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
5화
흑도가 소멸되지 않고 그 영혼이 다른 이의 몸에 들어갔으니 풍도 그럴 가능성이 다분했다.
“풍이냐?”
푸히이이잉!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흑마는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풍이 맞습니다, 주군.”
그런 흑마 곁으로 흑도의 기사가 다가왔다.
“흑권입니다.”
기사는 포권을 취하며 자신이 흑권임을 밝혔다.
“…….”
그런 흑권 옆으로 병사 둘이 다가와 나란히 섰다.
“흑창입니다.”
“흑검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 중원의 언어로 자신들을 소개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못 볼 줄 알았던 그들이었다.
이렇게 다시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마현은 그들에게 다가가 일일이 그들의 손을 잡았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저희들도 이렇게 다시 주군을 뵐 수 있어 꿈만 같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사실 저희들도 처음에는 어떻게 된 일인지…….”
흑권과 진지한 이야기를 막 나누려는 때였다.
“주인, 나 죽어. 이 흑도 죽어. 살려줘!”
바닥을 기다시피 엉금엉금 기어온 흑도가 마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휴우.”
마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브라를 쳐다보았다.
“이 정도면 정신을 차린 듯하오. 그러니 나를 봐서라도 용서를 해주면 안 되겠소?”
자브라는 흑도를 노려보며 이를 빠드득 간 뒤 몸을 돌렸다.
“카칸 때문에 산 줄 아세요.”
“흑흑흑. 역시 주인밖에 없어.”
“이제 그만 바지나 올려라.”
마현이 낯을 찌푸렸다.
“꼴좋군.”
그 말에 주섬주섬 바지를 입은 흑도를 보며 흑검이 코웃음을 쳤다. 다른 세상에 왔어도,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서도 둘 사이는 여전한 모양이었다.
흑검의 비아냥거림에 흑도가 웬일로 발끈하지 않고 입술을 슬쩍 비틀며 웃는 것이 아닌가?
흑도는 흑검 앞으로 껄렁껄렁 걸어가 섰다.
“뭐라고?”
그리고는 능글맞게 귀에 손을 가져다대며 다시 물었다.
“꼴좋다고 그랬다, 왜?”
흑검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다시 말을 되풀이했다.
그 소리에 흑도가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너 그러다가 나 수틀리면 귀족 모독죄로 확 모가지를 쳐버린다. 이 미천한 농·노·야! 음트트트트트트!”
흑도는 얄궂은 웃음을 이빨 사이로 마구 뽑아냈다.
빠드득.
흑검이 뺨을 씰룩거리며 이빨을 마구 갈았다.
“하이구야, 잘만하면 귀족 치겠네.”
“죽고 싶지?”
흑도와 흑검이 얼굴을 바싹 가져다대며 서로 으르렁거렸다.
“그만!”
결국 흑권이 나섰다.
“휴우.”
마현도 그 모습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 세계에 와서까지 어떻게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 * *
한바탕 시끄럽게 인사를 나눈 후 마현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니까 지금의 몸에서 눈을 떴다?”
“나도 처음에 엄청 황당했다니까.”
흑도였다.
흑사신의 말을 빌면 마현이 넘어오며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는데 그때 원래 몸의 주인들이 그 폭발에 휘말렸다고 했다. 아마도 그 폭발로 몸의 주인들이 죽은 직후 자신들의 영혼이 스며든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 부분은 신들의 영역이라서 딱히 명확한 답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마현의 생각 역시 흑사신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전 주인들의 기억들이 스며들어 다행이군.”
이들이 눈을 뜨고 이제껏 큰 문제없이 자신을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원 주인의 모든 기억까지는 아니지만 다행히 대부분의 기억을 흑사신이 흡수한 것이다.
“그래 지금 신분은 어떻게 되지?”
“나는 허영심을 가득한 돈 많은 상인의 장남이고, 전 재산의 절반을 뇌물로 바쳐 준남작 자리를 돈으로 산 멍청한 놈.”
“멍청한 놈의 몸에 멍청한 놈이 들어갔으니 제대로 들어간 거지. 훗!”
역시나 흑검은 이죽거렸다.
“목 잘라줘? 농노야?”
그에 흑도 역시 이죽거리며 되받아쳤다.
“뭐, 이 새끼?”
“그만 하지 못해!”
결국 참지 못한 흑권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소리에 둘 다 입을 다물었지만 서로를 노려보는 것은 그만두지 않았다.
아니 다른 이들은 못 듣겠지만 분명 둘은 눈빛으로 온갖 신경전을 주고받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결국 흑권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현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보고를 올렸다.
“……흑도, 그러니까 이곳에서의 이름은 미하일입니다. 미하일은 전 재산의 절반을 뇌물로 주고 준남작 작위를 산 후 나머지의 일부 재산으로 속하를, 그러니까 이곳의 이름은 보리스입니다. 보리스를 비롯해 4명의 방랑 기사를 돈으로 고용했습니다. 그 후 남은 돈을 털어 백여 명의 농노들을 사들여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이곳에서 전과를 올려 단발성이 아닌 정식으로 귀족 작위와 함께 영지를 얻으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정말로 철없는 생각을 했었군.”
마현도 흑권의 설명에 정말 흑도의 원주인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미하일의 머릿속에 과연 뭐가 들어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래도 아주 멍청한 건 아니야. 꽤나 큰 별장이랑 몇 년 정도는 놀고먹을 정도의 돈은 남겨뒀어.”
흑도는 그래도 자신의 몸이라고 험담이 듣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머리를 굴린 흑도가 나름 자랑이라고 하긴 했는데, 그 말은 마현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리이기도 했다.
“그래? 꽤나 반가운 소리군.”
마현이 반색하자 흑도의 얼굴이 굳어졌다.
“주, 주인. ……설마 아니겠지?”
흑도의 목소리는 불안감에 휩싸여 몹시 떨리고 있었다.
“그 전에 흑도.”
“뭐, 뭐?”
흑도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흑창하고 흑검의 노예문서 내놔라.”
흑도의 얼굴이 구겨졌다.
“흑도!”
흑권이 그런 흑도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쳇!”
흑도는 투덜거리며 품에서 한 장의 문서를 꺼내 마현에게 넘겼다.
“흑창은 모르겠지만 흑검은 안 돼!”
흑도가 양손으로 가슴을 움켜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흥!”
흑검의 입술이 차갑게 말려 올라갔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재빠르게 몸을 틀며 흑도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퍽!
묵직한 타격음이 흑검의 주먹과 흑도의 얼굴 사이에서 터졌다.
“컥!”
흑도는 짧은 신음을 터트리며 썩은 고목나무처럼 뒤로 넘어갔다.
그대로 기절해 버린 것이다.
흑검은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흑도의 품을 뒤적거려 노예문서 한 장을 찾아 마현에게 넘겼다.
마현은 두 장의 노예문서를 삼매진화로 태우며 흑권을 쳐다보았다.
“그 전에 몸부터 만들어야겠군.”
“안 그래도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나마 속하는 기사의 몸이라 그럭저럭 쓸 만하지만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흑도입니다.”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는 흑도의 몸, 그러니까 원주인 미하일의 몸은 부실하다 못해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래도 전생의 기억이 있으니 금세 과거의 몸을 찾을 수 있겠지. 흑권.”
“예, 주군.”
“한동안 흑도의 돈으로 생활을 해야 하니까 너무 타박은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주군.”
분명 흑도는 기절해 있었다.
입에 거품까지 물고 있으니 확실하다.
그런데 마현의 목소리에 흑도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찔거렸다.
그 모습에 마현뿐만 아니라 흑권도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정이 가득한 눈으로 흑도를 내려다보았다.
그 후 긴 시간에 걸쳐 마현은 지금의 처지와 앞으로 흑탑을 세울 계획을 간략하게 알려준 후, 이들과 일단 헤어졌다. 보리스, 마르케스, 비센, 미하일이 흑사신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현과의 관계에서나 해당될 뿐 현재 외부적으로 그들은 전쟁에 참여한 준남작과 그의 사병들이었다.
그렇기에 전쟁이 끝나는 시점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후 흑도는 눈을 뜨고 세상을 다 산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고 한다.
“우어어어어어어!”
이렇게.
* * *
며칠 후, 초저녁 마현과 케이슨은 포크너 후작에게 정식으로 식사를 함께 하자고 초대를 받았다.
그의 군막에는 포크너 후작 이외에 그동안 회의에서 종종 보았던 몇몇 지휘관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면면히 살펴보니 모르긴 몰라도 이번 전쟁에서 상당한 공로를 세운 이들이 분명했다.
마현 또한 빠짐없이 작전회의에 참석했으니 그 정도 눈썰미는 있었다.
마현과 케이슨이 들어서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친근하게 목례나 눈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들과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매일같이 작전회의를 통해 얼굴들을 익혔고, 그보다 마현으로 인해 상당히 곤욕을 치르던 전쟁을 승리로 반전시킬 수 있었기에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두터운 호의가 묻어 있었다.
거기에 소드마스터이니 이미 그들도 마현을 준귀족으로 대접하고 있었던 것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마현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흥!”
그런 마현의 귓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그 방향을 쳐다보니 자리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나집이 보였다.
분위기로 봐서 이번 전쟁에서 상당한 공로가 인정되는 지휘관들 위주로 모인 것이 분명했다. 헌데 아무 공로도 세운 적 없는 나집이 그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으니 마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가?’
“다들 앉게.”
포크너 후작의 말에 마현과 케이슨은 비어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금 전 종전협정을 마무리했다는 보고가 있었네. 공식적으로는 내일 발표가 될 거라더군.”
포크너 후작은 탁자를 빙 둘러 앉아 있는 이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내일 종전이 선포된 후 그대들의 공로에 따른 상훈을 정식으로 발표하겠지만…….”
포크너 후작의 말에 지휘관들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내일이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만 미리 그 결과를 듣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
그런 지휘관들의 눈빛을 마주하며 포크너 후작이 어인 일인지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싶은 겐가?”
“옙!”
미리 입이라도 한 번 맞춰본 듯 씩씩하게 한 목소리를 터트렸다.
“쯧쯧쯧.”
그 모습에 포크너 후작이 혀를 찼지만 전처럼 인상을 찌푸리지는 않았다.
“작전회의 때 그런 모습은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더니만.”
포크너 후작의 타박에 지휘관들은 쑥스러운 미소만 지을 뿐 얼굴을 붉히지는 않았다.
“나집 백작.”
“큼, 말씀하십시오.”
나집은 ‘백작’이라는 호칭에 마땅찮은 기침을 삼키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런 그의 행동이 못마땅했던지 포크너 후작도 눈가에 주름을 잡았지만 뭐라 질책하지는 않았다. 제아무리 포크너 후작이라고 해도 나집의 아버지인 클로드 공작의 그림자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용병연대장의 직무로써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이용해 본국의 결정적인 승리에 기여한 바가 인정돼 이번에 후작 작위가 내려졌네. 나집 백작은 클로드 공작가를 계승하는 장자이기에 다른 상훈은 생략되었네.”
마현의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그 같은 결정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현이 관여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