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
12화
“나중으로 미루려고 했지만 조금 앞당겨야겠소.”
“무얼 말입니까?”
알랜은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자중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살짝 퉁명스러웠다.
“미스릴 용병패, 일단 2개의 주인을 찾아야 할 것 같소.”
마현의 말에 알랜은 목이 부러질 듯 고개를 들어올렸다.
“지금 무슨 말씀을…….”
“가이진, 세이크.”
마현은 왕귀진과 검세옥의 이름을 하르센 대륙의 방식으로 고쳐 불렀다.
“예, 주군.”
“하명하시옵소서.”
그제야 알랜은 마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낯선 사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이진과 세이크요. 그리고 여기는 몬테팔코 왕국 용병길드 수도지부의 부길드장인 알랜이다.”
마현의 소개에 알랜과 왕귀진, 검세옥은 서로 인사를 나눴다.
“나와 찰튼의 의뢰를 이 친구들에게로 넘겨주시오.”
“그게 무슨…….”
잠시 마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던 알랜은 조금 전 들었던 미스릴 용병패를 떠올렸다.
“그, 그 말씀은?”
알랜은 몹시 놀란 눈으로 왕귀진과 검세옥을 쳐다보며 눈을 껌뻑였다.
“그럼 이, 이 분들도…….”
“단, 조건이 있소.”
마현의 목소리에 알랜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원래는 이들은 케이슨 용병기사단 소속으로 등록시키려 했지만 현재 상황이 그처럼 복잡하니 그냥 개인용병으로 등록해주시오. 그리고!”
마현의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그 누구에게도 가이진과 세이크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마시오. 물론, 이 둘의 의뢰는 케이슨 용병기사단처럼 알랜, 당신을 통해서만 받는 걸로 해두겠소.”
알랜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가이진, 세이크와 함께 알랜 부지부장을 따라 잠시 용병길드에 다녀오라.”
“알겠습니다, 주군.”
왕귀진과 검세옥은 군례를 취한 후, 알랜과 함께 용병길드로 떠났다.
* * *
비교적 규모가 작은 남작령과 제법 그 규모가 큰 자작령의 영지전이었다.
브루넬로 왕국과의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이 영지전은 사람들에게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나마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가진 이들은 고작 귀족파와 국왕파 소속의 일부 귀족들 정도였다.
그 이유는 영지전의 승패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초 아무런 흥미조차 주지 못하던 영지전이 가져온 후폭풍은 엄청났다.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번 영지전의 승자는 새뮤얼 자작이 아니라 베케트 남작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승리 뒤에는 새롭게 등장한 두 명의 소드마스터가 있었다.
모든 이들의 이목이 두 명의 소드마스터 용병에게로 쏠린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용병길드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이 두 명의 소드마스터의 요청으로 인해 개인적인 신상을 알려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어떤 정보도 공개할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죄송합니다, 지부장님.”
“알랜, 나에게까지 비밀로 하겠다는 뜻인가?”
“제가 밝힐 수 있는 부분은 이미 문서로 작성해 보고를 올렸습니다.”
분명 알랜은 지부장인 자신에게 새로운 두 명의 소드마스터가 제출한 등록서와 간단한 보고서를 올리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실체를 조금도 알 수 없는 모호하기 그지없는, 다분히 형식적인 보고서에 불과했다.
“알았네, 나가보게.”
지부장의 탐탁지 않아 하는 축객령을 들으며 알랜은 그의 방에서 나와야 했다.
달깍.
하지만 지부장실의 문을 닫고 나서는 알랜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은근한 미소까지 살짝 짓고 있었다.
“부지부장님.”
“무슨 일이지?”
“지금 부지부장실에 옥타비오 공작이 와 있습니다.”
“옥타비오 공작이?”
그가 왜 왔는지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한바탕 시달려야 할 것이다.
어쩌면 죽인다는 협박까지 받게 될지도 모른다. 옥타비오 공작은 충분히 그럴 만한 위인이었다. 하지만 그걸 짐작하고도 알랜의 표정은 굳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가 더욱 은은하게 입술 끝으로 퍼져나갔다.
* * *
“수고했네, 베케트 남작.”
포크너 후작이 젊은 베케트 남작의 어깨를 두들기며 축하해주었다.
“두 분 후작각하 덕분입니다.”
“그리 생각해주면 우리야 고맙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두 명의 소드마스터를 보내주신 두 후작각하의 덕분입니다.”
베케트 남작의 말에 포크너 후작과 하야스 후작이 눈을 반짝이며 짧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 둘의 이름이……?”
“가이진 경과 세이크 경입니다.”
왕귀진과 검세옥의 이름을 입에 담는 베케트 남작의 얼굴에는 존경심이 묻어나왔다.
“그렇군.”
포크너 후작은 입가에 쓴웃음을 살짝 지었다가 이내 표정을 수습했다. 베케트 남작은 해성처럼 새롭게 나타난 두 명의 소드마스터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표정으로 보건데 순박하게도 정말로 자신들이 그들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차라리 조금 욕심이 있는 자였다면…….’
그랬다면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도 모르게 베케트 남작은 그 두 명의 소드마스터와 어떤 식으로든 조그만 끈이라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이럴 땐 차라리 처세에 능한 자가 더 필요한 법이다. 포크너 후작은 너무나도 깨끗한 베케트 남작의 성품이 오늘따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그런 성격을 탓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성격 탓에 온갖 풍파와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영지를 꿋꿋하게 지켜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보름 후에 있을 전승 파티가 끝나면 정식으로 자작 작위가 내려질 것일세.”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듣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자작으로 승작될 것이라는 정보는 영지전에서 승리하면서 입수했다. 그런데 이렇게 포크너 후작의 입을 통해 직접 듣게 되자 베케트 남작은 끓어오르는 희열에 정신이 잠시 멍해져 입술만 달싹거렸다.
“좋긴 좋은 모양이구나.”
“아, 아닙니다.”
하야스 후작의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베케트 남작은 붉어진 얼굴로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싫어? 그럼 취소해 줄까?”
하야스 후작의 말은 다분히 농담이었지만 당사자인 베케트 남작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그건 아니고…….”
“낄낄낄, 농담이다.”
하야스 후작의 장난스러운 웃음에 베케트 남작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베케트 남작.”
포크너 후작의 목소리에 그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네, 포크너 후작각하!”
“영지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합칠 생각인가?”
“사실…….”
그 질문에 살짝 긴장한 듯 베케트 남작은 뜸을 들였다.
“편히 말해보게.”
“자작령으로는 제가 들어가고, 현재의 남작령은 처남에게 주었으면…….”
베케트 남작은 포크너 후작의 눈치를 살폈다.
이미 남작령의 주인이 정해져 있다면 자신의 의견은 아무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남? 아!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그런 사정이 있군.”
포크너 후작은 베케트 남작의 부인이 영지를 가지지 못한 몰락 귀족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2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는 것도.
“죄송합니다. 미리 의논도 못 드리고 제가 경솔하게 말을 해서…….”
“그리하게.”
“후, 후작각하!”
가슴을 졸이고 있던 베케트 남작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려 포크너 후작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갑자기 터져 나온 그의 목소리는 실내를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컸다.
“아, 귀 떨어지겠다.”
하야스 후작이 눈매를 살짝 찡그리며 타박했다.
“가, 감사합니다.”
베케트 남작은 연신 허리를 숙였다.
“바쁜 사람 오라고 해서 시간을 너무 빼앗은 게 아닌가 모르겠군.”
포크너 후작은 말을 살짝 돌려 축객령을 내렸다.
“그럼 전승 파티 때 뵙겠습니다.”
베케트 남작이 돌아가자 포크너 후작은 하야스 후작이 앉아 있는 소파로 걸어갔다.
“소드마스터라……. 누굴까?”
분명 마현과 관계된 인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도 마현 주위에 새로운 소드마스터는 없었다. 더욱이 베케트 남작의 말에 의하면 마현과 철용은 아니었다.
“직접 보러 가지.”
하야스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를 말인가?”
“미하일 준남작 별장으로.”
“흠……,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집사!”
포크너 후작은 고개를 돌려 집사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후작님.”
“한스라는 아이. 준비시키게.”
“후작님께서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그리고 마차도 준비하게. 지금 미하일 준남작 별장으로 갈 테니.”
“알겠습니다. 서둘러 준비하겠습니다.”
집사는 포크너 후작의 명에 허리를 숙인 후 급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 *
“다녀왔습니다, 주군.”
왕귀진과 검세옥은 마현을 향해 군례를 취했다.
“수고했다.”
마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몸을 세우던 왕귀진과 검세옥이 갑자기 흠칫하며 눈이 크게 떴다.
“수고하셨습니다, 대주!”
“수고하셨수다, 대주!”
우렁찬 목소리가 둘을 반겼다.
“너, 너희들은?”
철용을 포함해 8명의 흑풍대가 일동 부동자세를 취하더니 군례를 취했다.
“오늘 같은 날, 술이 빠지면 안 되겠지.”
마현이 그들의 모습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때로는 술이 가장 친해지는 방법이기도 하지.”
케이슨이 마현 곁으로 다가왔다.
“철용, 오늘 저녁 마실 술과 안줏거리를 넉넉히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주군.”
“이보게 찰튼.”
케이슨이 철용을 불렀다.
“야솝과 함께 가게. 그 편이 편할 걸세.”
케이슨은 뒤쪽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이들의 재회를 지켜보고 있던 단원들 사이에서 야솝을 불렀다.
“오늘 거하게 파티를 열 생각이다. 찰튼과 함께 오늘 파티에 쓸 술과 안줏거리를 넉넉하게 사오거라.”
“이얏호!”
야솝은 케이슨의 말에 싱글벙글 웃으며 철용을 채근해서 서둘러 장을 보러 자리를 떠났다.
마현도 케이슨의 말에 동감하고 있었다.
흑풍대와 케이슨 용병기사단원들은 인사를 나눴지만 철용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철용이 평소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니, 따지고 보면 오십보백보 차이에 불과했다.
“카칸.”
그때 마현 곁으로 밀러가 다가왔다.
밀러가 왜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마현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상황이 이러니 내일 저랑 함께 포크너 후작의 저택으로 가죠.”
“미안허이, 주책없이 자꾸 채근해서.”
“괜찮습니다.”
“어디서 뒷말 들을 사람은 아닌 모양이군.”
케이슨의 말에 밀러와 마현은 고개를 돌려 정문 쪽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포크너 후작가를 상징하는 자그만 깃발이 달린 마차가 막 멈추어 서고 있었다.
마차의 문이 열렸다.
모두가 그 문을 향해 시선을 집중할 때 밀러는 마부석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마부 옆에 한 소년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한스였다.
곧 마차에서 집사와 포크너 후작, 하야스 후작이 내렸다.
‘포크너 후작과 하야스 후작이 직접?’
이런 일로 지체 높은 귀족들이 직접 움직일 줄은 몰랐기에 조금 의외였다.
하지만 그들이 한스를 데리고 직접 온 이유를 마현은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마현이 정체를 밝히지 않은 새로운 두 명의 소드마스터가 궁금해서 견디지 못하고 찾아온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