로켄 왕국 측에 심어둔 첩자, 즉 세 용병대에 의해 제공된 정보인 것이다.
머릿속에 미겔의 얼굴이 떠오르자 마음이 심란해졌지만 히메네스는 이내 잡념을 털어버리고 싸움에 집중했다. 그에게 있어 이 싸움은 무조건 이겨야 했다. 그래야 꿈꾸던 내일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의 수는 서른.
아니 그사이 둘이 죽었으니 이제 스물여덟이다.
하지만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수는 고작 여섯에 불과하지 않은가. 정상적인 결과라면 도저히 질 리가 없는 것이다.
히메네스는 자신이 카칸만 확실히 막으면 압도적인 수로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몰살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히메네스는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마현의 신형을 좇았다. 여차하면 달려 나가기 위함이었다.
“으아악!”
“크악!”
그런 그의 귓가에 비명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깜작 놀라 전장을 빠르게 둘러본 히메네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냉정해지고자 마음을 다잡아도 한 번 흔들린 눈동자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아이작과 안드리치는 백중지세로 싸우고 있었다. 그들의 접전은 공기마저 갈가리 찢어버리며 주위를 차가운 냉기에 휩싸이게 했다. 그런 두 사람 가운데로 두 명의 케이슨 용병기사단원이 불쑥 튀어나왔다.
착용한 카이샨 메일의 형태로 보아 한 명은 사내였고, 한 명의 여인이었다.
그들은 바로 케이슨과 자브라였다.
히메네스가 놀란 것은 그 둘이 불쑥 튀어나와 검은여우 용병기사단 속으로 겁 없이 뛰어 들어간 것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그들이 뿜어내는 눈부신 오러 때문이었다.
그들이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목숨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 앞에 서 있는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원들은 그저 힘없는 허수아비처럼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허물어져갔다.
“어, 어떻게?”
히메네스의 꽉 막힌 목구멍을 뚫고 나온 소리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나오는 경악성이었다.
* * *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미겔의 눈동자에 핏발이 서렸다.
양 떼들 무리에 뛰어든 사자처럼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을 거침없이 누비는 세 명의 소드마스터.
비록 카이샨 메일로 온몸을 두르고 있었지만 미겔은 그들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케이슨, 자브라.’
빠드득!
미겔의 턱이 틀어지며 이가 갈렸다.
‘너희 두 연놈이 내 앞길을 가로막으려는 것이냐?’
극심한 분노로 눈가가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입언저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결국 누구 하나는 죽어야 끝을 보겠다는 것이냐? 그렇다면 죽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 연놈들이다!’
미겔은 몸을 돌려 마법병단, 정확히는 그들의 수장인 바람, 로쉴드 마탑주인 네이폴에게로 향했다. 마탑주 역시 왜 미겔이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전장의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으니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 주었으면 좋겠소?”
“제가 마법에 대해서 무얼 알겠습니까? 다만…….”
“다만?”
“케이슨 용병기사단, 저것들이 단 한 명도 살아남을 수 없게 처절하게 응징을 했으면 합니다. 네이폴 님, 대단위 공격 마법을 부탁드립니다.”
미겔의 말에 네이폴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향해 대단위 공격마법을 시전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럴 경우 문제는 그들만 정확히 노릴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대단위 공격마법을 펼치면 목표했던 케이슨 용병기사단은 물론이요, 그들과 뒤엉켜 난전을 벌이고 있는 검은여우 용병기사단 역시 횡액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되면…….”
“알고 있습니다.”
“……진심이오?”
네이폴은 미간 사이를 살짝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
“전장에서 허언은 없습니다.”
전장을 쓱 둘러보며 미겔은 차갑게 웃었다.
“뭐 나야 상관이 없지만…….”
네이폴은 겉으로는 미겔을 만류하는 듯했지만 사실 그렇게 하는 편이 그에게도 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