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
25화
모리악 자작이 사라지고 버트런드 공작은 마현과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중앙지휘실로 직접 안내했다.
중앙지휘실은 생각보다 작고 초라했다.
마현과 케이슨 용병기사단이 잠시 자리를 잡고 기다리자 먼저 전장에 합류한 십자왕, 즉 흑풍대가 하나 둘씩 중앙지휘실로 들어왔다. 세 용병대의 대장들도 들어왔다.
마현과 케이슨 용병기사단, 그리고 흑풍대는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행동했다.
마지막으로 트로켄 왕국의 주요 지휘관들도 속속 들어왔다.
어느새 중앙지휘소는 제법 많은 이들로 북적거렸다.
“다들 참석한 듯하니, 작전회의에 앞서 원활한 소통을 위해 간단하게 소개하는 시간을 갖겠소.”
각자의 소개는 트로켄 왕국 쪽 지휘관부터 시작되었다.
『다들 내 말을 조용히 듣기만 하라.』
케이슨 용병기사단이야 미리 마현에게 언질을 받았기에 그들을 알고 있었지만 흑풍대는 아니었다.
빠르게는 삼 일, 늦게는 하루 일찍 전장에 온 까닭에 미겔의 음모를 알지 못했다.
마현은 전음으로 미겔이 꾸민 계략을 흑풍대에게 알려주었다.
『허어, 용병대 중에 질이 안 좋은 놈들이 눈에 띄었는데 감히 우리 뒤통수를 노릴 놈들이란 말씀입니까?』
왕귀진이 입언저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그보다 정확한 수가 파악되지 않았지만 어쌔신의 암습을 조심하라. 소드마스터도 암살할 수 있는 특급 어쌔신이라고 하니 방심은 금물이다. 어쌔신은 가급적 생포하도록.』
『알겠습니다, 주군.』
마현의 명에 흑풍대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복명했다.
그사이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끝났고, 버트런드 공작은 곧바로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이번 전쟁의 승패는 적진과 마주하는 이곳 하멘 평원에서 갈라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본국과 적국 모두 이 하멘 평원으로 모든 전력이 집중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현재 적국의 주요 전력을 보자면…….”
작전회의의 시작은 테누타 왕국의 전력을 알려주는 것부터였다.
그 이유는 트로켄 왕국의 지휘관들이야 테누타 왕국의 전력을 소상히 알고 있었지만, 방금 도착한 마현과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비롯해 흑풍대와 세 용병대의 대장들은 테누타 왕국의 정확한 전력을 알지 못한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알베르 후작을 비롯해 여섯 명의 소드마스터와 그의 직속 기사단, 그리고 검은여우 용병대의 대장인 미겔과 그의 기사단 소속의 두 소드…….”
히메네스와 안드리치가 거론되는 지점에 이르자 버트런드 공작의 얼굴에는 분노가 떠올랐다. 몇몇 지휘관들은 참지 못하고 이를 박박 갈았다.
그만큼 그 둘을 향한 배신감이 컸던 것이다.
“그리고 60명의 마법병단과 그들을 인솔하는 네이폴 마탑주도 경계해야 할 전력입니다.”
버트런드 공작의 생각과 달리 마현과 케이슨 용병기사단은 이미 거기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마법병단입니다.”
버트런드 공작은 드러내놓고 한숨을 내쉬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은 어둡기 이를 데 없었다.
“트로켄 왕실 마법사의 수와 그 수준은 어떻습니까?”
마현의 질문에 지휘관들의 이목이 버트런드 공작의 측면에 앉아 있는 장년의 마법사에게로 쏠렸다.
트로켄 왕실의 수석마법사인 콰지모도였다.
“어렵사리 30명의 마법사로 마법병단을 꾸리기는 했지만 솔직히 역부족이오.”
콰지모도의 안색은 버트런드 공작보다 더 어두웠다.
이 전쟁으로 왕실 마법사 대부분이 죽게 될 것이라 여기기고 있는지라 그의 며칠 전부터 웃음을 잃었다.
“30명의 수준은?”
“본인이 5서클, 4서클의 제자가 셋, 나머지는 3서클과 2서클이오.”
“흠……, 확실히 어려운 상황이군.”
마현의 혼잣말에 트로켄 왕국의 지휘관들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마법병단은 우리가 책임지겠소.”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소이까?”
버트런드 공작은 마지막 희망을 마현에게서 찾고자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본 용병기사단에 6서클 마법사가 있소. 콰지모도 수석마법사.”
“예, 예?”
“6서클 마법사이신 밀러 님과 함께 15분, 딱 15분만 마탑의 마법병단의 이목을 끌어주시오.”
마현의 말에 콰지모도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면…….”
트로켄 왕국의 지휘관들의 모든 이목이 마현에게로 집중되었다.
“케이슨 용병기사단이 마법병단을 보호하는 검은여우 용병대와 그 소속 기사단의 이목을 돌릴 것이오. 그러는 사이 나와 흑풍대가 마법병단을 제거하겠소.”
“흑풍대?”
버트런드 공작과 지휘관들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요.”
왕귀진이었다.
“……?”
“우리가 흑풍대요.”
철용이 그 뒤를 이었다.
지휘관들은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
“십좌왕이 흑풍대라는 소리입니다.”
마지막으로 검세옥이 그들을 이해시켰다.
“헉!”
버트런드 공작은 너무 놀라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그, 그렇다면…….”
버트런드 공작이 손가락으로 흑풍대를 가리켰다.
“우리 열은 원래 하나요.”
너무 놀란 나머지 버트런드 공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짝짝.
마현은 손뼉을 마주쳐 주위를 환기시켰다.
“콰지모도 수석마법사님,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해보겠소. 아니 꼭 하겠소. 헌데…….”
콰지모도는 말꼬리를 살짝 흐렸다.
“하지만 마탑주까지 와 있는 상황이오. 그것이 우리 계획처럼 될는지…….”
“그건 걱정 마시오.”
마현이 콰지모도를 보며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케이슨 용병기사단에는 7서클의 마법사도 있으니까 말이오.”
* * *
하멘 평원에 군대를 주둔시킨 양국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버트런드 총사령관님.”
마현은 드넓은 하멘 평원을 지그시 쳐다보며 그를 불렀다.
“그 어떤 피해가 있어도 전선을 뒤로 물리면 안 됩니다.”
“후우, 알겠소. 어떤 일이 있어도 전선을 유지하겠소.”
버트런드 공작은 확고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밀러 님, 부탁합니다.”
“알겠네.”
마현의 말에 밀러는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떠나 뒤에 대기하고 있는 트로켄 왕국의 마법병단으로 향했다.
“단장.”
“알겠네. 오늘 끈질긴 악연을 지우겠네.”
마현은 고개를 돌려 케이슨 용병기사단원들을 쳐다보았다.
“아이작, 제이든.”
마현은 아이작과 제이든을 조용히 불렀다.
“놈들이 오늘 일을 벌일 수도 있으니 아무도 다치지 않게 둘이 후미를 지켜.”
아이작과 제이든은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흘깃 노려보는 해골, 바투, 붉은늑대 용병대를 곁눈질로 쳐다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둥 둥 둥 둥 둥!
전장의 기운을 고조시키는 북소리가 테누타 왕국 진영에서 먼저 울려 퍼졌다. 거기에 맞춰 각 군단을 상징하는 깃발이 솟아올랐다.
이어 개전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하멘 평원에 울려 퍼졌다.
뿌우우―
순간 주변의 모든 소음이 일시에 사라지며 평원에는 짧은 적막감이 찾아왔다. 누구나 다 알듯, 그 고요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와아아아아!”
엄청난 함성과 함께 테누타 왕국 진영에서 병사들이 새까맣게 뛰쳐나왔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피냄새를 감지한 대지는 역동적으로 자욱한 먼지 구름을 피워 올렸다.
“진격하라! 승리는 우리 것이다!”
테누타 왕국의 진격의 나팔 소리를 이어받아 버트런드 공작도 칼을 뽑아들며 힘껏 소리쳤다.
진격 명령이 떨어지자 트로켄 왕국 진영 곳곳에서 북소리와 고동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수많은 병사들이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오늘은 나 카칸이 부활하는 날이 될 것이다!”
마현은 힘차게 풍이의 고삐를 당겼다.
“가자!”
마현도 질풍처럼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이어 흑풍대가 뒤를 이었고, 그 뒤를 케이슨 용병기사단이 달려 나갔다.
* * *
‘지금쯤 시작되었겠군.’
이베른은 테누타 대 트로켄 전을 떠올렸다.
마탑주들 중에서 유독 욕심이 크고 증오심도 극렬한 네이폴이라면 확실히 매듭을 지을 것이다.
‘오늘로 찜찜함이 완전히 사라지겠군?’
이베른은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스승님.”
그때 그의 연구실 문밖에서 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검은여우 용병대의 그라스 부대장이 스승님을 뵙고자 청하였습니다.”
“그라스 부대장이?”
이베른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놈이 감히 마탑으로 나를 찾아와?’
기분 좋던 감정이 산산이 깨졌다.
그라스와의 관계는 마탑주들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고 다른 이목이 있는데 무작정 그라스를 내칠 수도 없었다.
“집무실로 안내하거라.”
감정 조절이 안 된 이베른의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슬슬 다른 사냥개를 키워야겠어.’
이베른은 이 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그라스를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으며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까지는 무슨 일이냐!”
이베른은 진노한 표정으로 그라스를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그라스는 이베른이 들어오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게 숙였다.
이베른이 분노에 젖어 잠시 방심한 순간, 그라스는 허리를 숙인 채로 급격히 어둠의 마나를 폭사시키며 이베른을 향해 흑마법을 펼쳤다.
“스위트 포이저너스 포그(Sweet poisonous fog)!”
새까만 독무가 한순간 이베른의 몸을 덮쳤다.
“죄송하다는 것을……, 허억!”
이베른은 갑작스러운 그라스의 공격에 헛바람을 들이마시며 심장을 두른 서클을 회전시켜 마나를 끌어올렸다.
“글리터 퓨어러피케이션(Glitter purification)……, 쿨럭!”
이베른은 서둘러 정화 마법을 펼쳤지만 그라스의 암습이 워낙 찰나에 벌어진 터라 중독을 피하지 못하고 피를 토해냈다.
이베른은 독 기운에 어지러움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어, 어떻게……!”
이베른은 그제서야 그라스의 눈이 새카맣게 변해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어둠의 향기와는 조금 달랐지만 분명 그라스의 눈을 뒤덮고 있는 마나는 어둠이었다.
‘카칸!’
그러는 사이 그라스의 손에서 다시금 독무가 뿌려졌다.
“히익!”
이베른은 다시 한 번 정화 마법을 펼쳐 독무를 지우며 허공에 마나를 모았다.
“파이어 스크루(Fire screw), 리터레이트!”
쑤아― 쑤아아앙!
단숨에 만들어진 파이어 스크루는 그라스를 덮쳤다.
7서클 마법사가 펼친 마법임에도 불구하고 그라스는 피하지 않았다.
푹 푹 푹―
그라스의 몸에는 아이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고, 그로 인해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분이 전하시기를…….”
그라스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마치 기계처럼 말을 이었다.
“나는 어둠에서 부활했다. 기다려라, 곧 너의 목을 가지러 가겠노라.”
말을 마친 그라스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것을 보고 이베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자폭 마법이다.
자폭 마법은 시전자가 가진 어둠의 마나와 목숨을 담보로 하는 만큼 그 위력은 본 서클보다 한두 단계가 높다.
“샤이닝 실드(Shining shield)!”
이베른은 이를 악물며 고서클의 샤이닝 실드를 연거푸 펼쳐 자신의 몸을 보호했다.
콰과과과과광!
그의 집무실에서 어둠의 마나로 인해 검게 물든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으으으……, 으아아악! 카칸, 이노옴!”
불기둥 속에서 분노에 찬 이베른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1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