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
4화
스승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 사무치는 그리움이 마현으로 하여금 롱소드를 촛불로 향하게 만들었다.
사삭!
롱소드의 검 끝이 촛불을 베었다.
하지만 촛불은 꺼지지 않고 마현의 검 끝에 담겼다.
“허어!”
하야스 후작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마현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오로지 그의 눈은 스승인 허진만을 떠올릴 뿐이었다.
살랑― 사사삭!
마현은 부드럽게 기수식을 취한 다음 검무를 추었다.
허진의 독문무공인 천수마라검은 아니었다. 아직 마현의 능력으로는 천수마라검으로 촛불을 담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마현은 천수마라검을 익히기 위해 먼저 수련했던 단혈마검을 펼쳤다. 단혈마검은 천수마라검에 비해 비교적 가볍고 경쾌했다.
어두운 군막 안에서 한 폭의 그림 같은 검무가 펼쳐졌다. 검을 따라 춤을 추는 촛불의 모습은 보는 이를 황홀하게 할 정도로 화려했다.
그렇게 10여 분 동안의 검무가 끝나자 마현이 검을 멈췄다.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 마현의 눈동자에는 물기가 살짝 맺혀 있었다.
“후우.”
마현은 아릿한 심정을 깊은 숨을 들이마셔 달래며 촛불을 향해 검을 털었다.
팅!
검면이 파르르 떨며 촛불을 토해냈다.
그 촛불은 허공을 날아 촛대에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탁자 위를 밝혔다.
“원래 소드 마스터가 되면 이런 일도 가능한 겐가?”
포크너 후작은 너무 놀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하야스 후작을 쳐다보며 물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소드 마스터 중에 저런 걸 보여줄 수 있는 이는 없네. 이거 정말 기가 차서 말아 안 나오는군.”
“이런, 제가 결례를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현은 롱소드를 착검하며 사과했다.
“아, 아닐세. 덕분에 평생 보기 힘든 진귀한 것을 봐서 오히려 내가 고맙네.”
포크너 후작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끌끌끌, 대단하긴 대단했던 모양이군. 자네가 용병 나부랭이에게 반존대를 다 하고 말이야.”
하야스 후작의 말에 포크너 후작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크흠.”
무안한 듯 포크너 후작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자네의 검무를 보니 호승심이 일어나는군. 어떤가? 내일 이른 아침에 나와 한 판 해봄이.”
마현을 쳐다보는 하야스 후작의 눈은 이글거렸다.
그 눈빛을 대하자 마현도 호승심을 느꼈다.
‘어차피 한동안 검사로 살아가야 하니…….’
하르센 대륙의 검술을 한 번쯤 보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마현은 생각했다.
“좋습니다.”
“크하하하. 마음에 들어. 읏차!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해지는데.”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세.”
포크너 후작은 그런 하야스 후작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책상으로 가 한 장의 지도를 들고 돌아와 탁자 위에 폈다.
“이게 어떤 지도인지는 알겠지?”
마현은 브루넬로 왕국과 몬테팔코 왕국 국경선을 중심으로 그려진 군사지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략하게 전장 상황을 설명하자면, 여기서 여기까지, 그러니까 1에서 4전선으로 나눠지는 북부 전선은 우리 몬테팔코 왕국군이 압도적으로 승기를 잡고 있네. 그리고 5, 6전선, 그러니까 중부전선은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네. 그리고 여기 7, 8, 9 남부전선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네.”
말을 하던 포크너 후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이유는 바로 여기, 현재 우리가 있는 8전선이 문제일세. 즉, 우리 때문에 남부전선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일단 포크너 후작이 전황을 설명해 주니 마현은 조용히 귀로 새겨들었다.
“흠…….”
포크너 후작은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더불어 계속 승기를 잡지 못하고 고전을 하게 된다면, 결국 애써 북부전선에서 이룬 승전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는 걸세.”
지도를 내려다보며 설명을 하던 포크너 후작이 마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이유가 뭔지 아나?”
마현이 알 턱이 없었다.
어차피 대답을 듣고자 한 질문이 아니었기에 포크너 후작은 바로 말을 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승기를 잡아줄 수 있는 기사가 없다는 뜻이네. 결정적인 순간에는 꼭 브루넬로 왕국의 기사단에게 아프게 당하거든. 전반적으로 남부전선이 다 비슷비슷한 상황이지만 특히 8전선에는 무력이 뛰어난 기사들이 전무한 상태야.”
포크너 후작의 얼굴에는 뼈아픈 고통이 살짝 드러났다.
“아무리 지휘관들이 작전을 쥐어짜내도 적국의 기사들이 압도적인 힘으로 몰아붙이니……, 이렇게 근근이 버티는 것도 솔직히 용한 일이지.”
포크너 후작은 소파 깊숙이 상체를 기대며 마현을 쳐다보았다. 마현은 대충 포크너 후작이 원하는 것이 무언지 알아차렸다.
“포크너 가문이 문벌 가문이지만 그래도 쓸 만한 기사단이 하나 있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네가 이끌어주었으면 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그 제안에 마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안 되지.”
정작 대답은 포트너 후작이 아닌 하야스 후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달리 방법이 없거든. 그렇다고 고비 때마다 내가 올 수도 없고 말이야.”
마현의 얼굴이 묘하게 구겨졌다.
그런 마현의 얼굴을 보며 하야스 후작이 묘하게 웃었다.
“하야스 후작님의 생각이시군요.”
“이 친구 설득하는데 애 좀 먹었지.”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철저한 귀족 중심의 사고를 가진 포크너 후작이 이런 생각을 했을 리 만무했으니까.
포크너 후작은 마현과 하야스 후작의 대화를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만 해준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원하는 걸 모두 들어주지.”
포크너 후작의 목소리에는 절박함마저 느껴졌다. 그렇기에 하야스 후작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신념을 꺾을 정도로 조국에 대한 충심도 강하다는 뜻일 터.
지그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보며 마현은 두 후작 모두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기사들이 잘도 저를 단장으로 모시겠습니다.”
“내일 아침 나랑 한 판 붙고 나면 그런 소리는 찍소리도 못할걸?”
하야스 후작이 얄밉게 웃었다.
내일 치룰 일종의 비무 약속도 알고 보니 다 계획된 것이었다.
“하아. 이것 참…….”
마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파로 몸을 기댔다.
“원하면 후작 자리도 주지.”
하야스 후작이 목소리를 달리하며 제안했다.
거기까지는 포크너 후작과 이야기가 되지 않았던 모양인지 그도 그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장은 힘들지만 일단 백작을 거친 다음 주지. 원하면 내 목을 걸어도 좋네.”
‘끙.’
마현은 이어진 제안에 속으로 앓는 소리를 삼켰다.
“대(對)브루넬로전이 발발한 지 2년이 다 되어가네. 이처럼 전쟁이 계속된다면 가까스로 회복한 백성들의 삶이 다시 황폐화되네. 그리되면 또다시 많은 이들이 기아에 죽어가겠지.”
“그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일단은 거절해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우선은 생각할 시간만이라도 벌어야 했다.
능력을 드러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주변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대륙에서 이제 눈을 뜬 지 겨우 4일 째인데 말이다. 더욱이 몸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케이슨 용병대에 들어간 것도 겨우 4일 째 아닌가? 원하면 탈퇴시켜 주지.”
“하루만 말미를 주십시오.”
“하루?”
“내일 아침까지 답을 드리지요.”
“내일 아침이라…….”
내일 아침까지라면 하루도 아니었다. 이미 밤이 깊어가니 반나절 정도일 것이다.
“저도 생각할 시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하긴 우리 생각만 한 것 같네. 좋아 그렇게 하세나.”
아쉬움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내일 아침까지라면 충분히 기다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럼 내일 아침 7시까지 오게. 아침 식사나 하며 답을 듣지. 물론 검도 나눠보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포크너 후작을 바라보았다.
“아, 이왕 받는 뇌물, 하나만 더 받을 수 있겠습니까?”
“롱소드 말인가?”
포크너 후작은 마현의 허리춤에 매달린 롱소드를 쳐다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롱소드야 한 자루면 충분합니다.”
“그럼……?”
“포션 한 병이 필요합니다.”
“포션이라……. 주지.”
아쉬운 건 포크너 후작인지라 그는 그 즉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신이 사용하는 야전 침상 머리맡에 놓인 철로 된 궤짝을 향해 걸어갔다.
포크너 후작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한 병의 포션을 꺼내 마현에게로 던졌다.
“이왕 뇌물을 쓰려거든 최고가 가장 좋겠지.”
마현이 포션병을 받아 확인해 보니 최상급 포션이었다.
“잘 쓰겠습니다.”
마현은 웃음기를 머금으며 품에 넣었다.
“희망적인 대답을 바라고 있겠네.”
“그럼.”
마현은 포크너 후작과 하야스 후작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는 군막을 벗어났다.
* * *
마현은 곧장 케이슨 용병대의 군막으로 향하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조용히 사색할 장소로 마현은 전에 내상을 치료했던 나무 꼭대기를 떠올리고 걸어갔다. 나무 아래에 도착한 마현은 주위를 휘둘러본 후 훌쩍 몸을 날려 나뭇가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일단은 여섯 백마법사를 죽이는 것이 먼저였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그들을 이 길로 즉시 찾아가 죽여도 된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방식은 그의 성미에도 맞지 않았다. 철저하게 모든 것을 부순 후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적어도 마탑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이름이 필요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문제는 그 이름을 이용해 어떻게, 그리고 어떤 성격의 단체를 만드느냐 하는 것이었다.
마교!
지난 생을 되돌아보면 아주 짧은 시간을 지낸 곳에 불과했지만, 그의 가슴속에 가장 크고 깊숙이 차지하는 곳이 바로 마교가 아니던가.
약육강식.
모든 것이 힘으로 움직이는 곳.
‘좋군.’
하지만 순수한 검사들의 단체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마현 자신은 검사가 아닌 흑마법사였으니까.
‘탑을 세우되 두 개의 탑이 하나의 탑을 이루는 형식으로 만들어야겠어. 흑마탑, 그리고 흑검탑. 그 둘이 하나가 되어 흑탑.’
이제 남은 것은 과연 누구를 끌어 모으냐였다.
사실 그것도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어디에도 편입되지 않은 이들.
바로 용병들이다.
그들은 거칠다. 그리고 힘을 우선시한다.
마교와 다르지만 엇비슷한 구석 또한 많다.
그들이 바로 흑검탑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흑마탑의 주인은 용병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밀러 같은 회색마법사들이 될 것이다.
빛의 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
흑마법사들이 되어야 하는 운명임에도 여섯 마탑으로 인해 진정한 마법사가 되지 못한 가련한 이들.
‘그들을 깨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