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
9화
챙 챙 챙―
두말할 것도 없이 기사들은 긴장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 전에 사과가 먼저다.”
“쯧쯧쯧, 차라리 문을 넘어 들어오면 좋았을걸.”
그때 하야스 후작의 목소리가 기사들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는 완전히 부서진 정문을 바라보며 낯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후작 각하!”
“마이 로드!”
장년의 기사단장과 기사들이 뒤로 한걸음씩 물러나며 군례를 취했다.
“수리비가 꽤 나오겠군.”
“하지만 수하들의 목숨 값보다는 쌉니다.”
“끄응.”
하야스 후작은 앓는 소리를 삼키며 장년의 기사단장을 불렀다.
“집사를 불러 수리하게. 그리고 손님이 가시면 나를 찾아오고.”
“알겠습니다.”
하야스 후작은 부서진 정문을 보며 다시 한 번 낯을 찡그리고는 몸을 돌렸다.
“안으로 들어가지.”
하야스 후작은 마현을 데리고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차라도 한 잔 하겠나?”
하야스 후작은 하녀를 시켜 차를 내오게 했다.
얼마 후 차가 나왔고, 하야스 후작은 마현과 마주 앉았다.
“오기 전에 기별이라도 넣지 그랬나?”
“글쎄요, 기별을 넣어도 소식이 닿지 않았을 거 같습니다.”
“그렇게 느꼈다니 내 불찰이군. 그래도 앞으로는 정문을 부수지는 말게. 수리비가 만만찮아.”
하야스 후작은 찻잔으로 쓴웃음을 가렸다.
“그건 그렇고, 카스텔로 연방국으로 간 줄 알았더니 여기는 어인 일인가?”
몬테팔코 왕국의 명예귀족 자리도 마다하고, 왕실 주최로 열리는 전승 파티에 참석해 달라는 청도 거부하고 떠난 마현이었다. 당연히 용병과 마법사들의 나라, 카스텔로 연방국으로 떠났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연고지도 카스텔로 연방국에 있었다.
“용병이 별수 있습니까? 의뢰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거야 당연한 거지요.”
“의뢰? 조금 쉴 줄 알았는데 의외군.”
“뭐 명목상 의뢰지만 당분간 단원들의 수련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그렇군.”
대충 감을 잡은 하야스 후작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를 하러 나를 찾아오지는 않았을 거고…….”
“필요한 게 생겨서 찾아왔습니다.”
“필요한 게?”
“최상급의 마나석 하나와 최상급 포션 70병이 필요합니다.”
하야스 후작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눈을 깜박였다.
“자네 무슨 전쟁이라도 치르려고 그러는 겐가?”
“설마요.”
“그건 그렇다고 쳐도 그 정도면 자그만 영지의 일 년치 예산의 절반을 상회하는 것이네.”
“그렇기에 찾아온 것입니다.”
하야스 후작은 마현이 참으로 뻔뻔하다고 느꼈다.
“달라면 내가 덜컥 구해줄 거라 생각한 모양이네만……, 사람 잘못 봤네.”
“그거면 아이작이 소드마스터에 오르는데도 말입니까?”
마현의 입술에 미소가 걸렸고, 하야스 후작은 그 미소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끄응.”
마현과 마주하고 있으면 몇 번이나 앓는 소리를 삼켜야 하는지 모른다.
“그런 걸 부탁하러 온 사람이 정문을 부수고 들어오나?”
그것 때문에 하야스 후작의 심기가 몹시 뒤틀린 모양이었다.
“저라면 그 돈을 주고서라도 소드마스터에 오를 수 있다면 충분히 지불했을 것입니다.”
마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하야스 후작의 눈두덩이 씰룩거린 것이다.
현재 아이작의 나이가 21살이었다.
마현과 약속한 기간이 5년.
그 기간 끝자락에 소드마스터에 오른다고 해도 26살밖에 안 된다. 전 대륙을 통틀어 견주어 봐도 그만한 나이에 소드마스터에 오른 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니군.’
하야스 후작은 마현을 바라보며 그런 자신의 생각을 곧바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엄청난 일이기는 하다.
하야스 후작은 애초에 승산 없는 싸움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아니 처음부터 승산이 없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현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허리띠를 졸라매야겠군.’
“당장은 힘드네. 일주일가량 시간을 주게. 구해주지.”
하야스 후작은 입안에 도는 쓴맛을 감추지 않았다. 아니 겉으로 팍팍 드러냈다.
그 모습에 마현은 피식 웃으며 들고 온 두 벌의 카이샨 메일을 하야스 후작 앞에 내려놓았다.
“부족하겠지만 어느 정도 충당은 될 듯합니다.”
“이건?”
한 벌의 카이샨 메일은 마현의 것이었고, 다른 한 벌은 철용의 것이었다.
케이슨 용병기사단에게는 필요한 마법갑옷이었지만 마현에게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갑옷일 뿐이었다. 물론 철용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흑풍대가 전부 모이면 누구는 입고, 누구는 안 입는다는 자체가 웃기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그렇다고 전부 카이샨 메일을 입히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처분하는 것이 편한 일이었다.
‘허어, 이거 참.’
하야스 후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카이샨 메일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카이샨 메일 두 벌이면 마현이 부탁한 것들을 좀 더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즉, 재정적으로 크게 무리가 안 간다는 뜻이다.
그나마 다행이기에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마현 앞에서 웃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게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마냥 웃을 일도 아니었다.
완전히 사람을 들었다가 놓는 것이 아닌가.
“이게 제 용건의 전부입니다. 달리 하실 말씀이 없으면 일어날까 합니다.”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야스 후작은 저택을 떠나는 마현의 뒷모습을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았다.
내심 마현이 몬테팔코 왕국의 귀족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바람일 뿐이었다.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으면 좋겠군.’
하야스 후작은 아이작을 떠올렸다.
똑똑똑.
그때 집무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들어오라.”
집사와 제4백마기사단장이 들어왔다.
그러자 하야스 후작의 얼굴은 금세 싸늘해졌다.
* * *
몬테팔코 왕국 외각 남쪽에 위치한 흑도, 미하일의 별장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케이슨 용병기사단과 흑사신, 그리고 앞으로 흑풍대가 몇 명 더 찾아와도 넉넉하지는 않아도 충분히 지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처럼 규모가 제법 큰 별장이었기에 본채 뒤편에 위치한 정원과 작은 건물 몇 개를 허물고 그 자리에 반듯한 대형 연무장을 지을 수 있었다.
마현이 하야스 후작을 만난 지 3일째 되는 날, 그리고 연무장 공사가 완성되는 날 하야스 후작은 최상급 마나석 하나와 70병의 최상급 힐링포션을 보내왔다.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괜한 엄살이었던 모양이다.
마현은 최상급 마나석을 이용해 대형 연무장에 가벼운 중력 마법진과 마나응집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두 마법진의 영향으로 대형 연무장은 좀 더 무거운 중력을 가짐과 동시에 다른 지역보다 2~3배가량 마나의 농도가 짙어질 것이다.
무거워진 중력으로 인해 근력이나 체력을 기르고, 한결 짙어진 마나의 농도로 인해 더욱 빨리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휴우.”
마현은 굵은 땀방울을 소매로 닦으며 허리를 폈다.
한나절을 꼬박 매달린 끝에 두 개의 마법진을 임시연무장에 그려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나석의 가루를 이용해 그려 넣지 않았다. 영구적으로 쓸 이유가 없었다. 한 2년 정도만 버텨주면 족하기 때문이다.
‘2년. 그 안에 생각한 것만큼 이들이 성장해 줄까?’
마현은 고개를 돌려 임시연무장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단원들을 쳐다보았다.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아이작과 케이슨뿐만 아니라 단원들 모두 왕귀진, 철용, 그리고 검세옥을 곁눈질로 쳐다보며 뜨거운 의지와 일념을 불사르고 있었던 것이다.
마현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대형 연무장 정중앙으로 걸어가 장판석 하나를 들어올렸다. 그곳은 마법진의 중심이었다.
마현은 드러난 맨바닥에 하야스 후작이 보내온 최상급 마나석을 박아 넣었다.
우우우웅―
대형 연무장 위의 최상급 마나석을 중심으로부터 미미한 진동의 파장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마현은 다시 장판석으로 최상급 마나석으로 가리며 허리를 폈다.
어깨를 누르는 묵직한 중력과 함께 서서히 짙어지는 마나의 농도가 느껴졌다.
생각 같아서는 이 마법진을 별장 전체에 적용시키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위험부담이 컸다.
대단위 중력 마법진과 마나응집 마법진 둘 다 5서클에 해당하는 마법이었다. 즉, 이것은 7서클의 마법사만이 설치할 수 있는 마법진이라는 소리다.
혹여나 외부에 마법진이 알려진다면 계획이 틀어지는 것은 둘째 치고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모두 들어와도 됩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작이 먼저 대형 연무장에 발을 들였다.
“큭!”
연무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 아이작의 몸이 잠시 휘청거리며 한쪽 무릎을 바닥에 찧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미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윽!”
“헉!”
비단 아이작만이 아니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연무장 내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곳에 중력 마법진과 마나응집 마법진을 설치했습니다. 도움이 될 겁니다.”
반면 흑풍대는 연무장에 들어서는 순간 얼굴을 살짝 굳히기는 했지만 평소와 그다지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대주.”
“예, 주군.”
“단원들의 수련을 상황을 봐가면서 적절하게 봐주어라. 단, 중원의 내공심법과 검술의 전수는 불허한다.”
“알겠습니다, 주군.”
이들이라면 안심하고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맡길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간간히 자신이 봐준다면 빠르게 성장할 것이다.
‘흑사신들이야, 알아서 잘 할 것이고……. 문제는 힐링포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인데, 당분간 필요가 없으니 고민을 조금 더 해봐야겠군.’
마현은 연무장을 나와 밀러를 찾았다.
아무래도 함께 고민하는 것이 나을 듯싶어서였다.
그러고 보니 저택으로 온 날부터 밀러는 두문불출하는지 얼굴을 좀처럼 내밀지 않고 있었다.
마현은 연무장을 뒤로 하고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밀러가 머물고 있는 2층 가장 구석진 방으로 향했다.
똑똑.
“누군가?”
인기척을 내자 안에서 밀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칸입니다.”
마현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가?”
밀러의 목소리는 무겁게 잠겨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마현은 근처에서 의자를 당겨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밀러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없네.”
그런데 대답과는 달리 문제가 있는 눈치였다.
“있군요.”
밀러의 목소리는 왠지 수심에 잠겨 있었다.
“평소 밀러 님이라면 연무장에 마법진을 설치한다면 와서 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마법사가 활동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확실히 방 안에만 있는 것도 평소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이가 든 게지.”
밀러는 고개를 돌려 창문을 통해 밖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세월을 탓하기에는 아직 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밀러의 나이는 마현도 정확히 모른다.
얼추 오십 대 중반쯤으로 알고 있었다. 거기에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이다 보니 외형적으로는 케이슨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정도로 젊어 보였다.
“휴우.”
밀러는 고개를 아래로 푹 숙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