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
1화
하르센 대륙의 100년 전쟁.
100년 전쟁으로 통용되지만 정확한 전쟁 기간은 109년이었다.
기간이야 어찌되었든 풍요로웠던 하르센 대륙을 단숨에 황폐화시킨 100년 전쟁의 시발은 근 300여 년간 하르센 대륙을 군림하던 두 제국의 신경전에서 비롯되었다.
두 제국은 모두 자국을 대륙의 패자로 여겼었다. 경쟁관계였던 상대방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그러한 분위기는 서로의 심기를 긁어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당시 대륙의 판세는 2강, 2중, 2약으로 확연히 구분돼 있었다.
대륙의 지배자로 자처하는 ‘2강’은 브루넬로 제국과 살트렘 제국이었다. 또한 그 강대한 제국들 사이에 위치한 카스텔로 왕국과 트로켄 왕국은 ‘2중’으로 불리며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2약’으로는 살트렘 제국의 속국인 쉬라즈 공국과 브루넬로 제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몬테팔코 왕국이 있었다.
카스텔로 왕국과 트로켄 왕국이 2중으로 일컬어진 것은 두 왕국이 2약에 비해 특별히 국력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살트렘 제국의 속국인 쉬라즈 공국과 외형만 독립국이지 사실상 속국이나 다름없는 몬테팔코 왕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두 제국이 침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두 왕국은 단숨에 하르센 대륙의 지도에서 지워지고 말았을 것이다.
두 왕국은 그야말로 두 제국의 완충지대로 힘겹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왕국으로 인해 간신히 대륙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는 어디까지나 타의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 두 왕국이 자의적으로 지켜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불완전한 평화였기에 두 제국이 서로를 향해 칼을 뽑았을 때 두 왕국의 평화도 동시에 깨졌다.
그렇게 간신히 이어져오던 300년 만의 평화가 깨지며 하르센 대륙은 단숨에 전장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 누구도 몰랐다. 그 전쟁이 100년이 넘도록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그것은 그 전쟁의 원흉이었던 두 제국도 몰랐으리라.
실상은 두 제국의 전쟁이었지만, 그것이 100년이나 지속되면서 대륙의 여섯 나라는 모두 전화에 휩싸였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팽팽하던 전쟁의 판세는 조금씩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하르센 대륙의 판도를 바꾼 미세한 틈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균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00년 전쟁에서 가장 먼저 무너진 곳은 파죽지세로 브루넬로 제국을 몰아치던 살트렘 제국이었다.
오랜 전쟁으로 견디지 못한 속국 쉬라즈 공국이 살트렘 제국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동시에 제국의 중심 전력이었던 테누타 공작이 귀족들을 규합해 독립을 선포하면서 살트렘 제국은 일대 혼란에 빠져들었다.
브루넬로 제국에게 있어서 그것은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브루넬로 제국 역시 머잖아 살트렘 제국과 별반 다름없는 길에 들어섰으니, 그건 바로 100년 전쟁 기간 중 암중으로 힘을 길렀던 몬테팔코 왕국이 거침없이 브루넬로 제국을 향해 검을 뽑아든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제국 내부에서는 아벨리노 후작이 귀족들을 규합해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블루넬로 제국 역시 쇠락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두 제국 간의 싸움이 내분에 휩싸이며 새로운 양상으로 변해가자, 그동안 완충지대 역할을 해왔던 두 왕국 또한 변화의 바람을 비켜가지 못했다.
트로켄 왕국은 몬테팔코 왕국과 테누타 왕국이 독립 왕국으로 거듭나기 위해 내분을 겪고 있는 제국들과 치혈한 전쟁을 치루는 동안 홀로서기를 시도했고, 치욕스러운 과거의 역사에서 벗어난 것이다.
반면 카스텔로 왕국은 두 제국의 싸움에 휩쓸리며 국왕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제국은 멸망했다. 그 사이에 새로운 왕이 추대되었으나 그 역시 1년의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승하했다. 손이 귀했던 카스텔로 왕국의 혈통은 그렇게 맥이 끊겨 버린 것이다.
왕이 없는 왕국은 바람 앞에 홀로 서 있는 촛불과도 같은 법.
카스텔로 왕국의 주요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살기 위해서.
하지만 그것은 서로가 왕이 되고자 하는 치열한 암투였기에, 이율배반적인 모임이었다.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한 귀족들의 모임은 자연스레 연방국의 탄생을 이끌어냈다. 그로 인해 카스텔로 왕국은 카스텔로라는 이름만을 유지한 연방국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런 연방국에는 수많은 왕들이 있는 법.
일정 기간 돌아가면서 연방국을 다스릴 왕이 선출된다고는 하지만 약소국에서 탄생한 연방국의 한계와 한목소리를 낼 수 없는 연방 의회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때문에 왕국은 완전한 자유는커녕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그 사실을 연방국의 주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방국 의회에서는 과감한 선택을 하였다.
카스텔로가 영원한 중립국임과 동시에 용병과 마법의 국가임을 대륙에 선포한 것이다.
용병의 경우에는 특혜를 주었는데, 개인이나 길드에게는 어떤 명목으로도 세금도 거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누구라도 용병에 가입된 자라면 철저하게 신분을 보장했다. 또한 카스텔로에 거주하는 용병들이라면 그 어떤 싸움이나 전쟁에 참여해도 일체 간섭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다만 카스텔로 연방국을 위태롭게 하는 전쟁만 불허한다는 단서조항을 달았을 뿐이다.
그러한 시도는 용병들 사이에 어마어마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 동시에 신분과 부가 보장되는 나라. 그 소식을 듣고 대륙 곳곳에 퍼져 있던 용병들과 용병 길드들 대부분이 카스텔로 연방국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러한 특혜는 비단 용병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카스텔로 연방국의 초석이 될 또 다른 조직인 마법 길드에도 특별한 지원을 했다. 무상으로 마탑을 지원한 것이다.
100년 전쟁으로 대륙 마법사들의 별로 떠오른 여섯 백마법사. 그들에게 마탑 건립에 필요한 땅과 그것을 재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끔 방대한 토지를 약속했다.
즉, 마탑에게는 카스텔로 연방국의 제후나 다름없는 자치구를 준 것이다.
그러한 파격적인 제의는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모든 자유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7서클의 여섯 백마법사가 카스텔로 연방국을 등에 업고 여섯 개의 마탑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흠모하던 전 대륙의 마법사들이 기꺼이 마탑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카스텔로 연방국은 빈약한 군사력을 용병과 마법사들로 완벽히 채우며 왕만 없을 뿐 대륙의 그 어떤 왕국에도 뒤지지 않는 굳건한 나라로 성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 대륙의 판세는 4강, 1중, 3약의 구도로 형성돼 있……네.”
밀러는 장황한 설명을 마치며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 마현의 눈치를 살피며 더 이상의 말은 자제한 것이다.
“흠…….”
마현은 나직하면서도 굵은 침음성을 삼켰다.
과거 자신이 하르센 대륙에서 죽은 날이 100년 전쟁이라 막 불러지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전쟁이 발발한 지 99년이 되던 해였다. 밀러는 그 후 10년 간 전쟁이 더 지속되었다고 했다. 그 전쟁 기간 동안 상당히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마현은 밀러가 가져온 지도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4강은 브루넬로 왕국, 몬테팔코 왕국, 쉬라즈 왕국, 테누타 왕국이군요. 1중은 카스텔로 연방국, 3약은 트로켄 왕국, 살트렘 왕국, 아벨리노 공국……, 맞습니까?”
“그, 그렇……네.”
밀러는 이 자리를 상당히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카스텔로 연방국에 여섯 마탑이라……. 결국 나의 죽음을 밑거름 삼아 마탑은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했군.’
마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거기에 7서클이라…….’
6서클이었던 그들이 마침내 자신과 같은 7서클로 올라서 있었던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복수의 길이 될 것이 분명했다.
마현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눈꺼풀에 가려진 눈동자에서는 지독한 살기가 맴돌았다.
그렇게 마현이 상념에 빠져든 모습을 보며 밀러는 손가락으로 옷 앞섶을 당기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마현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밀러의 눈동자에 마현이 보여준 무위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까닭이었다.
* * *
모든 기력을 짜내 응집시킨 마나가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사라지는 마나는 밀러가 쥐어짜낼 수 있는 모든 마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밀러는 허무하게 흩어지는 마나를 잡지 못했다.
그저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밀러의 눈은 마현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마현은 검으로 한 줄기 벼락을 만들어냈다.
아니 다른 이들에게는 그리 보였겠지만 밀러는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마나와 친숙한 마법사다. 마현이 만든 벼락의 실체를 단숨에 꿰뚫었다.
‘마, 마나…….’
그 벼락의 실체는 마나였다.
‘그렇다면…… 소, 소드 마스터?’
그의 짐작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마현의 검에서 다시 한 번 마나가 폭사되었다. 기사들에게는 오러라 불리는 유형화된 마나가 다시 한 번 질풍처럼 달려오는 한 기의 기사와 말을 양단했다.
푸학!
비명도 없었다.
그저 살가죽이 찢기는 소리만이 몸통이 반으로 갈라진 기사의 죽음을 알릴뿐이었다.
“미, 밀러 님.”
밀러 뒤에 서 있던 야솝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밀러는 입을 열어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밀러와 야솝이 전신처럼 우뚝 서 있는 마현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할 때, 전장을 바라보는 마현의 눈빛이 순간 바뀌었다.
“소, 소드 마스터다! 산개하라!”
마현의 무위를 알아차린 브루넬로 왕국 기사단 측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마현이 생각했던 것보다 빠른 움직임이었다.
동시에 등 뒤에서 상당한 마나들이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한 박자가 늦었지만 몬테팔코 왕국 측에서도 기사단을 출격시킨 것이다. 이것 또한 마현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빨랐다.
100년을 훌쭉 넘기며 계속되어 온 전쟁.
100년 전쟁은 분명 끝이 났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이 지금과도 같은 양상을 만들었으리라.
계획이 틀어졌다.
마현은 자신의 무위를 본 자는 모두 죽이려 했다.
고민이 깊어졌다.
하지만 판단은 빨랐다.
‘계획을 바꾼다! 일을 더욱 크게 벌이자! 더욱 크게……, 마법사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선다! 그리고 죽인다!’
마현의 몸에서 피어나는 기도가 바뀌었다.
그의 전신에서 싸늘한 죽음의 냄새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뒤로 물러나! 어서!”
마현은 검을 아래로 내리며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케이슨 용병대는 일사분란하게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나는 기척을 느끼며 마현은 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 호흡은 단전을 자극시켰고, 단전에서 잠을 자던 마력들이 화산처럼 폭발하며 노도와 같이 기경팔맥을 돌아 마현의 양팔을 거쳐 검으로 스며들었다.
우우우―
가늘게 울던 롱소드가 어느 순간 고막을 터트릴 것 같은 폭음으로 바뀌었다.
찌이이잉!
그 폭음은 사방이 아닌 마현, 자신을 피해 산개하는 브루넬로 왕국 기사단을 덮쳤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사단이 아닌 그들이 타고 있는 말들을 덮친 것이다.
푸히이잉!
거침없이 질주하던 브루넬로 왕국의 기사단을 태운 말들은 쇠를 마구 긁어대는 듯한 괴음을 참지 못하고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공포에 완전히 사로잡혀 허옇게 눈이 뒤집힌 말들은 기사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몇몇 기사들은 낙마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