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
22화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네. 내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자네는 그 전장에서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적으로 만날 것이네. 내 소규모지만 믿을 수 있는 아이들로 마법병단을 꾸려 보내주겠네.”
히메네스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감사합니다.”
히메네스는 고개를 숙였다.
‘옳은 판단이었다.’
히메네스는 탄탄하게 펼쳐질 미래를 생각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히메네스를 바라보는 여섯 마탑주의 얼굴에는 언뜻 조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라스와 히메네스는 각기 마차에 올라타는 마탑주를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종종 자리를 갖도록 하세.”
이베른은 히메네스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친근감을 표시한 후 마지막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곧 여섯 대의 마차가 룸살롱 저택을 빠져나갔다.
“후우.”
취기가 살짝 올라 얼굴이 불그스레한 히메네스는 옷깃을 손가락으로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에서는 진한 술 냄새가 풍겼다.
평소의 그라면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꽤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둘이서 술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히메네스는 그라스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친근감이 물씬 풍겨 나왔다.
“저 역시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밀린 업무가 있어서 지금은 용병대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아쉽군.”
“단장님께서는 이왕 발걸음을 하셨으니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와 오붓하게 술 한 잔 나누면서 하룻밤 쉬고 오십시오. 내 마담에게 오늘밤 단장님을 정성껏 모시라고 특별히 당부해 두었습니다.”
그라스는 히메네스가 술자리에서 옆에 두었던 최고급 창기를 꽤나 마음에 들어 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이거 미안해집니다.”
히메네스는 말로는 겸양을 떨었지만 눈빛이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이런 휴식도 얼마 가지 못할 겁니다. 용병기사단이 새로이 재창단식을 가졌으니 며칠 후부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실 겁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정도는 아무 생각하지 마시고 푹 쉬고 오십시오.”
“그렇소? 하하하하, 그럼 부대장님의 말씀대로 오늘 하루 정도는 푹 쉬어보겠소.”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라스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히메네스는 가볍게 손을 들어 화답하며 다시 창기가 기다리고 있는 밀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불쌍한 놈.”
그라스의 얼굴은 조금 전까지 내비치던 친근감이 일시에 사라지며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그라스가 조소를 지으며 몸을 돌리는 순간, 그의 얼굴이 굳어지며 눈이 검은 마기로 뒤덮였다.
“주인님이 부르신다.”
그라스는 망설임 없이 마현이 있는 저택 2층 나세리의 침실로 향했다.
* * *
마현이 앉아 있는 소파 앞에 그라스가 부복해 있었다.
“마법병단이라……, 이베른이 재미있는 일을 벌였군.”
그라스의 보고에 마현은 턱을 쓰다듬으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좀 더 판을 키우면 더욱 재미있어 지겠어.”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마현은 이윽고 그라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라스.”
“하명하시옵소서,”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을 테누타 왕국으로 파견하라.”
“알겠습니다.”
그라스는 더욱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흑풍대를 불러들일 시간이 되었군.’
* * *
‘찜찜해.’
이베른은 뒷목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분 나쁜 감정에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오늘 특별히 이상한 것은 없었다.
아니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하나 있었다.
바로 그라스였다.
행동이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을 은연중에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히메네스와 함께 있기에 그런가 보다고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찜찜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분명 뭔가가 있어.’
이베른은 스스로 육감이 뛰어나다고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찜찜함 뒤에는 분명 자신을 위협하는 일이 일어나곤 했었다.
“멈춰라, 지금 스크헤로 돌아가자!”
이베른의 짧은 명령에 마차는 길을 돌려 다시 스크헤 룸살롱을 향해 달렸다.
“움움움.”
잠시 후 혀가 잘려 말을 할 수 없는 마부가 마차를 세웠다.
“무슨 일이냐?”
이베른은 창문을 열고 마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마부가 손가락으로 길 건너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스크헤 룸살롱에서 막 나와서 용병대로 돌아가는 그라스가 보였다.
“불러오너라.”
“움움.”
마부는 마차에서 내려 허리를 깊게 숙인 후 그라스를 향해 달려갔다.
“으윽, 머리야.”
그라스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양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술도 그리 많이 먹지 않았고, 특별히 이베른을 향해 불미스런 생각도 가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컨디션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즉, 이런 두통이 올 일이 없는 것이다.
‘뭔가 기억이 잘린 것 같은데……, 큭!’
그라스는 기분 나쁜 두통에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음?’
그라스는 자신을 가로막는 그림자에 눈매를 찌푸리며 암암리에 마기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이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이베른의 마부였다.
그라스는 벙어리 마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 사이로 이베른이 손짓으로 자신을 부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라스는 마부에게 알았다는 뜻으로 어깨를 툭 쳐주고는 마차로 가까이 다가갔다.
“타거라.”
“예.”
남들의 눈에 띄어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의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구나.”
“죄송합니다, 주인님. 미천한 종이 두통이 있어서…….”
이베른은 그 말에 눈매를 가늘게 만들었다.
‘두통이라…….’
이베른은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그라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염려와는 달리 그라스에게서 자신이 심어놓은 금제에 이상은 없다는 것을 이베른은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의 기억을 고스란히 복제해 들여다보는 것이지만, 그럴 경우 그라스는 정신이 황폐하게 변해 폐인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폐기 처분하기에는 아직은 일렀다. 좀 더 써먹어야 할 데가 많았다.
‘두통이라, 두통이라…….’
이베른은 무거운 침음을 속으로 삼켰다.
‘내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한 것인가?’
“미천한 종을 부르신 이유가…….”
두통에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그라스를 보고 있자니 자신의 머리도 아파지는 것 같았다. 이상하리만큼 불쾌감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아니다, 그만 가보거라.”
이베른은 약간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 * *
기어이 또다시 전쟁이 터졌다.
몬테팔코 왕국과 브루넬로 왕국의 전쟁을 끝으로 한동안 잠잠하던 대륙에 다시 혈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혈풍을 일으킨 주체는 테누타 왕국.
테누타 왕국은 두 명의 소드마스터인 히메네스와 안드리치의 소재가 파악되자마자 가차 없이 트로켄 왕국을 향해 검을 뽑아들었다.
특히나 쉬라즈 왕국과의 전쟁이 끝난 직후라 시기도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간신히 평화를 유지하던 트로켄 왕국은 피바람 앞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 같은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장의 기운을 실은 바람은 빌더 시에게까지 불어닥쳤다.
그로 인해 용병길드 본부 1층은 그 전쟁에 참여하고자 하는 용병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자박 자박 자박.
시장통이나 다름없는 용병길드 본부 1층에 난데없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소음에 묻힐 법도 하건만 이상하게도 그 발자국 소리는 뚜렷하게 1층 구석구석까지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당연히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 1층 문 쪽으로 모든 이목이 쏠렸다.
줄조차 제대로 서지 않고 몰려와 있는 용병들을 보며 문을 열고 들어선 민둥머리 사내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용병들은 숨조차 죽이고 그를 주시했다.
민둥머리 사내가 다시 한 걸음 내딛자 그 앞에 서 있던 용병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며 길을 만들었다.
그에게서 자연스레 풍기는 맹수와도 같은 거친 기운 때문이었다.
“저, 저자는? 아니 저분은?”
인상이 험악한 용병 하나가 민둥머리 사내를 알아보고 탄성을 터트렸다.
“느, 늑대왕 가이진이다!”
가이진, 그러니까 왕귀진의 얼굴을 알고 있는 다른 용병이 다시 크게 외쳤다.
그의 이름은 무겁다.
얼마 전까지 용병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열 명의 신진 소드마스터 중 한 명이었으니까.
지난 1년 동안 약간의 시차를 두고 각지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들 소드마스터들을 일컬어 용병들은 열 명의 왕, 십좌왕이라 불렀다.
용병길드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왕귀진은 그 십좌왕 중 수좌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용병들은 왕귀진이 냉혹하게 전장을 피로 물들이며 쌓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용병들이 두려워하면서도 흠모하는 이유는 그의 무력이 용병들의 입을 거치면서 하나의 전설적인 무용담이 되어 널리 퍼진 까닭이었다.
그는 항상 홀로 움직였고, 전장이 아니면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용병은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어 저마다 발뒤꿈치를 들고 그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했다.
두려움 때문에 반경 1미터 안으로 접근하는 자는 없었지만 그 주위로는 용병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왕귀진이 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앞을 둘러싸고 있던 용병들 또한 뒷걸음질을 쳤지만 왕귀진의 주위로 만들어진 둥근 공간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왕귀진 앞에 서 있던 용병들 역시 다른 용병들이 만들어낸 벽에 부딪혀 꼼짝달싹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비켜!”
왕귀진이 나직하게 으름장을 내뱉었다.
“히익!”
살벌함이 담긴 왕귀진의 호통에 그의 앞에 있던 용병들은 기겁을 하며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뒤에 진을 치고 있는 용병들이 만들어낸 벽에 의해 몸을 빼낼 수도 없었다. 결국 힘만 쓰다 몹시 지쳐버린 파리한 얼굴로 왕귀진의 눈치를 살피며 몸만 바르르 떨뿐이었다.
그때였다.
“모두 물러나! 늑대왕께서 물러나라신다!”
왕귀진의 뒤에서 한 무리의 용병들이 우악스런 힘으로 길을 터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가지각색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모두들 가슴에는 한 마리의 늑대가 새겨져 있었다.
“가이진 님. 잠시만 뒤로 물러나 있으십시오.”
그는 늑대왕의 용병대를 이끌고 있는 부대장 아그논이었다.
늑대왕 용병대는 특이한 용병대였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늑대왕 용병대의 대원이라고 외부적으로 선언하긴 했지만 엄밀히 따져 그들은 정식 용병대가 아니었다. 왕귀진을 추종하는 열혈 용병들이 자의적으로 모여 결성한 일종의 친위단체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개인용병들도 있었고, 다른 용병대에 가입되어 있는 자도 있었다. 또 그들 중에는 소규모 용병대가 늑대왕 용병대에 가입한 곳도 있었다.
늑대왕 용병대의 특징은 용병대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늑대왕 용병대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자는 부대장 아그논이었다.
용병대장이 없는 이유는 왕귀진에 대한 존경과 흠모 때문이었다. 다들 마음속으로 그를 진정한 대장으로 섬기고 있었기에 그 자리를 비워둔 것이다.
그것은 늑대왕 용병대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십좌왕들 또한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이와 비슷한 친위단체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