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295화 (295/351)

# 295

19화

“오랜만입니다, 히메네스 백작님.”

“훗!”

히메네스 백작은 눈동자만 위로 올려 그라스를 쳐다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한 방 제대로 맞았군.”

그렇다고 해서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무슨 뜻인지…….”

그라스는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히메네스 백작 앞에 앉았다.

“그런데 어떻게 한 거요?”

히메네스 백작은 눈동자로 죽은 공작을 조용히 가리켰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라스의 음산한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이런 실례가 있나. 밑천을 내보이라고 그런 것인가?”

히메네스 백작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차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왠지 그라스의 웃음과 닮아 보였다.

“꼭 그대를 내 밑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금 드는군.”

“검은여우 용병대에 들어오시면 뜻대로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건가?”

히메네스 백작은 눈동자만 돌려 커튼을 뜯어 대충 피를 닦는 안드리치 백작을 흘깃 쳐다보았다.

“알아도 별로 상관하지 않을 위인이기는 하지만 일단은 눈을 감아주겠소.”

히메네스 백작은 안드리치 백작을 보며 살짝 비웃었다.

“못 볼꼴을 보여드린 것 같군.”

피를 뒤집어쓴 안드리치 백작이 히메네스 백작 옆으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안 그래도 트로켄 왕국으로 들어오면서 안 좋은 소문을 들었는데…….”

그라스는 말꼬리를 슬쩍 흐렸다.

트로켄 왕국에는 모두가 쉬쉬 하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안드리치 백작과 관련된 추문이었다.

그에 관한 좋지 않은 소문이 워낙 많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지만, 그중 가장 큰 추문은 1년 전쯤 나돌았던 왕비와의 염문설이었다.

그리고 겨우 그 추문이 가라앉나 싶을 때, 그러니까 지금 트로켄 왕국의 공작부인과의 염문설이 또다시 전 왕국을 휩쓴 것이다.

그 소문은 사실이었다.

소문이라는 것이 대게 부풀려지게 마련이지만 이번의 염문설은 사실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였었다.

“아무리 그래도 참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라스는 짐짓 검정이 담긴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 그 소리에 히메네스 백작이 실소를 터트렸다.

“나도 참으려고 했지. 아 그런데 저 미친 늙은이가 오자마자 다짜고짜 검을 뽑아들을 줄 누가 알았겠나?”

안드리치 백작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자기 성질대로 일단 공작을 단칼에 죽여 버린 것까지는 좋았지만, 막상 일을 저지르고 보니 뒷일을 어찌 수습할까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라스는 정말 진심으로 그가 걱정된다는 듯 간곡한 어조로 물었다.

“몰라, 수틀리면 다 죽여 버리지 뭐. 그런데 어인 일이오? 온다는 기별을 받기는 했소만.”

“이거 참, 이런 시기에 더욱 말씀을 드리기가…….”

그라스는 안드리치 백작의 눈치를 살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라스 님도 나를 짜증나게 할 참이오?”

“그게…….”

그라스는 다시 한 번 말끝을 흐렸다.

“안드리치. 왜 찾아왔는지 몰라? 좀 생각 좀 하고 살아라.”

“그딴 건 너나 해. 나는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 그니까 찾아온 이유가 뭐야?”

안드리치는 눈을 부라렸다.

“스카우트 이야기다.”

“스카우트?”

답답하다는 듯 히메네스가 말해주자 안드리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드리치는 나름 생각을 하는 듯 눈동자를 연신 굴렸지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너는 어떻게 할 거냐?”

“정말 네놈이 그런 머리로 어떻게 소드마스터에 올랐는지 모르겠다.”

히메네스는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야 조건만 맞으면.”

‘조건’이라는 말에 그라스는 하얀 이를 드러냈다.

“이거, 잠시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늑대 소굴에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늑대를 모시는 것보다야 호랑이가 더 낫지 않을까 싶소.”

“그 위세를 빌려주시렵니까?”

“빌려주고 말 것도 없을 것 같아 보이오만?”

그라스는 입맛을 살짝 다셨다.

히메네스는 야심으로 똘똘 뭉친 자였다.

이처럼 야심이 큰 자가 약소국인 트로켄 왕국을 이제껏 떠나지 않고 있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하기야 그런 야심가이기에 아무렇지 않게 조국을 버릴 수 있는 마음도 먹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이런 대화도 나눌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적극적인 협조는 어렵습니다. 제가 비록 못난 놈이지만 배신은 좀…….”

그라스의 변명에 히메네스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이제 와서 혼자 고고한 척 하시겠다?”

“대신 모른 척 하겠습니다.”

“즉, 원하는 걸 내 손으로 얻어라?”

히메네스의 물음에 그라스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럼 조건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내 수하들을 데리고 갈 것이오. 그리고 내 입맛대로 기사단을 다시 꾸릴 것이오.”

“어차피 지금 기사단을 그대로 유지하기 힘든 참이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여하튼 간다는 소리지?”

안드리치의 물음에 히메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말한 조건, 기억하지?”

“아무렴요. 원하는 여자는 누구든 구해드리겠습니다.”

“좋았어. 읏차!”

안드리치는 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났다.

“어디 가려고?”

히메네스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알면서 왜 묻나?”

안드리치의 반문에 히메네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어디를 가는지 눈치를 챘기 때문이다. 아마도 공작의 부인을 데리고 트로켄 왕국을 떠날 심사인 모양이었다.

전이라면 좋든 싫든 말렸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애국심도 없는 트로켄 왕국을 떠나는 이 마당에 굳이 말릴 필요성도 못 느꼈다.

“알았어. 대신 크게 사고만 치지 마.”

“걱정 말라고. 내 금방 다녀오지.”

안드리치는 콧노래를 부르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럼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

히메네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여우 용병대장 자리라.’

작위가 백작이라도 다 같은 백작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검의 최강자인 소드마스터라고 해서 다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백작 작위에 소드마스터이면 뭐하는가?

테누타 왕국과 몬테팔코 왕국, 그들과 허울만 좋은 동등한 외교?

빚 좋은 개살구요, 웃기는 소리다.

두 왕국의 백작에게 번번이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이 트로켄 왕국에서의 백작의 지위였다.

전장에서 동등한 입장?

그것도 웃기는 소리다.

왕국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명분 때문에 전장에는 나가보지도 못한다. 그렇게 구차하게 명맥을 이어가려는 트로켄 왕국의 국왕 자리보다야 차라리 검은여우 용병대장 자리가 훨씬 낫다.

강대국으로 대변되는 테누타 왕국이나 몬테팔코 왕국으로 가면 적어도 후작 대우를 받는다.

이후 검은여우 용병대를 이용해 카스텔로 연방국에서 한 곳을 집어삼킨다면 자신만의 세상을 가지게 되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히메네스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애국?

조국?

‘그런 건 개에게나 줘 버려라! 나는 날고 싶다! 날아서 이 땅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싶단 말이다!’

“으하하하하!”

그 순간 히메네스는 이제껏 보이지 않던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 * *

빌더 시 외곽에 위치한 대규모 저택.

바로 케이슨 용병기사단이 머무는 거처였다.

처음에는 규모가 작은 저택을 소유했었지만 이번에 새로이 규모가 큰 저택을 구입한 것이다. 단지 케이슨 용병기사단만 머무는 곳이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한스를 비롯해 제이든의 여동생, 지금은 없지만 후에 복귀할 흑풍대와 흑사신들을 고려해 넉넉한 규모로 구한 것이다.

이른 아침,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저택에 알랜이 찾아왔다.

“재미있는 정보가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알랜의 말에 케이슨 용병기사단은 집무실로 모였다.

“혹시 일주일 전쯤에 퍼진 트로켄 왕국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알랜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단원들은 대번에 짐작했다. 트로켄 왕국과 관련된 소문은 너무나도 커서 평소 소문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 이라도 모두가 알만큼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

잘은 몰라도 트로켄 왕국과 관련된 소문은 비단 빌더 시뿐만 아니라 전 대륙의 최대 화젯거리가 돼 있을 게 뻔했다.

특히 인접한 몬테팔코 왕국과 테누타 왕국에게는 더더욱 흥미로운 소문이었을 테니까.

“워낙 큰 소문이라 들었소. 그런데 왜 갑자기 트로켄 왕국의 일을 묻는 것이오?”

케이슨의 질문에 알랜은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앞으로 살짝 숙였다.

사실 이렇게 몸을 숙이고 목소리를 낮출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항상 주변을 경계하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까닭이었다.

“오늘 검은여우 용병대에서 새로이 기사단 창단식을 한다는 건 알고 있으신지요?”

불과 열흘 전, 검은여우 용병대가 케이슨 용병기사단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기사단이, 다른 곳도 아닌 용병길드 본부 바로 앞에서, 다른 이도 아닌 케이슨 용병기사단에게 톡톡히 망신을 당한 사건은 빌더 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이야기였다.

트로켄 왕국과 관련된 소문이 터지기 전까지 빌더 시 최고의 화젯거리는 바로 케이슨 용병기사단과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이 부딪친 사건이었다.

이 두 사건은 분명 공통분모를 갖지 못한 이야깃거리다.

하지만 남들은 모르는 공통분모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알랜이 이렇게 이야기를 꺼낼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의 새로운 단장과 부단장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트로켄 왕국의 두 백작, 히메네스와 안드리치라고 합니다.”

“흐음?”

그 말에 아이작이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묘한 음성을 토해냈다.

지금은 비록 사정상 케이슨 용병기사단에 몸을 담고 있지만 그는 몬테팔코 왕국의 수호검을 자처하는 하야스 후작가의 차남이었다. 그렇기에 아이작에게 왕국 간의 알력이나 미묘한 정치적 흐름을 읽어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작 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조만간 전쟁이 터질 것 같습니다.”

“몬테팔코 왕국은 당장 어려우니…… 그럼 테누타 왕국이겠군. 그렇습니까?”

아이작의 질문에 알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적으로 기밀사항이지만 조만간 테누타 왕국이 트로켄 왕국을 침략할 것 같습니다.”

알랜의 목소리는 더욱 작아졌다.

“기밀사항마저 말을 꺼낸 걸 보니 할 말이 있는 모양이오?”

마현이 알랜의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네, 공적인 일이라면 공적인 일이고, 지극히 사적인 일이라면 사적인 일입니다.”

“어째서 그렇소?”

알랜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곧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 이견이 없을 줄 압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케이슨 용병기사단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아니고, 무작정 의뢰를 받기보다는 어느 정도 선을 그어놓고 의뢰를 받을까 합니다.”

“어느 정도 선?”

“검은여우 용병대 때문입니다.”

알랜은 말을 해놓고도 살짝 케이슨과 마현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제가 주제를 넘어선 건 아닌지요?”

“아니오, 잘 물어본 것이오.”

마현은 케이슨과 눈빛을 교환한 후 말했다.

“테누타 왕국과 트로켄 왕국의 전쟁에 우리도 반드시 참여하겠소. 그에 대한 조건은 단 한 가지요. 반드시 검은여우 용병대의 적국일 것. 이왕이면 전장에서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의뢰를 받아주면 더할 나위 없겠소.”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합시다. 몬테팔코 왕국 측과의 대전도 피해주시오.”

이번에는 아이작이 끼어들었다.

그 말에 케이슨과 마현도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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