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
20화
“알겠습니다. 그리 알고 슬슬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알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알랜 부장.”
마현이 돌아서는 알랜을 잠시 불러 세웠다.
“검은여우 용병기사단, 그 창단식말이오.”
“가 보시려고요?”
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길드 본부 뒤쪽에 보면 빌드 시 남부광장이 있습니다. 오후 2시에 대대적으로 창단식을 연다고 합니다. 길드에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마탑주들도 참석한다고 하니 제법 볼거리가 있을 듯합니다.”
“남부광장이라……, 고맙소.”
“그러시다면 제가 자리를 만들어볼까요?”
“만들어줄 수 있겠소?”
마현의 질문에 알랜이 어깨를 쫙 폈다.
“원하신다면 없는 자리도 만들어야죠.”
마현이 케이슨을 쳐다보았다.
근 5년 만에 직접 미겔을 대면하는 자리가 만들어진다고 하니 케이슨의 얼굴에는 순간 긴장감이 어렸다.
“이참에 인사를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요, 케이슨. 가서 멋지게 인사 한 번 나누고 와요.”
자브라가 상기된 얼굴로 거들었다.
케이슨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마현은 고개를 돌려 알랜을 쳐다보았다.
“나와 케이슨 대장. 이렇데 두 자리 부탁하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후에 벤디스를 보내겠습니다.”
알랜은 허리를 숙이고는 용병길드 본부로 돌아갔다.
* * *
빌더 시청과 용병길드 본부 사이에 위치한 남부광장.
비교적 한산한 남부광장에 오늘은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눈이 향한 곳에는 축대가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에 화려한 단상과 귀빈석 등이 만들어져 있었다.
잠시 후에 검은여우 용병대의 기사단 재창설식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아니었다.
비록 야심차게 만들었던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이 케이슨 용병기사단에게 굴욕에 가까운 망신을 당했다고 해도 검은여우 용병대는 대륙 제일의 용병대였다.
그런 용병대가 아무 이유 없이 다시 기사단을 창설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검은여우 용병대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그만큼 무겁다.
다소 지나치다고 느껴질 정도로 화려하게 창단식을 여는 것이라면 필시 케이슨 용병기사단과 다시 마주쳐도 뒤지지 않을 기사단을 구성했다는 뜻이리라.
문제는 새로운 기사단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없다는 것이다. 그 점이 사람들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검은여우 용병대는 이번에 얼마나 대단한 수를 내놓을까.
삼삼오오 모인 이들은 저마다 새로운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의 구성을 두고 온갖 추측을 늘어놓으며 열심히 갑을박론을 벌였다.
군중들의 그런 소란을 들으며 마현과 케이슨은 벤디스를 따라 남부광장으로 들어섰다.
벤디스는 마현과 케이슨을 복잡한 곳에서 조금 벗어난 축대 뒤편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벌써 알랜이 먼저 도착해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위에 자리를 만들어놓았습니다.”
벤디스가 돌아가고 알랜은 축대 위에 지어진 귀빈석으로 둘을 안내했다.
그다지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시간이라 귀빈석에는 듬성듬성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마현과 케이슨이 모습을 드러내자 귀빈석 내에서 약간의 수군거림이 일어났다. 하지만 알랜이 나서서 소개를 시켜주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굳이 안면을 익힐 만한 위인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고 조금 시간이 흘렀다.
그때 귀빈석 뒤쪽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마현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상당한 양의 마나가 느껴진 것이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느낌의 마나들.
마현의 입술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아니나 다를까, 약간의 소음과 함께 한 무리의 마법사들이 축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섯 마탑주와 체스와프를 대신해 대장장이, 샤토 마탑의 새로운 마탑주가 된 게오르게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앗, 마탑주들이다!”
“어디 어디? 정말이네. 마탑주들이 참석한다는 소문이 사실일 줄이야.”
웅성거리던 소음이 그들의 등장으로 한층 커졌다.
마탑주들은 각기 한 명씩의 제자들을 이끌고 귀빈석 중에서도 가장 상석인 앞줄로 향했다. 그때 앞서가던 이베른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로 인해 다른 마탑주들도 걸음을 멈춰야 했다.
이베른은 마현과 케이슨, 그리고 알랜이 앉아 있는 곳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뒤늦게 알랜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용병길드의 케이슨 용병기사단 전담부장으로 있는 알랜이라고 합니다.”
그의 소개에 이베른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당연히 이베른의 시선이 마현과 케이슨에게로 향했다.
“명성이 자자한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소.”
“케이슨이오.”
케이슨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현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고 곧 이베른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아주 느렸다. 느리게, 느리게 이베른 앞으로 다가간 마현은 미묘한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췄다.
불쾌하다고 여기기에는 조금 거리가 있었고, 그렇다고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였다.
이베른의 눈썹이 문득 일그러졌다.
마현은 그런 그를 보며 앞으로 몸을 살짝 숙였다.
그 모습에 이베른은 빠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카칸입니다.”
예의 바른 정중한 인사였다.
자신에게 한 걸음 더 다가오는 줄 알고 뒤로 물러난 이베른의 표정은 딱딱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노련하게 자신의 표정을 수습하며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무나도 정중한 인사에 이베른은 조금 전에 느꼈던 미묘한 불쾌감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냥 지나가는 투로 불쾌감을 드러냈다가는 남들에게 옹졸하게 비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베른이라고 하네.”
이베른은 은근히 눈매를 가늘게 만들며 마현을 살폈다.
그 어디에도 과거 카칸의 흔적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마현은 다른 마탑주들과도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그럼.”
그러나 끝까지 정중한 모습으로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마현의 뒷모습에서 이베른은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분명 그가 알고 있는 카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찜찜함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뭐 하시는 겐가? 어서 자리에 앉지 않고?”
“앉아야지.”
카밀로의 말에 이베른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카칸이 저자였군.”
자리에 앉자 카밀로가 바투 다가와 속삭였다.
그 역시 이베른 못지않게 마현을 눈여겨본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현에 대해 가장 먼저 의심을 품은 자가 바로 카밀로였었다.
“괜한 기우였어.”
카밀로의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찜찜한 자야.”
이베른은 눈매를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서 없앨 생각인가?”
카밀로는 뒤쪽 사선으로 앉아 있는 마현을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그때 카밀로의 눈과 마현의 눈이 마주쳤다.
마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이자 카밀로도 따라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런 생각은 비단 나뿐만 하는 게 아닌 거 같은데?”
이베른의 말대로 네이폴에게서 위험한 냄새가 풀풀 풍겼다.
분명 다른 사람이라는 걸 네이폴도 확인했겠지만 카칸이라는 이름만으로 마음이 상하고 적개심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그라스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굳이 따로 손을 쓰지는 않을 생각일세.”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에 카밀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현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이제 마현의 존재는 카밀로에게 있어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다섯 마탑주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마현의 얼굴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갑게 번뜩이고 있음을 케이슨을 알아차렸다.
“자네, 괜찮나?”
케이슨이 목소리를 낮춰 마현에게 물었다.
“나쁠 건 또 무어가 있겠습니까?”
마현은 그들에게서 눈을 떼고 케이슨을 쳐다보았다.
“내 생각에는 조금 경솔했던 것 같네.”
“상관없습니다. 그들이 지금 알았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긴, 자네는 하늘을 뒤집어서라도 원하는 바를 얻을 터이니……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군.”
그러는 사이 귀빈석은 빈자리 하나 없이 가득 찼고, 이어 축대 양끝에서 나팔수들이 나와 나팔을 불었다.
빰빠라 빠암―
그 나팔 소리에 맞춰 축대 아래에서 검은여우 용병대의 대장 미겔과 부대장 그라스, 그리고 각 조장들이 축대 위로 올라왔다.
미겔과 그라스는 당연히 귀빈석 중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마탑주들이 있는 자리로 먼저 다가갔다.
“귀한 시간을 내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겔은 한껏 들뜬 얼굴로 마탑주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찾아오라.”
“알겠습니다.”
이베른은 인사를 건네는 그라스에게 나직하게 명을 내렸고, 그라스 역시 남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명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귀빈석 맨 앞줄에 앉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미겔과 그라스는 그 뒷줄부터는 눈으로 인사를 나눴다.
잠시 후 미겔과 케이슨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미겔의 인상이 굳어지며 뺨이 씰룩거렸다.
눈에 띄게 달라진 미겔의 표정을 보고 귀빈석에 앉아 있던 이들의 시선이 케이슨과 마현에게로 모인 것은 당연한 일.
“케이슨 용병기사단이다!”
“정말? 정말 케이슨 용병기사단이 이곳에 왔단 말인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축대 앞에 모인 인파들 속에서 술렁거림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잘 지냈나, 미겔?”
케이슨이 굳은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자브라는 같이 안 왔나 보지?”
“같이 안 왔네.”
“…….”
“……!”
짧은 침묵을 털어내며 케이슨이 마현을 소개했다.
“소개하지, 우리 용병기사단의 부단장 카칸일세.”
미겔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카칸이오.”
마현은 고개만 살짝 까딱거렸다.
그 모습에 미겔의 눈두덩이 파르르 떨렸다.
“훗!”
하지만 이내 미겔은 가소롭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미겔은 마현의 인사를 무시하고 케이슨을 쳐다보았다.
“그냥 전처럼 눈에 띄지 않고 살았으면 좋았을 걸.”
미겔의 목소리에는 강한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답도 듣지 않고 미겔이 먼저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앉아 버렸다. 홀로 남은 그라스는 마현과 잠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이내 몸을 돌려 미겔을 따라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많이 컸군, 케이슨. 감히 이 자리에 찾아오고 말이야!”
의자 팔걸이를 움켜쥔 미겔의 손아귀에는 힘이 바싹 들어갔다.
“이 기회에 남은 정마저 잘라 버리겠다. 그래, 죽여주마!”
미겔의 눈은 지독한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런 미겔과는 달리 옆에 앉아 있는 그라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동자가 먹물이 가득 찬 것처럼 순간 검게 변했다가 다시 제 색을 찾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