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
8화
카칸의 소개를 받은 모리슨은 고개를 돌려 8전선 기사들과 달리 대열을 유지한 채 이곳을 주시하고 있는 백마기사단을 향해 명을 내렸다.
“대열을 흩트려도 좋다. 이 대련을 하나라도 놓치지 마라.”
“충!”
“충!”
내심 기다리고 있었던 까닭일까.
백마기사단 기사들은 그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에 모리슨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마현에게 다시 군례를 취한 후 기사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광경에 주변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판도 다 깔았으니 한 판 떠볼까?”
하야스 후작의 몸에서 은은하면서도 거친 투기가 흘러나왔다.
“남들이 보면 꼭 후작님이 용병 같다고 그러겠습니다. 혹 후작 자리도 힘으로 빼앗은 거 아닙니까?”
“맞네.”
하야스 후작은 분명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의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스르릉.
하야스 후작이 투핸드소드를 뽑았다.
“적당히 할 생각은 말게.”
챙!
그 목소리를 들으며 마현도 롱소드를 뽑았다.
“비싼 돈을 들여 투자했으니 그만큼 값어치를 할 수 있는지 봐야겠군.”
“상황이 조금 달라진 것 같군요.”
“이곳으로 브루넬로 왕국의 소드 마스터가 한 명 온다는 소식이 있어서 말이야.”
“의뢰가 좀 더 편해지겠군요.”
“과연 그럴 수 있는지 보려 하네. 지금!”
하야스 후작의 무릎이 살짝 굽혀지며 신형이 낮아졌다. 거기에 맞춰 마현은 보폭을 벌리며 롱소드를 들어올렸다.
“잡설이 길면 흥이 깨어지는 법!”
파밧!
하야스 후작의 신형이 마현을 향해 화살처럼 튕겨졌다.
“흐아압!”
우렁찬 목소리가 마현의 귓등을 때렸다.
후우우웅!
투박하지만 거센 파공음이 마현을 사선으로 베고 들어왔다.
‘어제라면 모를까, 오늘은 다릅니다.’
마현은 최상급 포션으로 몸이 완전히 회복했다.
서클 단전에서 힘차게 약동하는 마력이 마현의 전신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현은 다가오는 하야스 후작을 향해 크게 진각을 밟으며 롱소드를 세웠다.
카강!
투핸드소드와 롱소드가 부딪히며 푸른 불꽃이 튕겼다.
‘놀랍군.’
마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상당한 힘이었다.
은근히 자신의 검을 밀어내고 있는 엄청난 마나의 힘이 느껴졌다. 호신강기처럼 정형화된 힘은 아니지만 아마 무의식이나 오랜 수련으로 인해 만들어진 무형의 힘이리라.
“차핫!”
하야스 후작은 뒤로 빠지는가 싶더니 저돌적으로 마현의 몸을 연타로 베고 들어왔다.
캉, 캉, 카가강!
돌격 일변도.
적을 만나면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는 기사도 정신을 가진 기사답게 그의 공격에는 물러남이 없었다. 하야스 후작은 마치 한 마리의 황소처럼 투박하지만 끈질기게 마현을 몰아쳤다.
카강!
그리고 다시 투핸드소드와 롱소드가 부딪히며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자네, 아직 여유만만하군.”
하야스 후작은 검을 강하게 밀어 마현과 틈을 벌리고는 투핸드소드에 오러를 담았다.
후우우웅!
장엄한 오러가 눈에 각인도 되기 전에 하야스 후작은 순식간에 마현을 베어가고 있었다.
‘헛!’
설마 이렇게 들어올 줄은 몰랐던 마현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롱소드에 그와 같은 검강, 즉 오러를 담았다.
쾅, 쾅, 쾅, 콰광!
연무장에서는 연이어 폭음이 울려 퍼졌다. 단단하게 다져진 땅에서 그 때마다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차례 격돌이 지나갔다.
자욱한 먼지가 점차 가라앉자 하야스 후작은 당당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마현은 길게 늘어진 두 줄의 발자국을 만들며 3미터가량 뒤로 밀려나 있었다.
마현은 눈가를 슬며시 찌푸렸다.
하야스 후작의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손목이 다 시큰할 정도였다.
‘대단하군.’
정말 그 한 마디를 속으로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수련을 쌓으면 내공심법 하나 없이 이곳에서 저런 무지막지한 마나를 몸에 담을 수 있을까 싶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하야스 후작은 지독하게 수련했을 것이 분명했다.
절로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든 순간 마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겨우 이 정도인가?”
하야스 후작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웃지는 못했다. 마현의 신형이 아래로 푹 꺼진 탓이다. 한 마디로 그는 마현의 신형을 놓친 것이다.
“헙!”
하야스 후작은 헛바람을 들이마시며 몸을 틀었다. 그때 거의 목을 스치는 살기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젠장!’
하야스 후작은 돌아볼 것도 없이 일단 옆으로 몸을 날렸다.
사각.
마현의 검을 완전히 피하지 못한 하야스 후작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 나갔다. 그 소리는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하야스 후작은 땅바닥을 두어 차례 구른 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우 이 정도입니다.”
이어 들려온 마현의 목소리에 하야스 후작의 뺨이 씰룩거렸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리고 둘의 신형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콰광!
이어 그들이 마주친 연무장 중앙에서 폭음이 터졌다.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몰아쳐오는 하야스 후작의 공격에 마현은 기가 질릴 정도였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당할 정도로 정교한 공격은 아니었다.
틈틈이 허점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마현은 공격할 수가 없었다.
그가 몬테팔코 왕국의 후작이라서가 아니었다.
마법이라면 모를까, 마현의 순수한 무위만으로는 그 허점을 공략해 들어갈 결정적인 한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하야스 후작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마현은 정교하고 체계화된 천수마라검과 단혈마검으로 맞섰지만 승기를 잡기에는 그의 수련도가 부족했다.
보는 이에게는 박진감이 넘칠지 몰라도 그 둘에게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지루한 공방이 수십 합 흘러갔다.
누군가가 승기를 잡기 위해서는 비장의 수를 써야 하는데, 서로 그렇게까지 하며 승부를 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도 아니었다.
쾅!
서로에게 그런 감정을 느낀 하야스 후작과 마현은 한 차례 검을 나눈 후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잠시 서로의 눈을 뜨겁게 직시하고는 동시에 착검했다.
“하늘도 무심하군.”
하야스 후작은 갓 오십을 넘긴 나이였다. 그런 자신이 평생을 다듬어 온 검임에도 한 치도 밀리지 않는 카칸을 보며 그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카칸의 나이를 이십 대 중반으로 높게 쳐봐도 고작 자신에 비해 절반의 생을 살아온 자가 아닌가.
‘우물 안 개구리였던가?’
마현은 마현 대로 쓴맛을 느껴야 했다.
내공심법이 있든 없든, 이곳에도 강자는 있었다.
중원무림에 비해 검술의 투로가 단순하고 투박한 듯해도 오랜 시간 다듬어져 온 상승의 비결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당분간 흑마법을 봉인해도 문제가 없으리라 자신했다.
‘몬테팔코 왕국에 소드 마스터의 수가 넷. 브루넬로 왕국은 다섯. 그 외의 국가도 비슷한 수준. 거기에 용병왕이나 다름없는 검은여우 용병대의 대장인 미겔도 소드 마스터고.’
비교적 탄탄대로라고 여겼던 길이 알고 보니 험악한 산길이었다.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겼다.
마현은 다가와 악수를 건네는 하야스 후작의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후작님은 소드 마스터들 중에 어느 정도입니까?”
“아픈 질문이군.”
하야스 후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건 자존심 상해서 대답하지 않겠지만 이 정도는 대답해 줄 수 있네. 내가 몬테팔코 왕국에서 최고는 아니라는 거네. 내 위에 왕실기사단의 브로드키 후작이 있거든.”
“브로드키 후작이라……, 감사합니다.”
마현은 고개를 잠시 끄덕인 후 허리를 숙였다.
“와아아아아!”
대련이 끝나자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백마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순수하게 감탄에 빠져 마음껏 터트린 기분 좋은 함성이었다. 반면 8전선 소속 기사들은 그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현은 그들 속에 서 있는 케이슨을 쳐다보며 슬쩍 웃었다. 그 웃음에 케이슨도 진심 어린 웃음으로 화답했다.
* * *
하야스 후작과의 대련이 끝나고 어우선한 분위기가 미처 정리가 되기 전에 포크너 후작이 임시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 경외감과 질투심 등이 묘하게 섞여 있는 것을 느끼며 포크너 후작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마현이 왕국 출신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카칸. 여기는 참모인 데릭 드 고디머일세.”
중간 이름으로 ‘드’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직위는 자작인 모양이었다.
“고디머라고 합니다.”
그 역시도 소드 마스터에 대한 예우를 하는 듯 마현에게 말을 놓지 않았다.
“마현입니다.”
간단한 인사가 오갔다.
“고디머 경이 새로운 군막으로 안내할 걸세. 그리고 필요한 군마와 무구는 정오를 지나서 지급될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고디머 경이 알려줄 걸세.”
포크너 후작은 의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반 존대와 하대를 섞어서 사용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마현은 케이슨과 함께 고디머 자작을 따라 새로 배정 받은 군막으로 향했다. 그렇게 셋이 자리를 뜨고 난 뒤, 포크너 후작과 하야스 후작은 군단장 군막으로 나란히 향했다.
“오면서 대충 들었네만.”
포크너 후작이 걸음을 멈췄다.
“그를 너무 띄워준 거 아닌가?”
“그리 들었는가?”
“대충은……, 내 생각도 그러하고.”
포크너 후작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기사들에게 자극을 주는 것도, 앞으로의 전쟁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지만 문제는 그가 몬테팔코 왕국의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 좋지도 않아.”
포크너 후작의 목소리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을 겨눈 후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네. 볼수록 아쉬운 생각이 들더군.”
하야스 후작은 고개를 들어 용병연대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아쉽다?”
“아쉽지……. 내가 그를 띄워준 게 아니거든.”
“그 뜻은……?”
“고작 저 나이에 내가 한평생 이룬 것을 성취한 사내라…….”
“전력으로 승부한다면?”
“그것도 장담 못하네.”
하야스 후작은 굳어진 포크너 후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를 이기려면 숨긴 비장의 한 수를 꺼내야 하는데……. 얼마 전부터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나의 허점이 보이기 시작했네. 카칸은 그 허점을 정확히 노려보더군. 그 말은 그도 나의 허점을 노릴 수 있는 비장의 한 수을 가지고 있다는 뜻.”
“허어…….”
포크너 후작은 기가 막힌지 침음성을 터트렸다.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라도 몬테팔코 왕국의 귀족으로 만들고 싶을 정도야. 원한다면 내 후작 작위를 물려주어서라도…….”
하야스 후작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두 아들은 나름 천재 소리를 들으며 왕국 내에서 기사의 명성을 착실히 쌓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하야스 후작은 그런 아들들을 밀어내고서라도 잡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