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3화
“흠…….”
마현은 뒷짐을 지고서 사라져가는 둘을 쳐다보았다. 이어 나직하게 침음성을 삼켰다. 하지만 입술은 부드럽게,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크흠.”
그런 마현의 등 뒤에서 나직한 헛기침이 들렸다.
군막 앞에서 휘장을 살짝 열어젖힌 기사였다.
“결례를 저질렀소.”
“아닙니다.”
마현의 사과에 기사는 다른 팔로 군막 안을 가리켰다. 마현은 휘장을 건네받아 열어젖히며 군막 안으로 들어갔다.
외부에서 보았던 화려함과는 달리, 군막 안은 생각보다 간소하게 꾸며져 있었다.
딱 필요한 것들만 들여놓은 듯 보였다.
“여길세.”
그때 안에서 들려온 칼칼한 목소리에 마현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오른쪽 한구석에 푹신한 소파와 그에 어울리는 다탁이 놓여 있었다.
검소하게 느껴지는 곳에 화려한 소파와 탁자가 보이자 이질적인 느낌이 확 들었다. 거기에는 오늘 전장에서 보았던 장년의 기사가 앉아 있었다.
“쉬는데 방해를 한 것이 아닌가 싶으이.”
“그다지…….”
마현은 처음 기사단장으로 알았던, 부사령관의 말에 가볍게 대답하며 비어 있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부사령관은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한 잔 할 텐가?”
부사령관이 반쯤 비어 있는 포도주 병을 들어 살짝 흔들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껄껄껄, 내 그럴 줄 알고 미리 잔을 준비해두었네.”
탁자 한구석에 놓여 있는 유리잔에 포도주를 채워 마현에게로 내밀었다.
“소개가 늦었군. 나는 클리푸 반 하야스라고 하네.”
잔을 넘기며 하야스 후작은 자신을 소개했다.
“제 소개도 다시 해야 하는 겁니까?”
“아니야, 자네의 이름은 이미 이 머리에 콱 들어박혀 있네.”
하야스 후작은 손가락으로 반 백발의 머리를 가리켰다.
“오늘은 고마웠네.”
“살기 위해 그런 것뿐이니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나저나 향이 좋군요.”
하야스 후작의 말에 마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포도주의 향을 잠시 맡은 후 가볍게 목을 축였다.
“살기 위해서라……. 자네가?”
하야스 후작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먹이를 노려보는 매의 날카로운 눈동자처럼,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마현의 몸을 훑었다.
“살기 위해 서른에 가까운 기사들을 일수에 무너트렸다고? 허헛……, 지나가던 개가 다 웃을 노릇이군.”
그다지 귀족답지 않은 거친 언사였다.
더욱이 그는 후작의 작위에, 대(對)브루넬로전 중앙사령부 부사령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색하지도 않으며 한편으로는 제법 잘 어울린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런데…….”
하야스 후작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자네는 누군가?”
동시에 노도와도 같은 기운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마현이 누구인가?
칼바람이 끊이지 않는 거친 무림을 헤쳐 나온 이가 바로 마현이었다.
마현은 하야스 후작의 기세를 아무렇지 않게 흘리며 잔을 비웠다.
“카칸이라고 말씀을 드린 걸로 기억합니다만?”
마현은 태연한 얼굴로 잔을 내려놓으며 하야스 후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마현의 모습에 하야스 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결국 기세만으로는 마현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하야스 후작은 기세를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연 없는 용병은 없다지요?”
마현은 더 이상 캐묻지 말라는 뜻을 완곡하게 밝혔다.
“하지만 사연도 사연 나름이지 않을까 싶네만.”
“뭐 저에 대해서는 대충 알아보셨을 테고……, 일단 알아보신 바대로 이 전쟁이 끝나야 신분보장이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말 믿을 수 있나?”
“저야 아쉬울 것이 없는 입장입니다.”
마현의 대답에 하야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니 믿지.”
하야스 후작은 호탕하게 대답하며 눈빛에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완전히 지웠다.
“이제는 자네보다 자네를 키운 스승이 누구인지 더 알고 싶어지는군.”
하야스 후작의 목소리에는 순수한 감탄이 묻어 있었다.
“이제 갓 스물이 넘었을 법한데……. 삼십 대에 소드 마스터가 되어도 입이 벌어질 정도인데……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군.”
하야스 후작은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마현을 노려보며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분하군.”
그는 예법을 중시하는 귀족답지 않게, 하지만 그답게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자네를 보고 있으니 살아온 내 인생이 허무해지는군.”
“그것이 제 책임은 아닌 듯합니다만? 아, 한 잔 더 마셔도 되겠습니까?”
마현은 하야스 후작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자신의 잔에 포도주를 채웠다.
“오랜만에 맛을 보는지라…….”
“끄응!”
하야스 후작은 마현의 거침없는 행동에 앓는 소리를 삼켰다.
“단순히 포도주 한 잔 하라고 부른 것 같지는 않고……, 이리로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늦어서 미안하네.”
그때 군막 안으로 하야스 후작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귀족이 들어섰다.
“어디 가서 뒷말을 듣지는 않겠군.”
하야스 후작의 가벼운 농담에도 불구하고 새로이 들어선 장년인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재미없는 건 여전하군 그래.”
장년인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으며 책상으로 가 들고 온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는 마현을 힐끔 쳐다보고는 바삐 서류를 정리하며 하야스 후작에게 물었다.
“저자인가?”
“그렇네. 인사하게, 제8전선 군단장인 윌리엄 반 포크너 후작일세.”
하야스 후작은 여전히 서류에 눈을 박고 있는 장년인, 포크너 후작의 물음에 대답한 후 마현에게 그를 소개했다.
“카칸입니다.”
마현의 소개에도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무례한 자군. 감히 용병 나부랭이가 말이야.”
포크너 후작은 서류 정리를 끝내고서야 비로소 고개를 들어 마현을 쳐다보았다.
“공로가 있으니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포크너 후작은 소파로 다가와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눈으로 탁자 위를 훑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러려고 저를 부르신 겁니까?”
마현 역시 그런 포크너 후작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윌리엄, 너무 그렇게 깐깐하게 대하지 말게. 소드 마스터면 준귀족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내게서 대접 받고 싶으면 귀족 자리부터 가지고 오라고 그래.”
분명 하야스 후작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마현을 향해 있었다.
“답답한 친구를 보았나. 그러다가 저 친구가 독한 마음을 먹고 자네 목이라도 베려한다면 어쩔 셈인가?”
가늘어진 마현의 눈매를 본 하야스 후작이 서둘러 포크너 후작을 말렸다.
“자네가 막아주면 되지 않겠나?”
“휴우, 미안하지만 나는 아마도 못 막을 것 같네.”
하야스 후작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며 마현을 보고 느꼈던 점을 꾸밈없이 말했다. 그 솔직함에 포크너 후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래도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네.”
포크너 후작은 마현을 쳐다보며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한 글자씩 찍어내듯 말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현도 기가 질린 듯 하야스 후작을 쳐다보며 물었다.
“몰라! 나는 모르니까 둘이 알아서 해! 에잉!”
하야스 후작은 짜증스런 목소리를 내뱉고는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검을 뽑을 겐가?”
“생각 중입니다.”
“훗!”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힌 지 얼마 후.
스르릉!
마현의 롱소드가 뽑혔다.
“자, 자네!”
하야스 후작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내 목을 원하나?”
“글쎄요.”
마현은 대답을 모호하게 하며 롱소드를 들어 탁자에 꽂았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롱소드는 탁자에 깊숙이 박혔다.
“선택권을 넘기겠습니다.”
잔뜩 긴장했던 하야스 후작은 안도하며 포크너 후작을 쳐다보았다.
“윌리엄, 이런 일로 왕국의 안위마저 버릴 생각인가?”
포크너 후작을 향해 호통 친 하야스 후작은 마현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이런 일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
그렇지만 하야스 후작의 호통은 둘 사이에 흐르는 냉랭함을 어찌하지 못했다.
“마지막 경고네.”
결국 하야스 후작의 목소리도 차가워졌다.
그리고 매서운 기운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서로 양보하지 못하겠으면 반만 양보하고, 반만 자존심을 챙겨. 어쩔 생각인가?”
마현이 먼저 피식 웃었다.
이어 포크너 후작도 피식 웃었다.
“귀족이 아닌 이상 존대는커녕 반존대도 못한다. 하지만 예우는 해주지. 그 이상은 안 돼.”
“목숨까지 걸고 그리 하시겠다는데 제가 조금 더 물러나드리죠.”
마현이 그러거나 말거나 포크너 후작은 시선을 살짝 내려 탁자에 꽂힌 롱소드를 바라보았다.
“브루넬로 왕국 기사단의 롱소드군.”
“쓸만한 놈 구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전장에서 하나 들고 왔습니다.”
“그래도 우리 군막에서 브루넬로 왕국의 인장이 찍힌 검을 본다는 게 그리 즐겁지는 않군. 밖에 누구 없느냐?”
포크너 후작이 군막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르셨습니까?”
그의 부름에 기사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무기고로 가서 상급의 롱소드 한 자루를 가져오라.”
“알겠습니다.”
기사가 나가고 포크너 후작은 롱소드를 보며 낯을 더욱 찌푸렸다.
“기사가 롱소드를 가져오면 이건 폐기처분하게.”
“저야 좋은 검만 얻는다면야 상관없습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하야스 후작의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미친놈들아!”
하야스 후작은 벌떡 일어나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힘없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이마를 찌푸렸다.
* * *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고 군막 안에 촛불이 켜졌다.
스르릉.
포크너 후작이 준 롱소드가 마현의 손에서 뽑혔다.
기분 좋은 음이 검면을 타고 흘러나왔다.
무게의 균형이 어느 한곳으로 쏠려있지 않고 조화롭다.
쐐애애액!
허공을 베어 보았다.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래서 무인들이 좋은 검을 탐하는가?’
흡족하다.
‘스승님.’
스승 허진에게서 검을 사사할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현아, 검식이 완벽해지면 검 끝에 촛불을 담고 춤을 출 수도 있단다.”
마현의 눈이 탁자 위에서 일렁이는 촛불로 향했다.
다시 한 번 스승 앞에서 검 끝에 촛불을 담아 휘두르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