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284화 (284/351)

# 284

8화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군요.”

자브라는 마현과 케이슨, 아이작이 들어선 숲 안을 보며 고운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무슨 일이라도 난 거 아니에요?”

“설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제이든은 야솝의 말을 깡그리 무시했다.

“카칸 성격에 산적 짓하는 용병들 다 죽이느라 시간이 걸리는 거겠지.”

여전히 빈정거리는 말투였지만 강한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훗!”

그 목소리에 그레오가 다가가 팔꿈치로 제이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 요즘 뻑하면 옆구리 찌르고 팔로 목을 죄는데, 한 번만 더 그러면 친구고 뭐고 죽는다!”

무안함에 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제이든의 고함에 다들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오는군.”

철용의 목소리에 일행은 웃음을 멈추고 숲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케이슨과 아이작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뒤로 마현과 낯선 사내 둘이 숲에서 걸어 나왔다.

낯선 사내 둘의 등장에 단원들의 얼굴에서는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지만, 그런 감정은 철용의 부산함에 곧 흐트러졌다. 단숨에 말에서 뛰어내린 철용이 빠른 걸음으로 마현과 낯선 두 사내 앞으로 다가선 것이다.

그리고는 민머리 사내를 향해 절도 있는 자세로 특이한 군례를 취했다.

“충!”

이어 흑발의 사내도 철용을 향해 군례를 취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누구야?”

왕귀진과 검세옥을 본 흑사신들은 기쁨을 감추지 않고 그 둘에게로 다가갔다.

“누구……쇼?”

“흑사신들이다.”

마현이 짧게 그들이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예에?”

왕귀진은 놀란 목소리로 흑사신들의 얼굴을 훑었다.

“이곳으로 넘어오며 신체를 얻었다.”

마현의 그런 설명에도 쉽사리 납득을 할 수 없었던지 왕귀진은 앞으로 조금 다가서며 그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죽을래? 앙?”

흑도가 머리를 쑥 내밀며 윽박질렀다.

“하하하, 맞는 모양입니다.”

무안함을 느낀 모양인지 민머리를 박박 긁으며 왕귀진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허리를 깊게 숙였다.

“새로운 신체를 얻은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러면 뭐해? 몸뚱이가 형편이 없는걸.”

흑도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되어 나도 반갑구나.”

흑권이 왕귀진을 향해 부드럽게 재회의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그들이 오랜 해후의 기쁨을 나눌 때 아이작은 굳은 얼굴로 말에 올라탔다.

그런 아이작에게 자브라가 말을 건넸지만 돌아온 대답은 침묵뿐이었다. 평소 그라면 온갖 미사여구를 이용해 대답을 했을 텐데, 그렇지 않으니 자브라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케이슨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었나요?”

당연히 단원들의 시선이 케이슨에게로 향했다.

이내 단원들은 케이슨의 얼굴도 아이작에 비해서는 덜하지만 긴장으로 살짝 굳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금 충격을 받은 모양이요.”

“……충격요? 케이슨, 당신도 충격을 받은 거 같은데요.”

자브라의 말에 케이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저기 저 둘, 카칸의 수하요. 카칸을 따라서 왔다는 다른 대륙의…….”

“그런데요?”

“저기 흑발의 사내.”

케이슨의 목소리에 단원들의 이목이 검세옥에게로 쏠렸다.

“소드마스터요.”

“저, 정말인가요? 나이도 아이작과 그다지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자브라는 질렸다는 듯이 흑발의 젊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문제는 단지 그의 실력을 본 것만으로도 기가 꺾일 정도로 강자라는 것이오. 거기에 그는 고작 카칸을 모시는 기사단의 일개 단원이라는 것이오.”

자브라의 부드러운 눈이 화등잔처럼 크게 떠졌고, 동시에 다른 단원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오면서 카칸에게 물었소. 그랬더니…….”

“그랬더니?”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밀러가 추임새를 넣었다.

“그 기사단에서 저 흑발의 사내가 약한 축에 드는 편이라고 하더군.”

“세, 세상에!”

자브라는 더 이상 놀랄 수 없을 정도로 경악성을 터트렸다.

‘우물 안에 개구리라, 꼭 나를 지칭하는 말이군. 휴우.’

단원들의 호들갑스러움이 들리지 않는지, 아이작은 망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잘난 아이작이 아닌가?’

아이작은 정신이 번쩍 들도록 손바닥으로 뺨을 쳤다.

“읏차!”

아이작은 배에 힘을 주고 기합을 넣었다.

그 뜬금없는 기합에 흑풍대원 검세옥은 눈을 껌뻑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 * *

‘아무리 검소하다고 해도 후작가는 후작가인가?’

마현은 높은 담벼락과 굳게 닫힌 철문, 그리고 그 앞을 철통처럼 지키고 있는 사병들과 기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고, 그 앞을 지나게 된다면 절로 몸이 움츠러들게 만드는 수도에 있는 하야스 후작가의 저택은 거대한 바위처럼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현은 하야스 후작가의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척!

마현이 다가오자 사병 둘이 창을 포갰다.

“이곳은 하야스 후작가다.”

사병 뒤에 서 있던 기사가 좋은 말로 할 때 꺼지라는 듯 위협적인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마현은 그 기사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백마 네 마리가 겹쳐져 그려진 심벌이 기사의 가슴에 새겨져있었다.

아이작에게서 들은 바로는, 네 마리의 백마가 그려진 제4백마기사단은 백마기사단이지만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주로 영지의 치안유지나, 수도에 위치한 저택 등의 경비, 그리고 후작가의 사람들을 경호하는 임무를 맡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전에 보았던 백마기사단과는 확연히 다른 기도에 조금은 실망스런 마음도 들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마현과는 상관없는 일이기에 무심히 신경을 끊었다.

“하야스 후작을 만나러 왔소.”

마현의 담담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에 기사의 얼굴이 살짝 바뀌었지만 이내 콧방귀를 뀌었다.

“약속이 돼 있다면 초대장을 가지고 있을 것이오.”

만일의 일을 염려해서인지 기사는 전처럼 말을 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현을 몸을 훑는 그의 눈빛에는 조소가 담겨 있었다.

그 모습에 마현의 미간에 싸늘한 주름이 잡혔다. 슬쩍 화가 났지만 마현은 하야스 후작과 아이작을 떠올리며 참았다.

“안에 기별을 넣어주시오. 카칸이 찾아왔다고 하면 아실 거요.”

“기별을 넣으면 후작 각하께서 너를 만나 주실 듯싶으냐? 치도곤을 당하기 싫으면 썩 물러가라!”

기사는 끝까지 조소 어린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호통을 쳤다.

“누가 보면 네놈이 하야스 후작님 같구나.”

그제야 마현의 목소리도 싸늘하게 변했다.

“무어라?”

기사의 목소리도 변했다.

그가 검자루에 손을 얹으며 기세를 일으키자 덩달아 사병 둘도 마현을 향해 창을 겨누었다.

마현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하며 마력을 발산했다.

마력에 담긴 서슬 퍼런 살기가 한순간 기사의 목을 옭죄었다. 기사의 목을 스쳐 살기가 사병들에게까지 스치자 그들은 사시나무처럼 바르르 떨더니 급기야 창까지 바닥에 떨어트렸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안에 기별을 넣어라, 카칸이 왔다고.”

마현이 독한 마음을 먹는 그 순간 하야스 후작과 아이작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창백하게 질린 기사는 몸을 휘청거리더니 정문 옆에 지어져 있는 초소로 뛰어 들어갔다.

삐이―

곧이어 귀에 거슬리는 피리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이, 이곳은 몬테팔코 왕국의 검. 하, 하야스 후작가다! 이러고도 네놈이 정녕 살아서 돌아갈 줄 알았느냐!”

초소에서 나온 기사는 말도 더듬고, 다리까지 떠는 주제에 검을 뽑아드는 것도 모자라 협박까지 쏟아냈다.

“거기까지다. 더 이상은 용납하지 않는다.”

마현의 인내심도 서서히 끝을 보이고 있었다.

자박, 자박, 자바바박!

그사이 시끄러운 발자국 소리와 함께 창살로 된 정문 너머로 한 무리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냐?”

흰머리가 언뜻 보이는 장년의 기사가 다급히 상황을 살폈다.

“다, 단장님. 저, 저자가!”

기사는 반색을 하며 손가락으로 마현을 가리켰다.

마현의 매서운 눈초리가 장년의 기사단장에게 향했고, 자연스레 서슬 퍼런 살기도 눈동자를 따라 그를 향해 쏟아졌다.

그러자 장년의 기사단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찌 하야스 후작가를 상대로 무례를 저지르는 것이오?”

장년의 기사단장은 마현의 기세를 견디며 정중하게 물었다.

“무례? 지금 무례라고 그랬나?”

마현의 물음에 장년의 기사단장은 그대로 견디는 것조차 힘이 들었는지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분명 하야스 후작을 만나러 왔다고 그랬다.”

“하지만 아무나 후작 각하를…….”

“그래서 안에 기별만이라도 넣어달라고 그랬다.”

어느새 장년의 기사단장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노골적인 비아냥거림과 협박이었다. 그런데 내가 먼저 무례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는가?”

마현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더 이상 참기 어려웠는지 장년의 기사단장은 거친 숨을 쉬며 손을 들어 어렵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살기를 거둬주시면 안 되겠소?”

마현은 그런 장년의 기사단장을 한참 노려보다 살기를 거뒀다.

“크허억!”

그와 동시에 장년의 기사단장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의 입에서 거친 숨결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장년의 기사단장은 꼿꼿이 몸을 세우며 드러나지 않게 숨을 고르는 모습이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장년의 기사단장은 정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를 쳐다보았다.

“저분의 말이 사실인가?”

“그, 그런 게 아니라…….”

기사가 머뭇거리자 기사단장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사병들에게 물었다.

“사실인가?”

기사단장의 물음에 사병 둘은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함께 근무를 섰던 기사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인가 물었다!”

기사단장의 입에서 매서운 호통이 터지자 사병 둘은 흠칫하더니 이내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저희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저…….”

“됐다.”

장년의 기사단장은 시퍼런 칼날처럼 말을 잘랐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대충 어떤 일이 있었는지 판단한 기사단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분명 기사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사과하기에는 하야스 후작가의 이름이 높다. 또한 마현의 힘에 굴복하는 것 같은 모양세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허나 그냥 후작가의 이름으로 이 상황을 넘기기에는 조금 전 마현이 보여준 힘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당연히 고민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안에 기별을 넣겠소. 성함이 어떻게 되시오?”

“하야스 후작에 대한 충심이 대단하군. 좋은 판단이다.”

마현은 장년의 기사단장의 고민을 단숨에 파악했다.

충심에 대한 칭찬을 하긴 했지만 마현의 얼굴은 더욱 차가워졌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마현은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정문을 발로 후려쳤다.

콰광!

어린아이의 팔뚝만 한 창살로 만들어진 거대한 대문이 순식간에 부서지며 쓰러졌다.

“헉!”

족히 4미터는 되어 보이는 육중한 정문이 쓰러지며 덮치자 기사들은 기겁하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쿵!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마현은 먼지를 가르며 하야스 후작가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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