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289화 (289/351)

# 289

13화

‘하긴, 숨긴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지.’

마현은 아이작을 떠올리며 케이슨과 밀러와 함께 정문으로 그들을 마중 나갔다.

정문이 열리고 포크너 후작과 하야스 후작, 그리고 한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밀러를 보자 순간 한스의 눈동자에 기쁨이 넘쳤지만 포크너 후작이 옆에 있어서인지 꾹 참는 모습이었다.

“약속을 늦게 지켜서 미안하네.”

포크너 후작은 품에서 한스의 노예문서를 꺼내 마현에게 건넸다.

“괜찮습니다.”

마현은 그 문서를 받아 밀러에게 넘겼다.

“한스야.”

“예, 주인어른.”

“이미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이 시각 이후부터 너는 자유다.”

하지만 현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지 한스는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렸다.

“한스야, 이리 오너라.”

밀러가 몸을 낮추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괜찮다.”

포크너 후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한스는 단걸음에 밀러의 품으로 뛰어갔다.

‘녀석.’

전장에서 잘 먹어 통통해졌던 뺨이 그새 많이 홀쭉해져 있었다. 그리고 옷은 깨끗했지만 여기저기 많이 기운 자국도 눈에 들어왔다.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귀족가의 노예생활이 어떨지가 훤히 짐작이 갔다.

어차피 노예 신분의 아이가 누릴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밀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후작각하, 먼저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내게 더는 물어보지 않아도 되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밀러가 감사의 의미를 담아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리고는 한스의 손을 잡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온화하게 웃는 밀러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화답하는 한스의 모습은 마치 다정한 할아버지와 손자를 보는 듯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마현은 몸을 살짝 틀어 별장으로 향하는 길을 내주었다.

“먼저 가 있게.”

하지만 하야스 후작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에는 아이작이 있었다.

단원들 사이에 있던 아이작이 고개를 돌려 마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자신이 아는 것을 아버지에게 모두 이야기해도 되느냐고 묻고 있었다.

『연무장에 관한 것만은 불가!』

마현이 매직마우스로 짧게 의사를 전달하자 아이작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야스 후작이 아이작의 그런 행동을 놓칠 리 없었지만 짐짓 모른 척 넘어갔다.

“아이작과 잠시 얘기를 나눠도 되겠는가?”

하야스 후작은 함께 있는 단원들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평소였다면 성격대로 걸걸하게 나갔겠지만 아들의 동료였기에 먼저 예의를 갖춘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만나겠다는데 반대할 이는 없었다.

“잠시 걸을까?”

“그냥 제 방으로 가시죠.”

흑도의 별장은 별로 볼 곳도 없고, 여유롭게 산책을 할 만한 공간도 없었다. 그나마 볼만하던 정원도 모두 없애고 연무장을 지은 까닭이었다.

남들의 이목도 있는지라 하야스 후작은 그 편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작을 앞세워 걸어갔다.

아이작의 방은 다른 단원들이나 흑풍대원들의 방처럼 단출했다. 안에 가구들이라고 해봐야 침대와 자그만 옷장, 그리고 책상과 의자 두 개가 전부였다. 더욱이 제때 방을 치워줄 시종이나 하녀들이 없어 그의 방은 꽤나 너저분했다.

다른 귀족들이라면 바로 눈살을 찌푸렸겠지만 안내를 하는 아이작이나, 그런 방에도 개의치 않는 하야스 후작의 모습은 덤덤하기만 했다.

“보시다시피 대접할 만한 차도 없습니다.”

“물 한 잔이면 된다.”

하야스 후작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고, 아이작도 그냥 물주전자에서 자신이 먹던 찻잔을 대충 헹군 후 내놓았다.

“그래, 지낼 만하냐?”

“휴우.”

하야스 후작의 질문에 아이작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즘엔 세상이 참으로 넓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이작의 쓴웃음에 하야스 후작은 그 의미를 짐작한 듯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야스 후작은 기가 한풀 꺾인 아이작의 모습이 낯설었다. 평소 패기와 열정으로 가득한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이작은 변해 있었다.

하야스 후작은 눈을 빛내며 아이작의 얼굴을 주시했다. 아들은 몇 년 동안 벽에 가로막혀 검술이 정체되었을 때에도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대체 무엇이 아 아이를 저토록 침잠하게 만들었을까?’

문득 하야스 후작은 먹먹함을 느꼈다.

“너답지 않구나.”

“그냥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잠시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녀석, 다 큰 줄 알았더니 아직 멀었구나. 그러니 아직 소드마스터에 오르지 못한 거지.”

“그런가요?”

하야스 후작은 손을 뻗어 아이작의 손을 잡았다.

“이 세상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없고, 정복하지 못할 산도 없다. 오르고 또 오르면 언젠가는 나무 꼭대기에도 오르고 산도 정복할 수 있을 게다.”

“감사합니다.”

“……?”

“저를 이곳으로 보내주셔서 말입니다.”

다시 허리를 꼿꼿하게 펴는 아이작의 얼굴에는 전처럼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 * *

투각 투각 투각.

“뭔가 좀 알아봤나?”

하야스 후작은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포크너 후작에게 물었다.

“그 소드마스터들은 케이슨 용병기사단이 아니라 카칸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은데…… 정확한 건 알 수가 없더군.”

포크너 후작은 이곳에 오기 전보다 더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자네는?”

포크너 후작이 이번에는 하야스 후작에게 물었다.

“나도 마찬가지일세.”

하야스 후작은 포크너 후작의 실망하는 얼굴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안 간 것만 못한 꼴이 되었군.”

포크너 후작은 하야스 후작의 쓴웃음에 쓴웃음으로 화답했다.

* * *

“뭐, 뭐라?”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체 그 따위 소리를 지껄이다니!”

그리고 비틀린 입술에서 잇따라 분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음성의 주인은 대륙을 호령하는 강자 중 한 명인 검은여우 용병대의 대장 미겔이었다.

“확 뒤엎어 버리려다가 겨우 참고 나왔습니다, 대장.”

바스락!

미겔은 측근 중의 측근인 제1조장 카르비안의 말에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꽉 구기고 말았다.

“감히 검은여우 용병대와 동일 선상에 올려놔?”

미겔은 이를 박박 갈았다.

“내 어릴 때 정을 생각해서 목숨만은 살려줬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쳐?”

미겔의 눈에서 진득한 살기가 꿈틀거렸다.

“카르비안, 케이슨이 영입한 소드마스터들의 정체를 당장 알아봐. 두 놈 다, 당장!”

“알아봐서 뭐하려고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어떤 놈들인지 알아야 대처를 하든지 영입을 하든지 판단할 것 아닌가! 그도 아니면……, 더 크기 전에 싹을 잘라버리든지 말이야.”

영입이라는 말에 카르비안의 낯이 구겨졌지만 이내 그런 표정을 감췄다.

“아무래도 카이샨 메일을 알아봐야겠군.”

“휘유!”

카르비안의 입에서 휘파람이 흘러나왔다.

“돈이 제법 깨지겠는걸요.”

달깍.

그때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얼굴은 수십 년 동안 햇빛과 담을 쌓고 살아온 듯 창백했고, 몸은 해골을 연상시킬 정도로 깡마른 자였다. 그의 몸에서는 음산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특히나 길게 찢어진 눈에서 나오는 퍼런빛은 독사처럼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검은여우 용병대의 부대장 그라스였다.

그라스가 들어서자 카르비안은 움찔거리며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나뭇가지 하나 꺾을 힘도 없어 보이는 그라스에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의외였다.

미겔을 제외하고 검은여우 용병대에서 가장 출중한 무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자가 카르비안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마치 고양이 앞의 쥐새끼처럼 몸을 움츠리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라스가 바로 미겔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데다가, 검은여우 용병대의 모든 행동을 결정짓는 머리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미혹의 신, 가브리엘라의 권능을 이어받은 흑마법사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검은여우 용병대 내에서도 수뇌들 몇 명만이 아는 극비였지만 말이다.

“재미난 소식을 하나 들었습니다.”

“재미난 소식?”

“몬테팔코 왕국 내에서 영지전이 발발했는데 거기서 소드마스터가 나왔다는군요. 그것도 두 명씩이나.”

“몬테팔코 왕국에서 또 다른 소드마스터가 나온 건가?”

미겔의 질문에 그라스는 피처럼 붉은 입술 양 끝을 끌어올렸다.

“몬테팔코 왕국의 일이면 제가 굳이 말을 꺼낼 이유는 없지요. 그들은 개인용병이라고 합니다.”

그라스의 말에 미겔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개인용병이라…….”

“데리고 올 수만 있다면야…….”

그라스는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소드마스터인데 가능하겠는가?”

제아무리 가브리엘라의 권능을 이은 그라스라고 해도 소드마스터에게까지 미혹의 흑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미겔도 알고 있었기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은 어렵지요. 그래서 데리고 오면, 이라고 했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다면야…….”

어지간해서는 그라스가 확신에 찬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그럼에도 장담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소리다.

“위험하지는 않겠지?”

“원래 큰 걸 얻으려면 거기에 위험이 따르는 건 당연한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그라스의 말에 미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드마스터가 둘이 더 합류한다면 앞으로 검은여우 용병대를 넘볼 수 있는 데는 대륙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설령 용병길드라고 해도 말이지요.”

그라스는 뾰족한 혀로 새빨간 입술을 핥았다.

“카르비안 조장.”

“예? 아, 예.”

그라스의 부름에 카르비안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카르비안을 향해 그라스는 음산하게 웃었다.

“아, 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이래서 제가 카르비안 조장을 좋아합니다.”

어찌 사람의 웃음이 저리도 사악해 보일 수 있다는 말인가. 더욱 음산해진 그라스의 웃음에 카르비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모골이 송연했다.

* * *

몬테팔코 왕국의 수도는 어수선했다.

영지전에 새로운 소드마스터의 등장, 거기에 바로 이어진 전승 파티까지.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왕국의 수도는 지금 몸살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였다면 나오는 이야기 중 단연 화젯거리는 새로운 소드마스터 용병들이었다.

그들의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이으며 왕국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이 머무는 별장은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마현은 연무장에서 묵묵히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단원들과 흑사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특히 흑사신들의 수련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독했다.

평소 행동은 다들 제멋대로였지만 지금 수련에 들어간 흑사신의 모습은 전과 완전히 달랐다.

무공수련을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씌인 것처럼 잠도 하루에 2시간 이상 자지 않으며 모든 시간을 수련에만 쏟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몸은 놀라울 정도로 하루하루 달라졌다.

물론 그들은 과거에 이미 무공의 끝자락을 맛본 이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케이슨 용병기사단원들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지만.

그렇기에 흑사신들의 수련은 그들에게도 좋은 자극제가 되고 있었다.

거기에 흑풍대원들이 돌아가면서 케이슨 용병기사단원들의 수련을 도와주니 단원들의 실력도 알게 모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럴 때 큰 자극을 준다면 한순간 일취월장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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