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
20화
케이슨은 왕국 내 기사들이 그 실력만은 인정하는 마르틴을 꺾었으며, 마현은 왕국이 자랑하는 하야스 후작과 동수를 이룰 정도로 출중한 검술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소드 마스터 자리에 오른 아이작마저 이 용병기사단 소속이니 더 이상 말해봐야 입만 아플 뿐이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케이슨 용병기사단은 비록 그 수는 8명에 불과하지만 왕국을 떠나 대륙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기사단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휘관들은 적어도 케이슨 용병기사단으로 인해 이 불리한 전장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호전시키리라 믿었다. 물론 그들이 참전한다고 전세가 완전히 뒤바뀌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기사단 전력의 차이 때문에 처참한 패배를 더 이상 맛보지 않아도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인사는 나중에 개인적으로 하고.”
포크너 후작은 자연스레 마현과 케이슨에게 쏠린 이목을 자신에게 향하게 했다.
“먼저 나집 용병연대장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오늘 회의에 불참했다. 작전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케이슨 단장?”
“예, 군단장님.”
“그대의 용병기사단이 어느 정도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
당연히 그 질문을 받자 케이슨은 마현을 쳐다보았다. 그에 대한 답은 케이슨 자신보다 마현이 하는 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적국 기사단 1개 부대. 그 정도면 무난합니다.』
마현의 이상한 목소리가 다시 케이슨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케이슨은 흠칫 했지만, 곧 표정을 수습하며 그대로 말했다.
“적국 기사단 1개 부대 정도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전장에서 기사단 1개 부대면 대략 30명 안팎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군.”
포크너 후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기사단의 수는 고작 8명.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지휘관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수적 차이에 대해서 말하는 이는 없었다.
왜냐하면 독립된 어느 기사단 중 한 기사단에 소드 마스터를 2명이나 가진 곳은 대륙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부사령관님.”
포크너 후작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하야스 후작을 불렀다. 둘 사이는 친구지만 이곳은 공식 자리. 하야스 후작이 포크너 후작의 엄연한 상관인 까닭에 말을 높였다.
“작전회의 후에 인수인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지요.”
하야스 후작도 말을 높여 포크너 후작을 존대해 주었다.
“그렇다면 회의를 시작하지.”
포크너 후작의 말에 그의 부관인 고디머 자작이 한쪽 벽에 지도를 펼쳤다.
그렇게 시작된 회의는 장장 2시간이나 이어졌다.
회의 내내 분위기는 상당히 밝았다.
그 이유는 바로 오늘 처음 회의에 참가한 용병기사단 때문이었다.
8전선이 연이어 패배를 당한 이유는 적국인 브루넬로 왕국 측의 강력한 기사단, 라케르크 백작이 이끄는 라케르크 제1기사단 때문이었다.
라케르크 백작의 휘하에는 제1기사단을 비롯해 제2기사단과 제3기사단이 존재한다. 그중 제1기사단은 라케르크 백작의 휘하 기사들 중에 고르고 고른 정예를 모아 라케르크 백작이 직접 이끄는 기사단이었다.
소드 마스터인 라케르크 백작과 기사들의 대부분이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거나 상급이었다. 게다가 단단한 조직력를 토대로 드러내는 무력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그들은 항상 8군단에게 쓰디쓴 패배를 안기는 기사단인 것이다.
그런 라케르크 제1기사단의 무력을 막아줄 기사단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8군단 소속 지휘관들에게는 상당히 기쁜 일이었다.
‘우리가 맡아야 할 적이 바로 라케르크 제1기사단이겠군. 거기에 소드 마스터 라케르크라. 나쁘지 않군.’
의외로 계약 이행이 쉽게 될 것 같았다.
마현과 케이슨은 회의에서 그다지 할 것이 없었다.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역할이 라케르크 제1기사단을 막는 것과 가장 취약한 지점을 지원하는 것이니 전장에서 상황에 따라, 포크너 후작의 명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2시간에 걸쳐 이어진 회의가 끝난 후 마현은 하야스 후작을 개인적으로 만나 전장에 관한 것을 인수인계 받았다. 사실 그 내용이야 특별한 것은 없었고, 다만 아이작을 잘 부탁한다는 하야스 후작의 특별당부가 첨가되었다.
* * *
전장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
푸히이잉!
한 마리 전마가 길게 울음을 토해냈다.
꿈틀거리는 전마의 잔 근육이 안장을 타고 느껴졌다. 좋은 전마이지만 마현에게는 그다지 눈에 차지 않았다.
‘다크스티드를 다시 만들어야 하나?’
마현은 자신의 애마였던 ‘풍’을 떠올렸다.
하르센 대륙으로 넘어오며 자신의 권속 아래 있던 흑사신을 비롯해 암사령, 그리고 풍이 사라졌다. 그들은 자신과 달리 차원을 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마도 소멸되었겠지?’
마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케이슨이 옆으로 다가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왠지 슬퍼 보이는군.”
“옛 친구들이 갑자기 떠오르는군요.”
암사령들이야 흑사신 아래 귀속되어 있기에 그다지 큰 추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흑사신은 달랐다.
‘보고 싶군.’
하지만 마현은 잠시 마음속에 깃든 감상을 곧바로 털어 버렸다.
그들이 그립기는 했지만 지금 뒤에 있는 이들은 자신이 이끌어야 할 산자들이다. 헛된 상념이 자칫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을 경계해야 했다.
“밀러 님. 상태는 어떻습니까?”
“일단 당장 쓸 수 있는 걸로만 익혔네.”
“잘하셨습니다.”
마현은 시선을 돌려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어제 느낀 기분은 잠시 잊어. 전장에서 마나가 고갈되는 순간 너만 죽는 게 아니다.”
“전쟁 한두 번 치러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이작은 그답게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단장.”
“후우, 조금 긴장이 되긴 하지만 크게 무리하지는 않겠네.”
마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작과 케이슨을 동시에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뒤에서 떨어지면 안 됩니다. 아울러 다른 단원들이 이탈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자브라, 야솝. 둘은 밀러 님이 우선이야.”
“넵!”
“알겠어요, 카칸.”
마현은 단원들의 얼굴을 일일이 쳐다본 후 다시 전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칸 부단장!”
포크너 후작이 마현을 불렀다.
“예, 군단장님.”
“좌측 구릉, 거기 제3천인대 쪽의 적진을 한바탕 휘저어 봐.”
그곳은 몬테팔코 왕국이 선전하는 곳이었다.
“작전을 바꿨다. 빌어먹을 브루넬로 왕국이 자주 써먹던 방법으로 한 방 먹이고 싶어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마현은 제3천인대가 있는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전투 준비!”
마현이 출전할 전장을 쳐다보며 나직한 명을 내렸다. 이어 케이슨 용병기사단 사이에서 은은한 마나가 피어났다.
츄라라락!
마치 낱장으로 된 얇은 철판들이 펼쳐지는 듯한 소리가 만들어졌다. 반짝이는 은빛 금속이 허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앞가슴과 등을 둘러싸며 이내 두 팔을 둘러쌌다. 그와 같은 방향으로 하체를 감싸고 두 다리를 비롯해 발까지 완벽히 에워쌌다.
촤르륵!
이어 다시 한 번 소리가 만들어지며 투구가 만들어졌다.
일반적인 용병들의 외형에서 크게 다르지 않던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의 모습은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웅장하기까지 했다.
‘카이샨 메일이 유지하는 시간은 2시간.’
마현 자신과 케이슨, 그리고 아이작은 마나가 고갈되는 시간까지 카이샨 메일을 유지할 수 있지만 다른 단원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내부의 마나를 외부로 표출시킬 수 없기에 카이샨 메일에 삽입되어 있는 마나석에 담긴 마나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스르릉!
마현은 허리에서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고삐를 당기며 군마의 아랫배를 찼다.
“이럇!”
푸히이잉!
군마는 거친 투레질과 함께 힘차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자욱한 먼지가 피워나며 잠시 형체가 가려진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보며 포크너 후작은 망원경을 집어 들었다.
‘랜서가 없는 기사단이라…….’
그들이 어떤 활약을 해줄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기대감을 내리누르며 포크너 후작은 망원경으로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뒤를 바싹 좇았다.
* * *
마현은 아이작과 의논 끝에 랜서를 없앴다.
보기와 달리 랜서를 이용한 차징이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 말 위에서 능숙하게 랜서를 다루려면 상당한 수련과 요령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익혀 사용할 수 있는 전법이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기사단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돌파력은 필요한 법이다.
그 문제는 마현이 책임지기로 했다.
후우우웅!
그렇기에 마현은 처음부터 롱소드에 마나를 담았다.
2시간, 처음부터 단원들과 시간을 맞춘 것이다. 그렇기에 마력을 아끼지 않았다.
마현은 적국 병사들이 보이자 곧바로 마나를 날렸다. 십여 줄기의 마나는 여지없이 운집한 병사들의 몸을 갈랐다.
“으아악!”
피가 튀고 비명이 그 뒤를 이었다.
마현은 무조건 보이는 대로 브루넬로 왕국의 병사들을 베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케이슨과 아이작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기 때문이었다.
척 척 척!
마현이 전진하는 전방에서 중보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굵고 튼튼한 창을 케이슨 용병기사단을 향해 내밀었다.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도록 일종의 인간 목책을 만든 것이다.
이대로 질주한다면 시퍼렇게 반짝이는 창날에 군마들이 여지없이 꿰뚫릴 것이다.
하지만 마현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밀러 님!”
“준비하고 있었네.”
케이슨 용병기사단 중앙에서 상당한 량의 마나가 꿈틀거렸다. 이어 중얼거리는 밀러의 목소리 끝에 낭랑한 마법 시전어가 터져 나왔다.
“파이어 볼!”
쿠웅!
한 덩이의 시뻘건 화마가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중앙에서 솟구쳤다. 하늘 끝까지 치솟을 것만 같던 파이어 볼은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져 브로넬로 왕국 측 중보병 위로 떨어졌다.
콰과과광!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덩이는 순식간에 주위로 퍼져나갔고, 단단하게 앞을 막고 있던 인간 목책이 허물어졌다.
그다지 큰 틈은 아니지만 상관없었다.
약간의 틈만 있다면 마현이 힘으로 돌파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흐압!”
마현은 롱소드에 마나를 담았다. 그리고 부서진 인간 목책의 틈이 다시 메워지기 전에 검을 날리며 더욱 속도를 박찼다.
그 거침없는 케이슨 용병기사단의 무력에 브루넬로 왕국 측 전열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둥둥둥둥둥― 뿌우웅―
그러자 브루넬로 왕국 측에서는 긴박한 북소리와 고동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 살기를 진득하게 머금은 한 무리의 마나가 느껴졌다.
마현은 말을 멈춰 세운 후 상당한 마나가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케르크 백작과 그의 제1기사단이겠군.’
마현은 입언저리를 비틀어 올리며 롱소드를 강하게 움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