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
26화
마현이 참전하고 있는 몬테팔코 왕국의 전선과 적국 브루넬로 왕국의 전선은 이삼백 미터 간격을 두고 떨어져 형성돼 있었다. 그 때문에 양국 농노병들이 서로 맞부딪히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아무런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농노병들끼리의 충돌이라지만 힘의 균형은 깨어지기 마련. 그 균형이 무너질무렵 다시 고동나팔 소리가 용병대들의 진영에 울려 퍼졌다.
“진격하라!”
용병대를 지휘하는 귀족의 명이 떨어지자 규모가 큰 용병대의 대장들이 다시 휘하 용병들을 향해 우렁차게 명을 내렸다.
“자, 모두 진격하라!”
끓어오르던 전장의 열기가 그 명에 단숨에 거세게 타올랐다.
“와아아아아!”
“우와아아!”
아군의 사기를 드높이는 함성이 용병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진격 방향은…….”
이어 다시 내려지는 명령은 함성에 파묻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용병들의 시선은 한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벌써 한 달간 지속되어온 전장이었다. 용병들은 굳이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도 언제 투입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몸으로 습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용병들의 시선을 일제히 받은 곳은 마현이 서 있는 곳에서 약간 우측 면 방향의 구릉지대였다.
그곳은 농노병들이 무참히 밀리고 있는 전장이기도 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 사이 브루넬로 왕국 쪽에서 먼저 용병들을 투입한 전장이기도 했다.
“진격!”
아래로 이어진 진격 명에 용병들은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 행보에 맞춰 마현도 앞으로 튀어나갔다.
다른 용병대의 용병들이 대부분 무작정 뛰어나가는 반면 케이슨 용병대원들은 조금 속도가 떨어져도 진영을 흩트리지 않은 채 달려 나가고 있었다.
마현 역시 급할 것이 없기에 그런 케이슨 용병대에 맞춰 달려 나갔다.
상당한 마나가 케이슨 용병대의 중앙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밀러가 만들어낸 마나의 파장이었다.
퍼벙!
달려 나가는 밀러의 손끝에서 한 덩이의 불덩이가 뿜어져나갔다.
파이어 볼이었다.
그 파이어 볼은 케이슨 용병대를 향해 달려드는 적군 용병들에게로 떨어졌다.
콰과광!
시뻘건 화염이 케이슨 용병대 앞에서 치솟아 올랐다.
“으아악!”
미처 마법을 방비하지 못했던 적군 소속의 용병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렇게 만든 혼란 속으로 케이슨과 제이든, 그리고 그레오가 적병을 검으로 빠르게 베어 넘기며 돌진했다.
마현은 그런 케이슨 용병대 뒤에서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죽어라!”
케이슨 용병대를 지나친 적군 용병 하나가 마현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마현은 롱소드를 들어 무지막지하게 아래로 내려찍는 도끼의 날을 가볍게 때렸다. 하지만 그 힘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헉!”
도끼는 단숨에 위로 튕겨져 올라갔고 그로 인해 그 용병의 앞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마현은 망설임 없이 그의 가슴을 갈랐다.
푸학!
시뻘건 피가 튀며 적군 용병은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지루한 싸움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끊어 오르고 주체할 수 없는 살기가 휘몰아치는 전장 한가운데였지만 마현에게 있어서는 지루한 전장일 뿐이었다.
일 검에 적의 목숨 하나.
착실하게 적을 베어갔지만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마현이 피와 살인에 굶주린 악마도 아니거니와 마치 어린아이들의 팔을 꺾는 것과 같은 일방적인 싸움에 오히려 불쾌감마저 들 정도였다.
“죽엇!”
그 사실을 모르는지 적군 용병들은 끊임없이 마현에게로 달려들었다.
차장창창창!
적군 용병의 모닝스타에 마현의 롱소드가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 적군 용병은 그 기세를 타 마현의 머리를 그대로 찍어 눌렀다.
그 순간 마현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부우웅!
모닝스타가 마현이 서 있던 허공을 찢는 순간이었다.
콰직!
모닝스타를 휘두르던 용병의 목이 옆으로 꺾이며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역시 조잡한 검은 내력을 이겨내지 못하는군.’
마현은 일단 급한 대로 전장에서 주인을 잃고 버려져 있는 롱소드를 발로 차 움켜잡았다.
마현은 전장을 재빠르게 훑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시간이 꽤나 흘렀다. 이제는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 마현이 원하는 이들이.
‘온다!’
전장을 살피던 마현의 눈이 반짝였다.
마현이 원하는 이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두두두두두두!
적진이 갈라지며 깊숙한 곳에서 한 무리의 인마 떼가 몰려나왔다. 바로 기사단이었다. 그들에 이어 경갑 기마대가 뒤를 이었지만 마현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기사단을 바라보던 마현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차지!”
매섭게 질주하던 기사단장의 우렁찬 명에 기사들은 육중한 랜서들을 치켜세웠다.
콰광! 콰과과광!
기사단은 앞에 걸리는 것은 모조리 부숴 버리며 돌진했다.
“으아아악!”
“크아악!”
그들의 등장은 단번에 전세를 뒤흔들어 놓았다.
마현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기사단 후미 부근이었다. 그런 마현의 눈은 기사단의 허리를 훑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후미에서 달리고 있던 한 기사의 허리에 눈이 딱 멈췄다.
위치도 좋았다.
마현의 몸이 아래로 숙여지는가 싶더니 후미에서 달리고 있는 기사를 향해 빛살처럼 쏘아져나갔다.
전력을 다해 달리는 말보다 마현의 마라환영보가 더 빨랐다. 단숨에 기사단을 따라잡은 마현은 조잡한 롱소드를 들어 달리는 말의 앞다리를 그대로 잘라버렸다.
푸학!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푸히이이잉!
말은 구슬프게 울부짖더니 더 이상 앞으로 달리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로 인해 말에 타고 있던 기사도 땅바닥에 처박혔다.
강한 충격을 받았을 텐데도 기사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며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 순간 한 줄기 검광이 기사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그의 목에 붉은 선이 생기는가 싶더니 머리가 투구째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머리를 잃은 기사의 몸은 고목나무가 넘어가듯 앞으로 쓰러졌다.
마현은 그런 그의 손과 허리에서 롱소드와 검집을 뽑아들었다.
쐐애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조악한 롱소드와는 차원이 달랐다. 또한 균형감도 나쁘지 않았다.
우우우웅!
내력을 넣자 하얀 검신이 검명을 토해냈다.
명검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내력에 부서지지는 않을 것 같아 마현은 마음에 들었다.
사실 여기서 이보다 더 좋은 검을 찾는다는 건 지나친 욕심일 터. 마현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기사의 검집을 허리에 찼다.
그 순간 마현의 눈매가 굳어졌다.
자신이 서 있던 곳 후방에서 상당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방금 이곳을 돌파한 기사단을 상대하기 위해 몬테팔코 진영에서 대규모의 기사단이 나온 것이 분명했다.
동시에 케이슨 용병대가 있는 곳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이 치솟은 것이다.
이곳은 미끼였다.
아니 이곳을 뚫고 지나간 기사단 자체가 미끼인 것이다.
브루넬로 왕국은 소수의 기사단을 이용해 몬테팔코 기사단을 이곳으로 유인한 후, 실질적으로는 케이슨 용병대가 있는 곳을 뚫으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두두두두두!
어느새 케이슨 용병대가 있는 곳으로 대규모의 중무장을 한 기사단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그냥 놔둔다면 필시 케이슨 용병대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들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그냥 둘 것인가?
살리려면 본신의 힘을 드러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시기가 너무 빠르다.
마현의 고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의 실력을 본 자는 모두 죽여 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그들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죽어서는 안 된다. 마현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다시 사라졌다.
“대, 대장!”
온몸을 피로 목욕이라도 한 듯한 그레오가 전방을 가리키며 케이슨을 불렀다.
“……밀러 님.”
“후우, 후우. 공격을 약간이나마 늦출 수는 있을까.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네.”
밀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케이슨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가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리고 눈에 띄게 지쳐 있었다.
케이슨은 바스타드 소드를 강하게 움켜잡으며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가운데다.
이곳으로 몰아쳐오는 기사단은 족히 수백은 되어 보였다. 그 거센 공세의 중앙에 용병대가 위치하고 있었다. 옆으로 피할 수도 없는 최악의 장소에 케이슨 용병대는 서 있었던 것이다.
“대장!”
제이든이 한 걸음 내딛으며 옆으로 다가섰다.
죽음을 각오한 모양이었다.
케이슨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죽음을 두려워해 잠시 나약해졌던 눈빛은 어느새 사라졌다. 그의 굳게 닫혔던 입술이 벌어졌다.
“모두 다 살 수 없다. 야솝만이라도 살린다.”
“대, 대장.”
야솝이 케이슨의 명에 기겁하며 그를 불렀다.
“마지막 명이다, 지금 당장 뒤로 도망쳐라.”
“그, 그럴 수는 없어요.”
“야솝!”
케이슨은 처음으로 노성을 내질렀다.
그러면서 손에 들고 있던 방패를 버리며 바스타드 소드를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우와아아아아!”
케이슨은 바스타드 소드를 번쩍 들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딛으려는 듯 전력으로 달렸다. 이어 제이든과 그레오, 그리고 자브라가 이를 악문 채 뒤를 이었다.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딛어야 야솝이 산다는 것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반대로 밀러는 이곳으로 몰아치는 기사단을 노려보며 몸 안에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그들이 기사단과 막 부딪히기 직전이었다.
앞으로 달려 나가던 케이슨 용병대의 앞에 검은 그림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카, 카칸?”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도 그들의 발걸음이 마현의 등 뒤에서 멈췄다.
“살고 싶으며 내 등 뒤에서 떠나지 마라!”
마현의 몸에서 감히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우우우웅!
동시에 마현이 들고 있던 롱소드에서 웅혼한 검명이 흘러나오더니 검은 빛의 오러가 서서히 맺혔다.
‘오, 오러?’
케이슨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그 뒤에 있던 제이든도, 그레오도, 자브라도.
또 몇 미터 뒤에 서서 마법을 준비하던 밀러도, 그리고 그 뒤에서 도망치지 않겠다고 발악하던 요셉도.
그들 모두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
금세라도 자신들 밟고 지나갈 듯 다가오는 무시무시한 소리도 그 순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청력을 잃은 것처럼 그들의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꿈처럼 자신들을 덮쳐오는 기사단의 모습만 서서히 커져갈 뿐이었다.
그때 마현의 롱소드가 검은 빛을 허공에 토해냈다.
번쩍!
마치 한 줄기 벼락처럼 검은 빛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그렇게 보였다. 그들의 눈에는.
푸하아아악!
랜서를 들고 달려오던 기사가 말과 함께 양단되었다. 반으로 갈라진 말과 기사의 몸뚱이는 마현의 양옆으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푸히이이잉!
“으아아악!”
거친 말발굽 소리와 말발굽에 밟혀 죽어나가는 비명소리가 대지 가득 울려 퍼졌다.
<11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