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
17화
아이작은 흰 빵 한 조각을 입에 넣다가 말고 히죽 웃었다.
“너무 노골적이군.”
나집의 기사단에게서 적개심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고의적으로 시비를 걸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흠…….”
케이슨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그래도 자네가 있으니 큰일은 벌어지지 않겠지?”
케이슨은 드러내놓고 적의를 표출시키는 나집의 호위기사단을 시름이 잠긴 눈으로 쳐다보다가 마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저놈들은 카칸 부단장이 소드 마스터인 것도 모를걸요.”
아이작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걸렸다.
“설마…….”
곳곳에서 밀약하는 적국의 첩자들에게 기밀이 누출되지 않도록 소문을 모두 막아 놓았다지만 기사를 비롯해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알 만한 이들은 모두 알고 있는 것이 바로 마현의 정체였다. 아마 소문은 용병들에게까지 암암리에 퍼져나갔을 것이다.
“단장은 나집이 어떤 놈인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 않나요?”
아이작은 빵을 삼키더니 스프를 그릇째 들어 후르륵 마셨다.
이럴 때 보면 아이작이 정말 어릴 때부터 예법을 몸에 익힌 귀족이 맞나 싶을 정도다.
“그렇긴 하지만.”
하지만 케이슨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 녀석, 자기가 8군단장인 포크너 후작보다 더 높다고 여길 겁니다. 그러니 다른 귀족들과의 사이가 원만할 리가 있겠습니까? 여기가 전장이 아니라면 파리 떼처럼 그의 곁에 몇몇 귀족들이 꼬여들겠지만, 아쉽게도 8군단은 포크너 후작님의 사람들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거든요. 결론은 멍청한 놈이라는 거죠.”
아이작은 다시 빵을 입에 넣었다.
“둘은 사이가 별로 안 좋은 모양이야?”
그동안 조용히 있던 마현이 불쑥 입을 열었다.
“어릴 적부터 하도 깐죽거리기에 제가 손을 한 번 봐줬지요.”
“손을?”
아이작은 어제부터 마현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마현이 보여준 능력이 그를 자연스럽게 굴복시킨 것이다.
마현은 호기심이라도 생긴 듯 눈을 빛내며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날 잡아서 개 패듯이 한 번 패줬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케이슨도 호기심이 동했는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아이작을 채근했다.
“별거 없습니다. 그냥 아카데미 시절 유흥에 가까운 기사학부 토너먼트 대회에서 바지에 오줌을 지릴 정도로 패준 것뿐입니다. 하하하하.”
“그래서 오줌싸개라고 불렀구먼.”
케이슨은 아이작의 말투에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남들이 듣기에 유쾌한 얘기인 건 맞지만 조금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더 틀어질 것도 없는 사이겠군?”
마현이 아이작의 손에 들린 하얀 빵을 빼앗아 들었다.
“엇? 아무리 부단장이라고 해도 그렇지,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아이작이 다시 마현의 손에 들린 빵을 빼앗으려 했다.
“빵은 나중에 먹고.”
마현이 턱으로 나집의 호위기사단을 가리켰다.
“가서 시비 좀 걸고 와.”
“예?”
마현의 손에 들린 빵을 향해 휘적거리던 아이작의 팔이 뚝 멈췄다.
“자, 자네?”
케이슨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내일부터 우리도 참전을 해야 하니 아마 저녁 시간 이후 8군단 작전회의에 참석해야 할 겁니다. 이왕 등장할 거면 크게 터트리는 게 좋을 겁니다.”
마현은 아이작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혼자서 검을 휘두르며 고민하는 것보다 때로는 상대를 두고 부딪혀보는 것이 수련에는 더 좋지 않겠나.”
아이작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리고 단장 역시 내일보다 오늘 실전을 거치는 게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케이슨은 마현을 쳐다보다가 아이작과 눈을 마주쳤다.
“으아아. 모르겠다!”
아이작은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모든 거 포기하고 들어왔는데 까짓 것 까라는 거 다 까 보죠. 대신!”
아이작이 허리를 숙이며 얼굴을 마현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5년 안에 나를 무조건 소드 마스터로 만들어 줘야 합니다. 아니면…….”
“약속하지. 그러니 갔다 와. 단장도 준비하시죠.”
“휴우.”
케이슨은 한숨인지 아니면 전열을 가다듬기 위한 숨고르기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호흡을 내쉬었다.
아이작이 나집의 기사들에게 다가갈 때 마현은 한스를 불렀다.
“심부름 하나 해야겠다.”
“뭔데요?”
“하야스 후작님을 모시고 오너라.”
마현은 케이슨이 듣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게 일렀다.
* * *
그 사이 아이작은 나집의 호위기사단이 모여 있는 곳 앞으로 가 걸음을 멈췄다.
“어이.”
아이작은 검집째 어깨에 척 올리며 짝다리를 짚었다.
“무슨 일이……오?”
거의 부기사단장처럼 구는 헤세였지만 아이작의 신분을 알았기에 대놓고 하대를 하지는 못했다.
“왜 노려봐?”
그런 반면 아이작은 철저하게 용병처럼 행동하고 말했다. 거칠고 무례하게!
“무슨 뜻이오?”
아이작은 검집을 헤세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나 노려봤잖아.”
눈앞에 놓인 검집을 보자 헤세의 양 뺨에 경련이 일어났다.
“시비를 거는 것이오?”
헤세는 한눈에 보기에도 힘들게 자기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시비라……, 시비는 그쪽이 먼저 걸었고.”
“그래서 한 번 해보겠다는 거요 뭐요?”
헤세는 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와 동시에 헤세의 옆에 앉아 있던 기사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시퍼런 살기를 풀풀 날렸다.
“그러자고 온 거야.”
아이작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설마 이렇게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오리라곤 예상치 못했는지, 헤세의 표정은 와락 구겨졌다.
“싸우고 싶다면 싸우게 해줘.”
그때 용병연대장 군막에서 마르틴과 나집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클로드 공작가의 기사가 한낱 천한 용병에게 무시당하면 어디 쓰겠나?”
“나 들으라고 한 소리 맞지?”
아이작은 검집을 거두며 나집을 향해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천한 성품은 여전히 버리지 못한다더니…….”
나집 역시 비릿한 미소를 드러냈다.
“헤세.”
나집 옆에 서 있던 마르틴이 나섰다.
“예, 단장님.”
“기사의 위엄을 보여줘라.”
“알겠습니다, 단장님.”
마르틴의 허락이 떨어지자 헤세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작의 어깨를 툭 치며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는 아이작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자신 앞으로 나오라는 뜻이다.
헤세는 자신이 있었다.
비록 아이작이 하야스 가문의 차남이고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라지만 자신 역시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었다. 그것도 최상급을 바라보는. 다 똑같은 상급이 아니라는 뜻이다.
거기에 자신은 아이작보다 나이가 많다. 그건 결국 연륜 또한 자신이 더 깊다는 뜻. 결코 자신이 질 이유가 없다고 헤세는 굳게 믿고 있었다.
헤세는 나집과 마르틴을 흘깃 쳐다보았다.
둘의 눈빛은 마음껏 짓밟아 버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헤세는 힘차게 검을 뽑아들었다.
헤세는 느꼈다.
이 싸움을 이김으로써 자신은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임을. 그렇게 얻게 되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나집의 호위기사단의 명실상부한 부기사단장 자리일 것이다.
‘이런 것도 나쁘지만은 않군.’
헤세 앞으로 걸어가며 아이작은 마현을 잠시 흘겨본 후 쓴웃음을 지었다.
스르릉.
아이작은 투핸드소드를 뽑아들었다.
그때였다.
임시 연무장으로 급히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아이작의 상념을 깨트렸다.
“여깁니다.”
이어 마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늦지 않아 다행이군.”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
‘아, 아버지?’
하야스 후작이 포크너 후작과 함께 임시 연무장으로 들어선 것이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하야스 후작은 헤세를 비롯해 나집에게 가볍게 말을 건넨 후 마현 곁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이작은 당황한 얼굴로 마현과 아버지 하야스 후작, 그리고 포크너 후작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마현과 눈이 마주쳤다.
『충고 하나 하지. 하야스 가문의 검술도 좋지만 너만의 검술을 만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마음대로 휘둘러 봐라.』
마현의 전음이 들려오자 기수식을 취하던 아이작의 몸이 흠칫거렸다.
마법사나 행하는 매직 마우스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아이작에게는 그걸 따질 수 있는 여유도 없었다.
지금 마현은 자신의 모든 것인 하야스 가문의 검술을 부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버지 앞에서.
아이작은 어릴 적 검을 처음 잡았을 때부터 지금껏 철저하게 하야스 가문의 검술을 익혔다.
다른 검술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하야스 가문의 검술. 한 치의 오차조차 스스로 용서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하야스 가문의 검술을 익혀온 그였다.
완벽한 검을 추구했기에 자신은 천재 검사로 이름을 날리는 형보다 더 빠르게, 더 높은 경지에 들어섰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소드 마스터에 오를 것만 같았는데 그 관문 바로 앞에서 더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것이 어느덧 3년째였다.
‘깨트리면 나갈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질문보다 먼저 드는 의문이 있었다.
‘나는 과연 우리 가문의 검술을 깨트릴 수가 있을까?’
그것도 아버지가 뻔히 지켜보고 있는 지금.
더욱이 아버지이자 스승이었던 하야스 후작은 자신에게 검술을 가르칠 때에도 하야스 가문 검술의 투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불호령을 내리지 않았던가.
아이작의 눈동자는 갈등으로 인해 파르르 요동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하야스 후작이 놓칠 리 없었다.
“카칸.”
하야스 후작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마현을 불렀다.
“시험 중입니다.”
“시험?”
“제가 계속 데리고 있을지 아니면 돌려보낼지.”
마현은 굳어지는 하야스 후작의 얼굴을 외면하며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아이작을 쳐다보던 마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의 표정에 하야스 후작도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돌려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아이작의 고민.
단지 성장통으로만 보기엔 너무 길고도 깊다.
그 앞에 펼쳐진 두 가지의 길 중 어느 것을 선택해도 상관없다. 다만 어중간한 마음이 사라지기만 하면 된다. 이왕이면 마현이 원하는 길로 들어서면 좋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이작의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