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
23화
수십 명의 늑대왕 용병대원들이 용병길드 본부 1층으로 몰려들어와 강제로 길을 텄다.
‘이럴 때에는 편하긴 하군.’
늑대왕 용병대원들이 길을 만들어준 덕에 왕귀진은 편하게 의뢰창구 앞으로 다가설 수 있었다.
왕귀진을 보자 창구 직원 역시 상당히 긴장한 듯 행동이 딱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테누타 왕국과 트로켄 왕국. 상황은?”
“예, 예? 아! 그, 그게……. 현재 참전 비율이 대략 테누타 왕국이 8, 트로켄 왕국이 2입니다.”
이미 전쟁의 승패를 많은 사람들이 예견하고 있으니, 누가 봐도 당연한 결과다.
“검은여우 용병대는?”
“테누타 왕국입니다.”
“케이슨 용병기사단은?”
“트로켄 왕국입니다.”
“그렇군.”
왕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국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살펴봤을 때, 이 전쟁에서 테누타 왕국이 승리할 확률은 9할 이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켄 왕국으로 용병들이 참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파격적인 의뢰비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당한 액수의 계약금을 선불로 지급한다는 조건도 구미를 당겼다.
돈이 궁핍한 용병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담보로 트로켄 왕국 쪽으로 참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궁해도 목숨과 맞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거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트로켄 왕국 쪽에 참전하는 용병들에겐 실낱같은 기대가 있었다. 케이슨 용병기사단이 트로켄에 참전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그 소식에 용병들은 희망을 갖고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트로켄에 참전하기로 결심했다.
“저…… 가이진 님이라면 여기보단 2층으로…….”
“나는 트로켄 왕국으로 간다.”
왕귀진은 창구직원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자신이 할 말만 툭 던졌다.
“개인용병, A급 아그논. 트로켄 왕국으로 참전을 신청하오.”
왕귀진이 돌아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그논이 창구로 다가가 참전의사를 밝혔다. 이어 수십 명 정도로 알려진 늑대왕 용병대원들이 줄줄이 참전을 신청했다. 그들의 수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았다.
창구직원이 놀란 얼굴로 그 수를 헤아려보니 백 명을 훌쩍 넘어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왕귀진을 따라 트로켄 왕국으로 참전을 신청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불과 이틀 후.
공식적으로 용병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엄밀히 말하자면 권력을 가진 용병계 거물들과 거물 용병대에서 꺼려하는 호칭으로 불리는 자들.
십좌왕.
그들이 속속 용병길드 본부에 나타나 테누타 대 트로켄 전에 참전의사를 밝혔다.
그것도 하나같이 트로켄 왕국으로.
그들이 참전의사를 밝힘으로 해서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 또한 그들을 따라 트로켄 왕국 편으로 참전했다.
테누타 왕국으로 급격히 기울던 승기가 단 이틀 만에 뒤집어진 것이다.
* * *
빠드득.
미겔의 눈에는 핏발이 가득섰다.
“감히 검은여우 용병대의 이름을 무시해?”
그의 뺨에 쉴 새 없이 잔 경련이 일어났다.
“내 이름에서 피냄새가 많이 희석된 모양이야. 이 기회에 싹을 모조리 잘라버려야겠다.”
미겔의 목소리에는 살심이 뚝뚝 흘러내렸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히메네스의 말에 그라스 역시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이번에 검은여우 용병대 전원이 참전한다. 그리고 해골 용병대, 바쿠 용병대, 붉은늑대 용병대의 대장들에게 전갈을 넣어라. 내가 좀 보자고.”
그 이름을 듣고 히메네스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미겔이 거명한 곳은 대륙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힘 있는 용병대들이지만, 모두 하나같이 악명으로 자자한 곳이기도 했다. 걔중에는 악명으로만 따졌을 때 검은여우 용병대를 넘어서는 곳도 있었다.
“그것뿐입니까?”
그라스가 음침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지 않은가, 그라스.”
“후후.”
미겔의 대답에 그라스는 차갑게 웃었다.
“피의 달과 백야 중 어디가 좋겠습니까?”
그라스의 말에 히메네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피의 달과 백야.
이 두 단어는 아주 유명하다.
바로 어쌔신 길드의 이름으로.
대륙에는 무수히 많은 어쌔신 길드가 존재한다.
하나로 통합된 용병길드와 달리 어쌔신 길드는 그들의 특성으로 인해 수십 개의 길드가 있었다.
대부분의 길드가 다 고만고만했지만 피의 달과 백야만은 달랐다.
두 길드는 소드마스터도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는 특급 어쌔신을 가지고 있다고 호언장담했으며, 실례로 몇 차례 증명해 보이기도 했었다.
또한 다른 곳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그 두 어쌔신 길드만큼은 세상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야말로 신비한 베일에 싸인 길드들인 것이다.
“둘 다.”
음침하던 그라스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지출이 만만찮겠군요.”
“단 조건을 달게. 더 많이 죽인 쪽에게 모든 의뢰비를 주겠다고.”
대외적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피의 달과 백야는 오랜 세월 경쟁으로 인해 지금은 견원지간이 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대장의 계략은 제 상상을 뛰어넘는군요. 이럴 때 보면 대장께는 제가 필요 없어 보입니다.”
그 말에 히메네스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히메네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미겔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매우 잘못됐다는 걸 그 역시 요 근래 실감하고 있었다.
외부에 알려진 바대로 미겔은 단지 잔인하고 운이 좋은 자가 아니었다.
그저 운이 좋아 그라스라는 모사를 만나 이 자리까지 온 게 아니었다. 그는 그라스가 깜짝 놀랄 정도로 치밀한 두뇌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런 자신의 참모습을 세상에 완벽에 숨기고 있다는 것 하나만 봐도 미겔의 심계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너무 쉬워도 재미가 없지.’
히메네스는 마음을 다잡고 얼음장 같은 미소를 지었다.
“좋은 미소야.”
미겔의 목소리에 히메네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히메네스 단장.”
“예, 대장.”
“마탑주들을 다시 찾아봐주겠나?”
“……?”
“십여 명 안팎의 마법병단. 고작 그 정도로 될까 싶어서 말일세.”
히메네스는 지금 미겔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라스.”
미겔은 고개를 돌려 그라스를 쳐다보았다.
“도와주게.”
“이런 이런……. 알겠습니다.”
미겔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고, 그라스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둘 사이에서 히메네스만 얼굴을 일그러트릴 뿐이었다.
* * *
“다녀왔습니다, 주군.”
“모두들 건강해 보이는구나.”
길게는 1년 반, 짧게는 1년.
흑풍대의 기도는 한층 예리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숱한 전장을 거치며 실전으로 더욱 기감을 갈고 닦았기 때문이리라.
마현은 그런 흑풍대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그들의 활약상은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어떻게 지내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 만족할 만한 놈들로 거둬들였나?”
“그렇습니다, 주군.”
사실 흑풍대는 다크 나이트들을 흡수하기 위해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장을 돌아다녔던 것이다. 그 결과가 좋은지 모두들 흡족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동안 고생들 했다. 모두 휴식을 취하고, 대주와 부대주는 잠시 나를 따르라. 그리고 세옥이는 단장과 밀러 님에게 집무실로 오시라 전하라.”
마현은 왕귀진과 철용을 데리고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케이슨과 밀러도 집무실로 들어왔다.
“왔다는 소리는 들었네. 건강해 보이는구먼.”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밀러 님.”
왕귀진이 반갑게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가볍게 회포를 푼 뒤 넷은 마현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테누타 대 트로켄 전에서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위용을 만천하에 알릴 생각입니다.”
마현의 말에 케이슨과 밀러는 어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인지 고개를 끄떡였다.
“전에 말씀을 드렸겠지만, 단장.”
마현은 케이슨을 쳐다보았다.
“말하게.”
“이 전쟁에서 검은여우 용병대는 몰락할 것입니다.”
“흠…….”
“그들의 몰락은 내가 아닌, 그리고 흑풍대도 아닌 바로 단장의 손으로 이끌어내셔야 합니다.”
케이슨은 2년 전 전장에서 마현과 주고받았던 말을 떠올리며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죽이든 살려주든 저는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검은여우 용병대는 반드시 몰락시켜야 합니다.”
“알았네. 무슨 말인지…….”
케이슨은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검은여우 용병대가 몰락하는 날, 전장에 참여한 여섯 마탑의 마법병단 또한 몰살할 것입니다. 그때 흑마법사 카칸의 부활을 만천하에 알리며!”
마현의 말에 케이슨의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그것은 밀러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후우.”
마현은 긴장된 듯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흐트러졌던 마음을 가다듬으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단장.”
“…….”
“검은여우 용병대의 몰락, 동시에 여섯 마탑 마법병단의 몰살. 그 이후 저는 케이슨 용병기사단에서 탈퇴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현은 케이슨과 밀러의 얼굴을 직시했다.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제 아래로 거둘 것입니다.”
케이슨과 밀러의 경직된 얼굴에 한층 깊어진 고심이 어리었다.
“물론 그것을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거기에 대해선 일주일 후, 전장으로 가는 날까지 답을 주시면 됩니다. 답이 어떻든 검은여우 용병대의 몰락까지는 함께합니다.”
마현은 말을 끝내고 케이슨을 향해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마치 이것이 상관으로 대하는 마지막 인사라는 듯, 그의 태도는 더없이 공손했다.
* * *
빌더 시 외곽에 위치한 자그만 과일가게 행복과일상.
거리에 인접한 진열대에는 탐스러운 과일이 보기 좋게 놓여 있었다. 그 가게 안에는 볼이 두툼해 후덕한 인상을 풍기는 주인 켈더가 구석의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월급은 만날 쥐꼬리만큼 주면서 일이란 일은 다 시켜요.”
그런 켈더를 흘겨보며 점원이 투덜거리며 마른 수건으로 과일을 깨끗하게 닦고 있었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가게 문턱을 넘어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점원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넙죽 숙였다.
“과일 배달 좀 시키고 싶습니다만…….”
“어디든지 성심성의껏 배달해드리겠습니다.”
점원은 손님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창백한 얼굴에 깡마른 몸을 한 그라스였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라스의 눈에 구석진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켈더가 보였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그라스가 두 번 접힌 종이를 점원에게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손님.”
“대금은 가져오면 그때 치루죠.”
“네, 차질 없이 배달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그라스가 몸을 돌려 과일가게를 나가자 점원의 얼굴에서는 넉살 좋은 웃음기가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점원은 냉혹한 눈빛을 띠며 켈더 앞으로 걸어갔다.
“그라스입니다, 마스터.”
점원이 다가가자 켈더는 언제 꾸벅꾸벅 졸았냐는 듯 슬그머니 눈을 떴다.
켈더는 실눈으로 그라스가 남긴 쪽지를 펼쳤다.
“흠…….”
쪽지에 적힌 내용을 다 읽은 켈더는 팔짱을 끼며 침음했다. 그런 켈더의 입술은 한껏 비틀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