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무림에 가다-279화 (279/351)

# 279

3화

“나를 소드마스터로 만들어주던가, 아니면 내 여동생의 병을 고쳐줘. 그렇게 해준다면 목숨이라도 주지.”

마현의 눈동자에 이채가 일었다.

“그래서 악착같이 돈에 집착했던 모양이군.”

“해줄 수 있어, 없어?”

제이든은 다짜고짜 윽박지르듯이 물었다.

“해주지. 둘 다!”

“저, 정말인가?”

제이든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 대신 네 목숨은 내꺼다. 그 점 명심하도록.”

“좋아, 주지. 주겠어. 하지만 약속은 꼭 지켜.”

“그러지.”

마현은 옅은 웃음을 곁들어 대답하며 케이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자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군.”

마현은 20여 년 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흑마법사였다.

“전처럼 대하시면 됩니다.”

마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오히려 케이슨이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케이슨 용병기사단은 자네와 함께하기로 했네.”

“이제 남은 건, 단장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이로군요.”

“그런가? 그렇군. 이제는 내 차례군.”

케이슨의 멋쩍은 미소는 쓰디쓴 웃음으로 바뀌었다.

“오늘 밤, 술 한 잔 하겠나?”

“포크너 후작에게 말해서 좋은 와인 몇 병 얻어야겠습니다.”

“좋은 와인이라……, 그보다는 독한 것이었으면 좋겠군.”

“그럼 위스키가 좋겠군요.”

쓴 추억에는 쓰고 독한 술이 잘 어울리는 법이다.

* * *

그날 저녁.

타닥타닥.

나무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깊어지는 밤을 대신 알리고 있었다.

케이슨 용병기사단원들은 군막 옆에 피운 모닥불 주위로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단원들 사이로 포크너 후작이 보내준 고급 위스키인 시랠 몇 병과 전장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고급 안줏거리가 놓여 있었다.

평소에도 구경하기 힘든 진수성찬임에도 불구하고 안줏거리는 거의 그대로였고, 시랠이 담겨 있던 빈 병만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이게 내 삶이었소.”

케이슨의 이야기를 듣고자 모인 자리였건만 어찌된 일인지 마현의 살아온 날들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마현이 워낙 짧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했기에 모두가 그의 삶을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모두 진실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무림이라는 다른 세상은 미지의 대륙이라는 말로 둘러댔고, 그밖에 이곳 하르센 대륙과 어울리지 않는 것들은 최대한 비슷한 상황으로 돌려 말을 한 것이다.

“다시 돌아가고 싶겠군요.”

자브라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물론 돌아갈 것이오.”

마현은 투박한 나무 술잔에 담긴 시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타는 듯한 화끈거리는 느낌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전에 복수도 할 것이며 흑탑도 만들 것이오. 그런 다음에……, 돌아갈 것이오.”

마현의 표정에는 강한 의지가 묻어 있었다.

“젠장, 괜히 들었군.”

제이든이 툴툴거리며 술잔을 비웠다.

그도 마현의 지나온 삶을 듣고 나니 꽤나 가슴이 시린 모양이었다. 그레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이든의 어깨를 꽉 움켜잡고는 옆으로 흔들었다.

“이 새끼, 심심하면 내 몸을 잡아 흔들고 지랄이야, 지랄이.”

“흐흐흐.”

제이든이 얼굴을 찌푸리며 타박해도 그레오는 그냥 짓궂은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후우, 이제 내 차례인가?”

케이슨이었다.

“……케이슨.”

자브라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괜찮아. 언제까지 숨길 일도 아니고.”

그는 답답한지 몇 잔 연거푸 독한 시랠을 쉬지 않고 입에 털어 넣었다.

“나는 그저 평범한 농부의 자식이었다.”

케이슨은 슬픈 얼굴로 회상에 잠겼다.

그의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에 단원들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왜냐하면 밀러와 자브라를 제외하고는 케이슨의 과거를 알지 못했던 까닭이다.

다만 대륙 최강의 용병대로 일컬어지는 검은여우 용병대와 그 용병대장인 미겔과 악연으로 얽혀있다는 것 정도만 다들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검은여우 용병대의 대장이자 현재 소드마스터인 미겔과 나, 그리고…….”

케이슨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자브라를 쳐다보았다.

“자브라, 이렇게 셋은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우리 셋은 언제나 함께였고, 고향을 떠날 때도 함께였다. 지긋지긋한 가난도 고향을 떠난 이유였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영웅이란 부질없는 이름에 사로잡혀 허황된 꿈을 꾸었기 때문이지. 그때는 세상에 나가면 금방 세상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녹록한 곳이 아니었지.”

케이슨은 회상에 잠긴 눈빛으로 시랠을 한 잔 더 들이켰다.

“용병이 되고자 고향을 뛰쳐나왔지만 우리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나이도 어린데다가 검 한 번 잡지 못한 우리를 받아줄 곳은 없었지. 그렇다고 어디에서 일할 처지도 되지 못한 우리는 한동안 거지로 떠돌았다. 그러다가 자그만 소매치기 길드에 잡혀 소매치기가 되었다.”

케이슨의 삶은, 아니 그와 함께한 자브라와의 삶은 참으로 고달프고 험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게 셋은 소매치기 길드에서 처음으로 검을 다루는 것을 배웠고, 사람을 죽이는 법도 배웠다. 하지만 밑바닥의 세상이 다 그렇듯 그들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소매치기 길드, 아니 길드라고 하기도 민망한 소매치기 패거리의 대장은 인간 말종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이 감당해야 할 착취와 구타는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그나마 먹고 잘 수 있는 집이 있어 그 셋은 서로를 끌어안고 하루하루를 참고 인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위기는 자브라의 나이가 차면서 찾아왔다. 그녀가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숙해가자 주위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탐욕스러운 소매치기 대장이 그녀를 가만둘 리 없었다. 어느 날 소매치기 대장이 그녀를 강제로 침소로 데려간 날 결국 사단이 일어났다.

당연히 머리 꼭대기까지 피가 차오르고 눈이 뒤집어진 케이슨과 미겔은 소매치기 대장을 죽이고 소매치기 길드에서 도망친 것이다.

하지만 그 셋은 다시 거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뒷골목에서 나름 잔뼈가 굵었고, 어설프지만 검도 배운 터였다. 그들은 용병길드를 통해 D급 용병의 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셋은 나름 이름이 알려진 중견 용병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내일의 삶을 기약할 수 없는 용병들 사이에서는 거친 것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남자들끼리만 있을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여자가 끼어 있다면 달라진다.

그렇기에 그 용병대에서도 자브라의 미모로 인해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몇몇 용병이 사전에 공모를 하고 자브라를 겁탈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 사실을 미연에 안 케이슨과 미겔은 그 용병들을 모조리 죽였고, 그로 인해 용병대에서 강제 퇴출을 당했다. 그나마 죽은 그들의 죄질이 무겁고, 평소 품행이 좋지 않아서 그 정도로 끝난 것이 천운이라면 천운이었다.

그 이후 셋은 어디에 소속되지 않은 채 개인용병으로 활동했다.

이미 한 번 큰 말썽을 일으켰고, 겨우 D급 용병인 그들에게 괜찮은 일거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른 용병들이 기피하는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했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일을 나섰다.

그들이 워낙 독기에 사로잡혀 일을 처리했기에 같은 용병들마저도 슬금슬금 피할 정도로 세 사람은 독종으로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

하지만 그 시절 셋은 행복했다.

적은 돈이지만 알뜰하게 모아 보금자리도 만들었고, 그러는 사이 C급 용병으로 승급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들은 다른 용병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들이 다른 이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은 것도 원인이었지만 그보다는 다른 용병들이 그들을 기피했던 것이다.

모두가 그들을 피할 때 따뜻하게 웃음을 보내준 이가 바로 밀러였다.

물론 밀러는 그 당시 다른 용병대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몇 년 후 그 용병대가 해체되면서 혼자가 된 밀러는 다른 용병대로 들어가지 않고 이들과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다.

마법사 밀러의 영입으로 한층 운신의 폭이 넓어진 그들은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전쟁에 참여하면 전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가 있다. 동시에 명성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그렇게 명성이 쌓이면 더욱 큰일을 맡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터는 생각만큼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생사를 넘나드는 아귀들의 세상이었고, 용병들의 삶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처절했다. 그들은 명성을 쌓기는커녕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하기에 바빴다.

그런 그들에게 운명을 반전시킬 천운이 찾아왔다. 전장에서 상처 입은 몰락한 귀족가의 기사를 구하면서 그들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기사의 이름은 베르장이었다.

그가 모시던 귀족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자 돌아갈 곳이 사라져버린 몰락귀족의 수석기사였던 베르장은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잃고 한동안 방황했다. 하지만 케이슨과 미겔, 자브라, 그리고 밀러의 따뜻한 손길에 조금씩 삶의 의욕을 되찾게 되었다.

베르장은 기사로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검술이 출중했음에도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기사의 작위를 버리고 용병이 되었다.

그리고 베르장의 의견대로 이 다섯 명이 주축이 되어 용병대를 창설하게 되는데, 그 용병대의 이름이 바로 검은여우 용병대였다.

검은여우 용병대의 상징인 검은여우는 바로 베르장이 모시던 귀족가문의 상징이기도 했다.

사정이야 어떻던 용병대를 창설한 베르장은 이들을 데리고 전장에서 빠져나와 인적이 없는 숲으로 들어갔다.

케이슨과 미겔, 그리고 자브라에게 본격적으로 검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베르장은 자신이 모시던 귀족가의 독문검술을 제외한 모든 검술을 케이슨과 미겔, 그리고 자브라에게 전수했다. 귀족가의 독문검술까지 가르쳐 달라고 간혹 미겔이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베르장은 거기에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혹시 살아 있을지도 모를 후손 때문에라도 지금은 안 된다고 한 것이다. 후에 정말로 후손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그때 전수해 주겠다고 언질을 주었지만 여전히 미겔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자주 내보이고는 했다.

그게 불행의 씨앗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들 다섯은 한 가족이라고 모두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베르장은 아버지처럼, 밀러는 어머니처럼, 그리고 셋은 어른이 되어가는 자식들처럼 2년 동안의 산속 수련생활은 그들에게 잊을 수 없는 행복을 주었던 것이다.

마치 신의 축복처럼.

그렇게 산속에서 2년의 시간을 보낸 후 검은여우 용병대는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다.

고작 다섯 명뿐인 용병대였지만 그들의 전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전원 소드익스퍼트의 실력에 4서클의 마법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그들의 막강한 전력이 용병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단숨에 명성을 쌓은 그들은 미겔의 강력한 주장으로 차츰 덩치를 키워나갔다.

그런 점이 베르장은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미 미겔을 자식으로 생각하는 그였기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심정으로 미겔의 뜻을 모두 받아준 것이다.

검은여우 용병대의 규모가 커지자 모든 것이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처음 창설할 때의 가족처럼 따뜻하고 정의로운 용병대의 기치는 서서히 희석되어갔고, 어느새 이권을 탐닉하는 일반적인 용병대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큰 이권이 걸린 일이면 악랄한 일도 서슴지 않았고, 그 중심에는 늘 미겔이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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