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293화 (293/351)

# 293

17화

마현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마력을 그곳으로 집중했다. 아주 작은 공간은 서서히 커졌고, 다행히 그라스의 숨결이 끊어지기 일보직전에 그의 심령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탈진한 그라스는 바닥으로 몸을 처박으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가릉 대장로.’

마현은 문득 가릉을 떠올렸다.

섭혼술을 익힌 이유가 바로 가릉의 닦달 때문이었다. 마현에게 세뇌에 관한 흑마법이 있지만 세상의 일은 모르는 거라며 섭혼술을 익히라 조언을 해주었던 것이다.

하도 사람을 귀찮게 따라다니며 충언을 해대는 통에 마현은 마지못해 익혀두었던 것인데, 설마 이렇게 요긴하게 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지금쯤 가릉은 스승 허진 못지않게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돌아가면 술 한 잔 거하게 사줘야겠군.’

마현은 가슴을 시리게 하는 기억을 애써 털어냈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은 그라스의 몸을 그의 심령과 이어진 섭혼술을 이용해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마현은 몸을 돌려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그런 마현의 움직임을 따라 그라스도 소파 옆으로 다가와 섰다.

알랜은 자신이 자리를 뜨기 전에 찻잔을 들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마치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자신이 펼친 섭혼술의 영향으로 그에게 걸린 미혹이 깨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비록 결과는 같지만 아마도 서로 다른 영역을 파고들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차라리 잘 되었다.

알랜은 지금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그 자신에게는 더 이로울 것이다. 그렇기에 마현은 알랜에게서 관심을 끊고 그라스를 쳐다보았다.

“너는 누구냐?”

마현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마음(魔音)에 그라스의 몸이 한 차례 파르르 떨렸다.

“내 이름은 그라스. 검은여우 용병대 부대장. 5서클의 흑마법사, 권능의 주인은 미혹의 신, 가브리엘라.”

“검은여우 용병대 부대장?”

뜻밖이었다.

검은여우 용병대가 벌써부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검은여우 용병대의 부대장인 그라스가 흑마법사라는 것도 미처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한편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검은여우 용병대는 대륙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용병대였다. 그런 곳의 부대장으로 있으면서 여태껏 흑마법사라는 걸 들키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모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왜 나에게 접근한 거지?”

“이베른의 명에 의해…….”

“이베른?”

마현은 깜짝 놀랐다.

설마 이 자리에서 그의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방금 이베른이라고 했느냐?”

“이베른. 태양, 스피네타의 마탑주, 이베른.”

이제야 이해가 된다.

그라면, 아니 그들이라면 충분히 이러고도 남을 위인들이었다.

“복종의 인이냐?”

“그렇습니다.”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검은여우 용병대가 어떻게 대륙 최고의 용병대가 되었는지. 또 음흉한 여섯, 아니 이제는 다섯이 된 마탑주들은 겉으로 청렴함과 고고함을 유지하기 위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아마도 자신들을 대신해 더럽고 추악한 일을 해줄 자로 지금 눈앞에 있는 그라스를 이용했을 것이 분명했다.

과거 자신이 그들을 대신해 전장에서 손에 피를 묻혔던 것처럼.

그라스는 자신의 과거와 유사한 면이 있는 자였다. 물론 처지가 비슷하다고 다 똑같이 행동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마현은 동정심 따위는 갖지 않았다. 동정심이야말로 싸구려 감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라스를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한 것은 시간을 내어 들으면 될 것이다.

‘잠깐, 복종의 인이라고?’

마현은 고개를 들어 그라스를 쳐다보았다.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다. 복종의 인을 새긴 자는 결코 미혹에 빠지지 않는다. 게다가 미혹에 강한 가브리엘라의 권능을 이은 흑마법사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마현과의 대화에서 분명 그라스는 이베른에 반하는 생각을 떠올렸고, 입 밖으로 내뱉었다. 헌데 복종의 인에 의한 금제가 발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거 재미있는 상황이군.’

과거 무영대주를 거둘 때의 상황과 똑같았다.

단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때는 섭혼술에 의한 금제의 틈을 블라인드 마인드 흑마법으로 파고들었다는 것이고, 지금은 복종의 인으로 만들어진 금제의 틈을 섭혼술로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으하하하하!”

이로 인해 복수의 방식이 더욱 다양해진 것이다. 마현은 오랜만에 호탕하게 웃었다.

* * *

브루넬로 왕국, 자작령 농노출신.

4남 2녀 중 셋째, 형제는 10여 년 전 전염병으로 모두 사망. 그때 전염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위장. 이후 브루넬로 왕국과 몬테팔코 왕국전(王國戰) 이전까지의 행적은 불분명함.

처음 용병길드에 가입할 때 본명이 아닌 K.K로 활동. 하지만 전장에서 죽음을 경험함. 용병들의 관례에 따라 K.K라는 이름을 버리고 본명으로 활동을 시작.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제외하고 그가 유일하게 인연을 맺고 있는 용병길드 몬테팔코 왕국 수도지부의 부지부장 알랜의 심문에 의하면 완벽한 검사 소드마스터이며, 그에게 마법과 관련된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음.

“그래, 카칸이 본명이라고?”

그라스가 가져온 보고서를 읽고 이베른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출생할 당시 그자의 부모가 대륙에서 유명한 이들의 이름을 가져와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입에 담기 황망하지만 그의 형제 중에는 이베른 님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그라스의 설명에 이베른은 입가에 고소를 머금었다.

‘쓸데없는 기우였군.’

이베른은 거의 보름 만에 돌아와 올린 그라스의 보고서를 읽고는 내심 안도했다.

“확실한 건가?”

그렇다면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찜찜함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제 목을 걸어도 좋습니다.”

그라스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의 출생지까지 찾아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그렇군.”

이베른은 왜 그라스가 보름씩이나 시일이 걸린 건지 그 말을 듣고 알 수 있었다.

그의 능력이라면 만난 이들을 완벽히 제압한 후 진실을 모두 들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카칸이라는 자는 자신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고, 체스와프와의 죽음과 연관된 것도 그야말로 우연일 뿐이었다.

그렇게 납득을 한 이후에도 어쩐 일인지 찜찜함은 도통 사라지지 않았다.

“그라스.”

“예, 주인님.”

“그렇다 해도 그자의 이름을 다시는 듣고 싶지 않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충분한 지원만 있다면 반드시 이베른 님의 귀에 그자의 이름이 더는 들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라스의 확신에 찬 말에 이베른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몬테팔코 왕국과 브루넬로 왕국의 전쟁이 끝났다.

새로운 소드마스터의 등장과 함께 용병계에서는 처음으로 기사단이 만들어졌다. 그들의 활약으로 몬테팔코 왕국이 승리했다.

그 소식이 대륙 전역으로 퍼지자 용병계는 들썩거렸다.

그로부터 6개월이 흘렀다.

그사이 케이슨 용병기사단과 새로운 소드마스터의 존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조금씩 잊혀졌다.

그 자리에 검은여우 용병대가 들어섰다.

대륙 제일의 용병대답게 기사단을 창설한 것이다.

비록 새로 영입된 소드마스터는 없었지만 전원 소드익스퍼트로 구성된 기사단은 대륙의 용병계를 흥분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케이슨 용병기사단과 달리 그들은 여러 전장을 누비며 혁혁한 성과를 만들어갔다.

그렇게 다시 6개월이 흘렀다.

검은여우 용병기사단의 활약을 보며 사람들이 대륙 제일의 용병대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때였다.

용병계에 새로운 소드마스터가 다시 등장했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쉬라즈 왕국과 테누타 왕국의 전장에 나타나 상상을 초월하는 무력을 선보였다.

그의 엄청난 무력은 가히 일인 용병대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 전장에 함께 있었던 용병들은 그를 두고 가히 군신 아이벤의 강림이라고 열변을 토했고, 하나같이 그를 추종했다.

그의 이름이 대륙의 전역에 퍼질 무렵, 또 다른 소드마스터가 등장했다. 이어 다른 소드마스터가, 또 다른 소드마스터가…… 연이어 등장했다.

놀랍게도 길게는 한 달 간격으로, 짧게는 보름 간격으로 새로운 소드마스터가 속속 등장한 것이다.

그렇게 용병계에 새롭게 등장한 소드마스터의 수는 모두 열 명.

특이하게 그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무리를 짓지 않았다.

한 마리의 외로운 늑대처럼 오로지 혈혈단신으로 전쟁과 싸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참전해 가공한 무력을 선보일 뿐이었다.

지독할 정도로 고독한 그들의 모습은 용병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대륙의 용병들은 열 명의 신진 소드마스터를 십좌왕이라 부르며 그들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그렇게 용병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처럼 연일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뜨거운 용암을 품고 있던 그 활화산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케이슨 용병기사단이 2년의 침묵을 깨고 세상에 나온 것이다.

* * *

카스텔로 연방국 내 자유도시 빌드 시(市).

자그만 남작령보다도 작은 이 도시에는 따로 주인이 없었다.

물론 시를 관리하는 시청과 그 수장인 시장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가 이 도시의 주인은 아니다. 단지 카스텔로 연방국으로부터 한시적으로 임명된 관리일 뿐이다.

그렇게 주인조차 명확하지 않은 작은 도시에 불과했지만, 빌드 시를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전 대륙에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작은 도시에 대륙의 마법을 상징하는 여섯 마탑이 우뚝 세워져 있었고, 용병들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대륙 용병길드의 본부가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빌드 시는 마치 계란의 노른자와 흰자가 나눠지는 것처럼 순환하는 둥근 대로를 기준으로 시내와 시외가 구별된다.

시내는 시청을 중심으로 북부에 반월 형태로 여섯 마탑이 우뚝 세워져 있었고, 그것과 정반대에 위치한 쪽에는 용병길드 본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시외에는 빌드 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물론 그런 시외조차 벗어난 외곽에는 빈민가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계획도시인 만큼 빌드 시는 여느 왕국의 수도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빌드 시내의 남부 광장을 아래로 내려다보듯 웅장한 규모로 세워진 용병길드 본부.

그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용무에 따라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투각 투각 투각.

그때 밀집한 사람들을 위협하듯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썅. 누가 이런 곳에 말을 타……, 흡!”

용병 한 명이 소리를 버럭 지르려는 것을 그 옆 동료가 황급히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인파가 몰려 있는 것은 둘째 치고, 용병길드 본부 앞에 이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을 모는 이들은 거의가 검은여우 용병대의 기사단이었다.

안하무인격인 그들의 모습에 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인파들은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게 다였다. 분하고 속이 쓰렸지만 사람들은 부랴부랴 그들에게 길을 터주었다.

활짝 열린 길로 검은여우 기사단은 다시 말을 몰았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정말 눈꼴사나워 못 봐주겠네.”

한 여인의 목소리에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그들의 말발굽이 다시 멈췄다. 곧이어 검은여우 기사단에게서 험악한 기세가 일어났다.

“히익!”

“아이구야!”

자신에게 행여나 불통이 튈까봐 전전긍긍하며 그 여인의 주위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소수의 한 무리만이 인파에서 떨어져 덩그러니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은 바로 케이슨 용병기사단 단원들이었고, 목소리의 중인공은 다름 아닌 자브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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