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
21화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참석이 알려지자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의 창단식장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두두두두두!
은빛 카이샨 메일을 온몸에 두른 한 기사가 남부광장 외각에서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모습을 드러냈다.
챙!
후우우웅!
뽑아든 검에서 푸른 마나가 위용을 드러냈다.
“하압!”
기사는 축대 앞에 세워진 돌기둥을 단칼에 베어 넘겼다.
이어 다른 기사가 말을 몰고 나와 마나를 뽐내며 반으로 잘린 돌기둥 옆에 세워져 있는 또 다른 돌기둥을 베었다.
그렇게 순차적으로 스물아홉 명의 용병기사단원들이 총 스물아홉 개의 돌기둥을 반으로 자른 후 축대 앞에 오와 열을 맞춰 자리를 잡았다.
“허허허. 이거 그 여느 왕국의 정규기사단보다도 훌륭한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확실히 검은여우 용병대는 대륙 최고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용병기사단이 저리 용맹하지 않습니까!”
카스텔로 연방국 제후들의 사신으로 온 보좌관이나 측근들은 하나같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용병기사단이 저 정도이니 단장과 부단장이 누구인지 더더욱 궁금해집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오는 칭찬에 미겔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인사에 일일이 웃음으로 화답하는 여유까지 보여 주었다.
“충!”
그때 좌중의 환호를 압도하는 우렁찬 기사들의 함성이 남부광장을 쩌렁 울렸다.
절도 있게 검을 들어 올린 그들의 모습은 마치 왕국의 정규 기사단이 사열을 받는 것처럼 장중했다.
잠시 후 사람들이 기대감을 가지고 몹시 기다렸던 인물들이 나타났다. 카이샨 갑옷을 착용한 두 사내가 위풍당당하게 축대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의 한층 진일보한 무력에 놀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두 사내의 등장에 한순간 사라졌다.
두 사내는 미겔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 축대 앞 단상에 올라섰다.
“단장, 히메네스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남부광장에 울려 퍼졌다.
아주 짧은 소개였다.
하지만 그보다 그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소개말도 없을 것이다.
“히메네스? 아앗!”
“히, 히메네스면…… 트로켄 왕국의 소드마스터?”
조용하던 남부광장에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크크크! 부단장, 안드리치다.”
술렁거림은 비단 남부광장에 모인 인파들 속에서만 흘러나온 것이 아니었다.
귀빈석에서도 한동안 술렁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광장과 귀빈석에서 일어난 소요를 히메네스는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은 가장 먼저…….”
히메네스는 몸을 틀어 귀빈석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꺾을 것이다.”
“……!”
그 순간 광장과 귀빈석의 술렁거림이 일시에 사라졌다.
마현과 히메네스의 눈이 마주쳤다.
히메네스는 보란 듯이 하얀 이를 드러냈다.
그것을 보고 남부광장에 운집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선전포고다!”
“대륙 제일의 용병기사단을 가리는 선전포고다!”
화산이 폭발을 하듯 뜨거운 함성이 곳곳에서 터지며 남부광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 * *
“마탑주들이 나를 찾는다……고 했습니까?”
창단식이 끝나고 귀빈들과의 인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때쯤 그라스가 히메네스에게 다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라스의 전언에 히메네스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라스는 히메네스의 눈을 응시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히메네스는 고개를 살짝 돌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귀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미겔을 쳐다보았다.
“대장님께서는 모르시는 일입니다.”
그라스의 목소리는 더욱 은밀해졌다.
그 말에 히메네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재미있군. 정말 그대는 재미있는 사람이오.”
히메네스는 그라스를 보며 메마른 웃음을 머금었다.
“만나 보시렵니까?”
“그 말은 곧 만나라는 뜻?”
“뭐…… 결정은 제 몫이 아닙니다.”
그라스는 애매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이번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히메네스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라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라스가 다른 누구도 아닌 대장 미겔조차 모르는 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히메네스는 또 한 번 놀랐다. 그것도 대륙의 정세를 좌지우지한다고 알려진 마탑주라는 끈을 말이다.
‘무슨 꿍꿍일까?’
그 순간 히메네스의 머릿속에 제일 처음 든 의문은 그라스의 의도였다.
‘마탑주들이라…….’
두 번째로 든 의문은 일면식도 없는 자신을 왜 마탑주들이 찾느냐였다.
여러 의문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사실이 불쾌했지만 히메네스로서는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나겠소.”
그래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딱딱해져 있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그라스가 먼저 앞장을 섰고, 그런 그라스의 등을 노려보며 히메네스가 뒤따랐다.
시청을 중심으로 남부광장 쪽으로 뻗은 번화가 끄트머리에는 아담하지만 제법 운치 있는 저택이 하나 있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중소형 저택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간판도 걸리지 않은 고급 룸살롱(Room salon)이었다.
그곳은 돈이 있다고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니 그 전에 인맥조차 없다면 아예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알 수 없는 은밀한 곳이었다.
그라스는 히메네스를 대동한 채 그 룸살롱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안으로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마현이 그 저택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시오?”
굳게 닫힌 정문 중앙에 자그만 공간이 열리며 사내가 물어왔다. 그는 눈만 빠금히 드러낸 채 마현의 몸을 재빠르게 살폈고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마현의 눈동자에서 마기가 폭사되면서 사내의 눈동자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사내의 눈동자가 마기에 의해 검게 물들었다가 잠시 뒤 제 색을 되찾았다.
철컹, 끼익.
철문 뒤에서 빗장이 풀어지는 소리와 함께 닫혀 있던 정문이 살짝 열렸다.
마현이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정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마담을 불러오겠습니다.”
눈만 봤을 때는 몰랐지만 정문을 지키고 있던 사내는 얼굴이 상당히 험상궂었고 몸은 근육질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 사내가 어울리지 않게 공손하게 마현에게 허리를 숙인 후 저택 안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대체 누가 왔기에 이렇게 호들갑이냐!”
잠시 후 한 중년의 미부인이 사내를 향해 역정을 내며 저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미부인은 마현이 정문 밖이 아니라 안에서 기다리고 있자 한 차례 사내를 매섭게 노려본 후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조금 전 사내를 힐책할 때의 그 사납던 눈초리는 봄눈 녹듯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미부인의 얼굴은 어느새 사근사근한 눈웃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누구…….”
미부인이 말을 거는 것과 동시에 마현은 마기를 끌어올려 섭혼술을 펼쳤다.
사내와 마찬가지로 미부인의 눈동자도 검게 물들었다가 잠시 후 제 색을 찾았다.
“아늑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비밀 룸살롱, 스크헤 룸살롱의 마담인 나세리는 마현을 저택 2층에 위치한 그녀의 침실로 안내했다. 마현이 다른 이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마탑주들이 와 있나?”
“조금 전 미천한 종이 그라스와 히메네스를 그들에게 안내했습니다, 주인님.”
마현은 나세리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끝나면 그라스에게 나를 찾아오라 전하라.”
“알겠습니다, 주인님.”
“나가보도록.”
나세리는 허리를 깊게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침실을 빠져나갔다.
히메네스는 축축한 손바닥을 남모르게 바지자락에 닦았다.
그저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 마탑주들이 이토록 자신을 압박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그였다.
‘후우.’
긴장감에 자꾸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큰 숨으로 다잡으며 히메네스는 마탑주들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과연 트로켄 왕국의 살모사라는 이름이 허명은 아니었군.”
이베른은 자신의 눈을 직시하는 히메네스를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사전에 약속도 없이 이렇게 무조건 오라고 해서 미안하게 되었네.”
이베른의 하대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만만찮은 이들이었다.
‘잘못하면 잡아먹히겠군.’
히메네스는 축축하게 젖은 손을 움켜잡으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웃음이 그라스와 참으로 닮았어.”
이베른의 말에 히메네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래서 자네를 부른 것이야.”
“실례지만 그라스 부대장과는 어떤 사이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히메네스는 눈매를 가늘게 만들면서 물었다.
“굳이 그에 적합한 말을 찾는다면……, 공생관계라고 하면 좋겠군.”
“공생관계라…….”
히메네스는 그 말을 중얼거리며 그라스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그대를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히메네스는 이베른의 말이 이어지자 그라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마탑주들을 쳐다보았다.
“검은여우 용병기사단 재창단식에서 한 말 때문이야.”
“……?”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꺾는다고 했지?”
이베른의 질문에 히메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소리다.
히메네스는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동시에 검은여우 용병대를 자신의 수중에 넣기 위한 가장 첫 걸음으로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점찍었었다.
“그렇습니다.”
“내 히메네스 경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은데…….”
이베른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히메네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조건은 무엇입니까?”
“조건이라…….”
이베른은 의자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꼬리를 흐렸다.
“카칸이라는 자를 반드시 죽여줄 것. 그것뿐일세.”
히메네스는 이베른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단지 그것뿐이라고?’
히메네스는 아닐 것이라 여겼다.
“우리는 그 이름이 싫네.”
히메네스의 표정을 살피며 조화, 스플린의 마탑주 벨로가 말했다.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히메네스는 언뜻 단편적인 지식 하나가 떠올랐다.
“하지만 조건이 너무 약하군요.”
“젊은 사람이 의심이 많군.”
벨로의 말에 히메네스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좀 더 크게 보게. 앞으로 살면서 서로서로 도움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보네.”
“서로서로 도움이라…….”
‘공생관계.’
히메네스는 그라스를 쳐다보았다.
‘한 배를 탄다?’
나쁘지 않다.
더욱이 카스텔로 연방국이나 검은여우 용병대 내에서 현재 자신의 기반은 매우 약했다. 하지만 이들의 도움이라면 생각보다 빠르게 자신의 기반을 다지고 원하는 바를 쟁취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내줄 것은 내주고 얻을 것은 얻으면 그만이다.
“좋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위험 부담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히메네스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라스.”
“예, 이베른 님.”
“히메네스 경을 위해 좀 더 힘을 써주게.”
“그리하겠습니다.”
이베른은 그라스를 향해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히메네스에게 시선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