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
14화
“일단 경험이 우선이겠지.”
밀러는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려고 했다.
“군막 안에서 하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아, 이런! 내가 너무 흥분한 모양이군. 명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잊다니.”
밀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군막 안으로 들어갔다.
군막 안에 들어선 밀러는 힘겹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현이 말해 준 명상에 접어들었다. 처음에는 불편한 자세를 취하는 것을 힘겨워하고 낯설어하더니, 마법사답게 이내 고요함에 젖어들었다.
마현은 그런 밀러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른 단원들의 상태도 살폈다.
다들 마나를 이미 겪은 이들이라서 그런지 무아지경에 빠져있는 모습이었다.
마현은 조용히 소파를 들어 군막 입구 쪽에 내려놓았다.
누군가가 불쑥 들어와 이들의 명상을 깨트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생각보다 일을 크게 벌였군.’
마현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기적인 방법일지도 모르겠지만 마현은 복수의 길을 이들과 함께 걸을 생각이었다. 그것은 고통으로 가득 찬 붉은 피의 길이 될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이만한 것을 주는 것으로 마음의 부담을 털어버리기로 했다.
마현은 소파에 앉기 전 명상에 빠진 밀러의 품에서 마법서를 슬그머니 꺼내들었다. 밀러가 무아지경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 마현은 절묘한 마라독혈수공으로 감쪽같이 그의 품에서 빼낸 것이다.
마현은 밀러의 마법서를 펼쳐들었다.
그리고는 아직 밀러가 익히지 못한 4서클의 공식들을 채워나갔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어둠이 내려앉았다.
오늘의 전투가 끝났는지 밖은 어수선한 소란이 일어났다. 마현은 음파 차단 마법을 이용해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차단시켜 좀 더 편안한 공간으로 만들어줬다.
* * *
어느새 군막으로 통하는 입구로 여명을 밝히는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밤이 가고 다시 아침이 온 것이다.
마현은 눈을 조용히 뜨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한스가 무릎을 베고 자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전장에 있다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인지 한스는 미약하게 코를 골고 있었다.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기 위해 전장으로 온 아이.
마현은 한스를 보자 학성, 그러니까 손정과 거지로 떠돌 때가 떠올랐다. 그의 그런 회상은 손정뿐만 아니라 설린에게로까지 이어졌다.
가슴이 시렸다.
마현은 문득 시원한 아침 공기를 마시고 싶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울적해졌던 마음을 조금쯤 달랠 수 있었다.
‘조금만, 힘들어도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반드시 돌아갈 테니…….’
무림에서의 생활이 대략 5년. 그 사이 하르센 대륙의 시간은 20여 년이 흘렀다.
그걸 비춰봤을 때 하르센 대륙과 무림의 시간 차이는 대략 4분의 1.
사오 년의 시간이라면 무림에서는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를 것이다.
‘돌아간다, 반드시!’
마현은 저 멀리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주먹을 굳게 말아 쥐었다.
* * *
군막 안에서 명상에 빠져 있던 단원들이 눈을 뜬 것은 날이 밝고 나서도 한참 후, 다시 용병들이 전장에 나가고 진지는 적막감이 흐르기 시작한 뒤였다.
가장 먼저 군막을 나온 이는 케이슨이었다.
“아침?”
어제 정오가 막 지났을 무렵에 명상에 들어갔었다.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 아침이니 케이슨은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내가 밤을 꼬박 새운 건가?”
케이슨은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하늘 꼭대기로 올라가는 해를 쳐다보며 물었다.
“몸은 어떻습니까?”
마현의 물음에 케이슨이 곧바로 대답했다.
“몸은 가볍고 머리는 맑군. 밤을 지새웠음에도 말이야.”
케이슨은 몸이 전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음을 새삼 깨달았는지 신기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마나를 배꼽 부근에 모아야 하는 건가?”
그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당장은 답답하겠지만 그 이유를 잠시 후에 설명해 준다고 하니 케이슨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던 케이슨이 낯을 살짝 찌푸리며 코를 킁킁거렸다.
“이게 무슨 냄새지? 하루 정도 안 씻었다고 이런 냄새가 나나?”
케이슨은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다가 결국 코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 한동안 명상을 하고 나면 고약한 냄새가 날 겁니다.”
“그, 그런가?”
전혀 반갑지 않은 말이었는지 케이슨은 말을 살짝 더듬었다.
“한스야, 아직 멀었냐?”
“지금 다 되었어요.”
군막 옆에서 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욕물이 준비되었을 겁니다. 일단 씻는 게 우선일 것 같습니다.”
“그러지. 이거야 원, 내가 못 참겠네.”
케이슨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군막 옆에 마련된 임시 목욕실로 향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단원들도 오만 인상을 쓰며 군막에서 나왔다. 아마도 그들의 몸에서 풍긴 퀴퀴한 냄새가 군막 안을 가득 채웠기 때문일 것이다.
“자, 자네…….”
밀러가 다가와 마현의 어깨를 짚었다.
“군막 안에…….”
밀러가 무엇을 물어보는지 마현은 알고 있었다.
아마 음파차단 마법을 펼쳐놓은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마현을 쳐다보는 밀러의 손은 눈동자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때 마지막으로 아이작이 걸어 나왔다.
“나중에 하죠.”
마현은 손을 저어 음파차단 마법을 지웠다.
마나의 파장을 느낀 밀러의 눈가는 경련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바르르 떨렸다.
“일단 마법서부터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현의 말에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밀러는 다급히 품에서 마법서를 꺼내 펼쳤다. 그때 그의 눈동자는 더욱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가능하면 모레 전장에 나서기 전까지 모두 익히지는 못해도 숙지해 놓으셨으면 합니다.”
마현은 밀러의 어깨를 살짝 짚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는 아이작에게로 다가갔다.
“한결 좋아 보이는군.”
“휴우.”
잠시 한숨을 내쉰 아이작의 얼굴에서는 전처럼 가벼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걸 함부로 알려줘도 되는 건가?”
“5년 동안 내 일을 도와야 할 테니, 그에 따른 보상이라고 해두지.”
“보상이라……, 어떤 일을 할지는 몰라도 과분한 것을 받았군.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되나?”
아이작의 진지한 모습은 생각보다 낯설었다.
“왜 여기에 마나를 집중하라고 그런 것이지?”
아이작은 열망이 깃든 눈으로 자신의 배꼽을 가리켰다.
케이슨과 똑같은 질문이었다.
“조금 후에 알려줄 생각이니 잠시만 참아. 그 전에 몸이라도 좀 씻지?”
마현이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언젠가 이런 경험을 아버지께서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내가 경험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군. 아, 아! 레이디 자브라께서 이 고약한 냄새를 맡기 전에 얼른 씻어야겠군.”
어느새 다시 가벼운 모습을 돌아온 아이작은 슬쩍 눈썹 한쪽을 치켜 올렸다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
* * *
늦은 아침을 먹은 후 정오가 멀지 않은 시간이었다.
임시 연무장에 밀러를 제외한 단원들이 다시 모였다.
모두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피곤함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두 몸이 가벼워 보였다.
“편의상 배꼽 아래 부분이 마나의 중심이니 마나 센터(Mana center)라고 부르겠습니다. 마나를 몸에 담으면 되지 왜 마나 센터에 마나를 집중시켜야 하는지 다들 궁금하겠지요? 그건 사람의 몸의 중심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마현은 손가락으로 단전 부분을 가리켰다.
“마나 센터에 마나를 모으는 이유는 좀 더 효율적으로 마나를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쉬운 예를 들자면 어느 영지에 병사들이 100명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100명의 병사들이 영지 곳곳에 퍼져서 적을 상대하는 것과, 100명의 병사들이 한곳에 뭉쳐 있다가 적들이 쳐들어오는 지점으로 함께 움직이는 것. 어떤 것이 더 효율적인지는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현은 롱소드 끝으로 바닥에 사람 모양의 그림을 그린 후 중앙에 단전을 표시하는 둥근 원을 그려 넣었다.
“마나가 몸의 중심인 이곳.”
그리고는 롱소드로 단전을 가리켰다.
“마나 센터에 집중되어 있다면 불필요한 마나의 낭비 없이 필요한 곳에 마나를 집중할 수 있습니다.”
마현은 롱소드를 이용해 단전에서 양팔과 다리로 긴 선을 그려 넣었다.
“그게 가능한 소리인가?”
아이작이었다.
“믿어.”
마현의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대답이기도 했다.
마현은 이들이 마나를 모아 단전을 만들지, 아니면 그저 마나를 단전을 중심으로 두루뭉술하게 짙은 농도로 뭉치게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보다는 확실히 더 낳은 결과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들의 노력과 선택에 달려 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들의 마나를 조금이라도 단전 부근으로 밀도 있게 이끈 것은 사실이었다.
“수련 방식은 편하신 걸로 하되 반드시 검을 휘두를 때에는 마나를 팔로, 발을 내딛을 때에는 하체로 마나를 움직이는 연습을 하시면 됩니다. 이상, 점심시간까지 자유로이 수련하시면 됩니다.”
마현의 말을 들은 이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기며 임시 연무장 곳곳으로 흩어졌다.
“단장, 그리고 아이작.”
마현은 케이슨과 아이작을 따로 불러 임시 연무장 한구석으로 향했다.
“점심 이후에는 카이샨 메일을 착용하고 훈련할 겁니다. 그리고 내일은 마상 훈련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야겠지. 시간이 너무 촉박하군.”
케이슨은 모레 전장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아쉬움이 담긴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아이작에게 그 훈련을 맡길 생각입니다.”
“아이작에게?”
케이슨이 고개를 들어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이잉?”
아이작은 요상한 신음을 삼켰다.
“네가 맡아.”
아이작은 마현과 케이슨을 번갈아보다가 낯을 찡그렸다.
“나보다는 평생 기사로 살아온 네가 적임자다. 그 대신 오늘 확실히 수련을 봐주지.”
“부탁하네.”
케이슨까지 거들었지만 아이작의 낯은 더욱 찡그러질 뿐이었다.
“아하, 귀찮은 건 딱 질색인데.”
“자브라와 더 가까워질 거다.”
그 소리에 아이작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에효, 뭐 어쩔 수 없지.”
마지못해 수락하는 듯한 아이작의 모습에 마현은 피식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는 다시 케이슨을 쳐다보았다.
“3일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아 아쉽지만 이후에도 계속 정진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그 부분은 단장께 부탁드리죠.”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럼 수련에 들어가죠.”
케이슨과 아이작은 임시 연무장의 빈 공간을 찾아 흩어져 수련을 시작했다.
마현은 임시 연무장을 돌아다니며 단원들의 수련을 봐주었다.
특히 마현이 신경을 써준 이는 케이슨과 아이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