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
7화
“정치인은 내가 아니라 자네로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확실한 전공……. 어느 정도면 이 전쟁을 이길 수 있겠는가?”
하야스 후작은 그 부분은 포크너 후작에게로 넘겼다.
“하지만…….”
“카이샨 메일에 관해서는 내가 책임지겠네.”
“무리수야.”
“알지, 알아. 하지만 이 전쟁은 이기고 봐야 하지 않겠나?”
아마 이 일로 하야스 후작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하야스 후작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어차피 그는 스스로를 정치인이 아닌 기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8전선에서 보면 본국 기사단은 3개 부대. 적국 브루넬로 왕국은 6개 부대, 아니 이제는 5개 부대이겠군.”
양국의 전력은 기사들의 무력 차이는 둘째 치고 병력에서도 두 배 가까운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적어도 평수를 이루려면 기사단 2개 부대가 사라져야겠군요.”
마현이었다.
“그렇지.”
“그렇다면 자질구레한 거 모두 치우고, 브루넬로 왕국 측 기사단 2개 부대를 없애면 되겠군요. 1개 부대가 30명 안팎이니……, 2개 부대의 괴멸, 혹은 기사 60여 명의 목숨을 거두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
“브루넬로 왕국 측 소드 마스터 한 명. 어떻습니까?”
그 정도면 포크너 후작의 입장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한 조건이었다.
“그 정도면 어느 누구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아울러…….”
마현은 하야스 후작을 쳐다보았다.
“내 짐을 덜어주는 겐가?”
“빚이라고 해두면 편하실 겁니다.”
슬쩍 말려 올라간 마현의 입술에 하야스 후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결코 편하지 않네.”
하지만 그의 입술에도 미소가 살짝 번졌다.
“또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조건 한 번 많군.”
하야스 후작은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전장에는 사흘 후부터 출전하겠습니다.”
“사흘이라…….”
“다 이기자고 하는 겁니다, 부사령관님.”
“알겠네.”
하야스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기다리게. 내 통신실에 잠시 다녀올 테니.”
하야스 후작은 몬테팔코 국왕의 승인을 받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포크너 후작은 자신의 우려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계속 기다리기도 뭐하니, 뭐라도 마시겠나?”
“이왕이면 맛좋은 홍차가 좋겠습니다.”
“참으로 뻔뻔하군.”
그러면서도 포크너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차를 내왔다.
“상당히 맛있군요.”
마현은 향긋한 홍차 향을 음미했다.
홍차를 두 잔이나 마시는 동안에도 하야스 후작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삼십여 분이 더 지나고 나서야 하야스 후작이 돌아왔다.
“어찌되었나?”
마현이 묻고 싶은 말을 포크너 후작이 대신 해주었다.
“승인이 떨어졌네.”
“쉽지 않았던 모양이군.”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는 귀족들이 어찌나 앵앵거려야 말이지. 뭐야, 내 몫은 없어?”
하야스 후작은 홍차가 담긴 주전자를 들었지만 이미 비워진 지 오래였다.
포크너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장의 하얀 백지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위에 똑같은 계약서를 써내려갔다.
케이슨이 원한대로 계약서에 서로의 요구조건을 명문화시킨 것이다.
계약서 양식이 만들어지자 몬테팔코 왕국 측에는 두 후작이, 그리고 케이슨 용병대 측에서는 케이슨과 마현이 각각 사인을 했다. 계약이 성사된 것이다.
“장비의 지급은 정오쯤 하는 걸로 하고…… 막사는 내 휘하 기사단 옆, 즉 이 뒤다. 대우는 기사 수준으로 해주겠다. 다만, 인력이 없으니 종자는 한 명만 보내주지.”
“막사는 용병연대 안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마현이었다.
“그건 곤란해. 거긴 이곳이나 중앙지휘실과 거리가 너무 멀어.”
“그렇다면 용병연대와 제8군단의 경계 지점이면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마현에게 무슨 생각이 있을 거라 짐작한 케이슨이 어느 한 곳을 떠올리며 제안했다.
“용병연대장의 지휘실이 있는 곳을 말하는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
포크너 후작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시원하게 요구사항을 들어줬다.
그렇게 계약서에 없는 소소하고 세밀한 부분의 조율까지 끝내자 하야스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났나?”
“아직…….”
포크너 후작은 계약서 한 장을 케이슨에게로 내밀었다.
“케이슨 용병대를 상징하는 게 있나?”
“……?”
“명색이 카이샨 메일인데 심벌(Symbol)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포크너 후작은 가슴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흠…….”
어떤 상징적인 물건이나 동물 같은 것을 심벌로 삼는 용병대도 있었지만, 그런 것 자체가 없는 곳도 많았다. 케이슨 용병대는 없는 곳 중의 하나였다.
“검은 바람.”
마현이 고민하는 케이슨을 뒤로 하고 입을 열었다.
“……검은 바람?”
포크너 후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마현은 탁자 위에 손가락으로 흑풍대의 상징이었던 검은 바람을 그렸다.
“검은 바람이라…….”
포크너 후작은 고개를 들어 케이슨을 쳐다보았다. 괜찮겠느냐는 물음이었다. 단순하지만 확실히 바람이 떠오르는 그림이었기에 포크너 후작은 머릿속으로 그 형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걸로 하겠습니다.”
“좋아.”
포크너 후작의 승낙을 끝으로 세부적인 논의가 완전히 끝났다.
* * *
“휴우.”
군단장 포크너 후작의 군막을 빠져나온 케이슨은 가장 먼저 숨을 길게 내뱉었다. 케이슨의 몸은 어지러운 듯 살짝 휘청거리고 있었다.
마현은 그런 그의 몸을 바로잡아 주었다.
“많이 긴장하셨던 모양입니다.”
“긴장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세. 손바닥이 다 축축해져 몇 번이나 몰래 무릎에 비벼 땀을 닦았는지…….”
케이슨은 괜찮다며 마현의 부축을 가볍게 뿌리치고 홀로 섰다.
“잘할 수 있을까?”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탓인지, 케이슨은 내내 감추어두었던 속내를 내비쳤다.
“잘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잘해야 합니다.”
“하긴 자네가 있으니…….”
케이슨은 단호한 눈빛을 하고 있는 마현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카칸.”
“…….”
“언젠가 자네 이야기를 들려주게. 그때 나도 미겔의 이야기를 해 주겠네.”
“…….”
“서로 털어놓지 못해도 나는 자네를 한 식구로 받아들였네.”
마현은 케이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케이슨은 더 진해진 미소를 지으며 마현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가세, 많이들 기다리겠네.”
그리고는 먼저 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그의 걸음은 몇 걸음 내딛지 못하고 멈춰야 했다.
“카칸.”
뒤에서 들려온 하야스 후작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
하야스 후작이 상기된 얼굴로 웃으며 허리에 찬 검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그새 약속 잊은 겐가? 대련 한 판 해야지?”
잠시 잊고 있었다.
“자네도 따라오게.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 거야.”
하야스 후작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케이슨에게 말을 툭 던져놓고는 몸을 돌렸다.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마현은 어색한 웃음을 살짝 지어 보인 후 하야스 후작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야스 후작이 그들을 데리고 간 곳은 군단 중앙에서 약간 비켜난 곳으로, 기사들의 군영 한가운데에 위치한 넓은 공터였다. 전장의 야영지답지 않게 바닥이 판판했다. 아마도 수련을 위해 일부러 땅을 다져놓은 듯 보였다.
팡팡팡!
마현은 그 땅을 발로 몇 번 밟아 보았다.
“나름 괜찮지 않은가?”
“제법 쓸 만하군요.”
“전장에서 이런 호사 하나쯤은 있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네.”
마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주위는 금세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 이유는 바로 하야스 후작 때문이었다.
몬테팔코 왕국의 소드 마스터인 그가 느닷없이 임시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저자는 누구지?”
“뭐야, 용병이잖아?”
몬테팔코 왕국에서 하야스 후작의 명성은 대단했다. 그런 그의 앞에 서 있는 마현의 행색을 보자 기사들은 실망을 넘어 살짝 경멸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 대련은 상당히 많은 것을 줄 걸세.”
마현은 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저자는?”
관중의 대열에 뒤늦게 합류한 기사단, 즉 하야스 후작이 이끄는 백마기사단의 기사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당연히 임시 연무장에 모여 있는 기사들뿐만 아니라 그 근처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저자가 누군데 그러시오?”
8전선 소속 기사가 백마기사단 기사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그 질문에 8전선 소속 기사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소드 마스터가 단지 평범한 용병과 마주섰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던 것이다.
“……소드 마스터.”
“뭐요?”
“저자는 평범한 용병이 아니라 소드 마스터요!”
백마기사단 기사의 대답에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다가섰던 8전선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뜬금없이 백마기사단 쪽에서 한 가지 소문이 흘러나왔었다. 그건 어제 대승의 주역이 용병이었으며, 그 용병 중 소드 마스터가 있다는 황당한 이야기였다.
물론 8전선 소속 기사들은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8전선이 자칫 무너질 뻔한 위태로운 상황에서, 기가 막히게도 적절한 순간에 백마기사단과 기사단장인 하야스 후작이 나타나며 브루넬로 왕국 측 기사단의 대파했기 때문이다.
“정말이요?”
하지만 이내 그들은 별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느냐는 듯 심드렁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제아무리 명성이 자자한 백마기사단 기사의 말이었지만,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이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는 것보다 더 황당한 소리였으니, 그들에게 있어서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8전선 기사들은 내심 찜찜함을 지우지 못한 채 하야스 후작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저 하야스 후작의 무위를 보는 것만으로도 귀한 경험을 얻는 것이라며 마음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일어나는 찜찜함을 덮고자 했다.
그때였다.
“단장님, 대련이십니까?”
한 중년 사내가 기사들이 빙 둘러서 있는 임시 연무장 안으로 들어섰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하야스 후작의 목소리는 한껏 뜨거워져 있었다.
“권터 르 모리슨입니다. 백마기사단 부단장으로 있습니다.”
중간 이름에 ‘르’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니 그의 작위는 백작인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귀족답지 않게 깍듯하게 마현에게 군례를 취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카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