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
23화
그 수식이 끝까지 쓰여 있지 않아 정확한 건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법서에 적혀 있는 불완전한, 즉 뼈대만 있는 플라이 마법 수식이 아닌 온전한 공식임이 틀림없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마현은 밀러가 바닥에 적어놓은 플라이 마법 수식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다리를 들어 바닥에 적어놓은 글씨를 발로 지워버렸다.
“아니 지금 뭐하는 짓…….”
격앙된 목소리로 노기를 터트리다가 밀러는 입을 꾹 닫았다.
마현은 눈썹을 슬쩍 들었다 내려놓으며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자, 자네가 마법사였단 것은 알았지만 분명 1서클…….”
“비록 이런 몸이 되었지만…….”
마현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머리는 제법 좋은 편이었습니다.”
일단 마법사임을 밝힐 생각이 없었기에 거짓으로 말했다.
마현을 보며 한참을 고심하던 밀러가 품에서 주먹 반만 한 유리병을 꺼내들었다.
“최상급은 아니지만 상급 포션일세. 물론 한 병이 아니고 반병이지만.”
양은 적었지만 질은 마현이 짐작했던 것보다 좋은 것이었다.
“그럼 바꿀까요?”
마현이 손을 내밀자 밀러는 포션 병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아직 다 보여주지도 않았잖은가?”
“이 수식이면 되겠습니까?”
마현의 말에 밀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마현은 밀러의 대답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밀러는 포션 병을 가슴에 더욱 깊게 감췄다. 공식을 넘기기 전에는 결코 포션을 내줄 수 없다는 확고한 의지였다.
그 모습에 마현은 피식 웃었다.
“포션이 아니라 마법서를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제가 적어드리죠.”
“하지만…….”
망설이던 밀러는 결국 품에서 두툼한 마법서를 넘겼다.
사실 말이 서로 원하는 것을 하나씩 주고받는 공평한 거래이지,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런 포션이야 언제든지 돈을 벌어 사면 그만이지만 한 마법사의 피와 땀, 그리고 노하우가 담긴 온전한 공식은 돈 보따리를 안겨준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마현은 받아든 마법서 표지 겉면을 살폈다. 가장 위에 태양을 상징하는 무늬와 함께 그 아래에는 비교적 작은 글씨로 ‘태양의 마탑’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큰 글씨로 ‘4서클 마법서’라고 쓰여 있었고, 맨 아래에는 그동안 결코 잊지 못했던 백마법사 6인 중 한 명인 ‘이베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현은 고개를 들어 밀러를 쳐다보았다.
“태양의 마탑의 주인이 이베른입니까?”
마현은 이베른 마법의 주요 근간이 되는 힘의 종신이 태양의 신 스피네타임을 떠올렸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되겠나?”
밀러는 애타는 눈빛으로 말했다.
“내 세세히 알려줌세.”
“알겠습니다.”
마현은 밀러의 그런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기에 일단 마법서를 들어 플라이 마법 공식이 적혀 있는 곳을 펼쳤다.
그 페이지에는 플라이 마법의 뼈대를 이루는 주요 공식들이 빼곡하게 인쇄돼 있었다. 그리고 그 수식 사이사이에 밀러의 글씨로 짐작되는 글들이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마법서를 읽어 내려가던 마현은 미간을 살짝 좁히더니 종이를 홱홱 넘겨 다른 부분도 살폈다.
“흠…….”
마현은 다시 플라이 마법 부분을 펼치며 밀러를 쳐다보았다.
“왜, 왜 그런가?”
“밀러 님의 능력이라면 다른 마법서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이런 마법서를 잡고 끙끙거리신 겁니까?”
마탑의 이름을 달고 나온 마법서라서 그런지 오류도 없고, 꼭 필요한 공식도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물론 한 가지 마법을 두고 마법사마다 중심이 되는 공식은 같지만 그 공식을 구현하기 위한 방식은 다 다르다.
마치 그림을 그릴 때 똑같은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쓰는 물감 배합이나 붓질 요령, 그리고 그리기의 순서가 다 다른 것처럼 마법의 구현도 그와 비슷한 이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의 활용도와 구현방식을 알려주지 않고 달랑 마법 수식만 던져주는 것은 온전한 마법서라고 보기 어렵다.
그것은 마치 요리에 ‘요’자도 모르는 이에게 요리 재료를 툭 던져놓고, 어떤 요리를 지정해 저걸 만들라고 하는 것이나, 건축의 ‘건’자도 모르는 이에게 성을 짓는데 필요한 재료들을 알려주고는 성 하나를 지으라는 것과 똑같은 짓이다.
밀러가 가진 마법서에는 최소한 적혀 있는 공식들이 어떤 쓰임을 하는지 일언반구의 설명조차도 기술되어 있지 않았다.
“현재 마법서는 여섯 마탑에서 판매하는 것 이외에는 구할 수 없네.”
“……?”
“마탑에서 마법사 간의 개인적인 마법서 판매를 금지한 지 오래일세.”
밀러의 설명에 마현은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혹여나 검증되지 않은 잘못된 마법 수식으로 인해 귀중한 인재를 잃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일세.”
결국 마탑에서 마법 자체를 독점하겠다는 뜻이었다.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대략적인 상황이 짐작되었다.
자신을 사라진 후 더는 눈치 볼 것이 없어진 그들은 우월적인 힘을 앞세워 마법을 독점했을 것이 뻔했다.
마현은 과거 한때 스승이자, 현재는 여섯 마탑의 마탑주로 의심되는 여섯 늙은이들을 떠올렸다. 그런 마현의 눈동자에는 은은한 살기가 감돌았다.
“그나저나 먼저 해줄 수는 없겠는가?”
밀러의 목소리에 마현은 재빨리 살기를 지웠다.
“알겠습니다.”
마현은 밀러에게서 건네받은 펜으로 플라이 마법의 완성된 공식을 적어나가며 입을 열었다.
“참, 밀러 님.”
“으, 응?”
밀러는 눈이 빠져라 마현의 펜 끝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소소한 부탁 하나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가?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주겠네.”
“다른 건 아니고……,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한 번만 제 편이 되어주십시오.”
“자네 편? 그러겠네.”
온통 마현의 펜 끝에 사로잡힌 밀러는 대수롭지 않게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마현은 단숨에 플라이 마법 공식을 적은 후 마법서를 밀러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밀러는 먹이를 낚아채는 한 마리 독수리처럼 마법서를 움켜잡았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품에 넣지는 못했다. 마현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강하게 움켜잡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아!”
밀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으며 다른 한 손으로 포션을 넘겼다.
“잘 쓰겠습니다.”
마현의 인사에 밀러는 묵묵부답이었다. 마치 며칠 굶은 사람이 음식을 탐하듯 그 사이 마법서에 고개를 푹 파묻고 있었던 것이다. 마현은 포션병을 잠시 만지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상 치료를 위해 조용한 곳을 찾기 위함이었다.
어제는 그저 내상이 더 도지는 것을 막기 위함인지라 운기조식 중에 누군가가 건드려도 크게 탈이 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운기조식을 통해 포션의 기운으로 내상을 다스린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이때는 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민감해지 때문에 조금이라도 외부에서 충격이 가해진다면 자칫 목숨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다.
하지만 마현이 현재 머물고 있는 곳은 전장의 한가운데였다.
조용히 운신할 만한 마땅한 곳이 있을 리가 없다
‘이거 참.’
입맛을 다시던 마현의 눈에 곧게 뻗은 나무 한 그루가 들어왔다. 마현은 천천히 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괜찮군.’
마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은 이른 새벽이라서 그런지 돌아다니는 이들도 별로 없었다. 마현은 투명화 마법으로 몸을 숨긴 채 한 마리 제비처럼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한 바퀴 멋들어지게 공중제비를 돈 마현은 나무 꼭대기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아슬아슬하게 나무 꼭대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과거라면 꿈도 꾸지 못할 방법이었지만 허진의 진신마공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마현에게 있어 이런 일은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지상에 바람이 없어도 십여 미터 높이에서는 제법 거센 바람이 불 때가 많다.
오늘 새벽도 그랬다. 제법 거센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대고 있었지만 마현은 원래 나무의 한부분인 것처럼 안정되게 앉아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마현은 밀러에게서 받은 포션을 입에 털어 넣었다.
비린 맛이 가장 먼저 느껴졌지만 그런 맛은 이내 청량함에 가려졌다.
포션을 마시자마자 마현은 마라역천공의 구결에 따라 내력을 일으켰다.
“큭!”
투명화 마법을 시전하느라 조금 무리를 했던지 애써 재운 고통이 깨어났다.
그 고통에 투명화 마법이 깨질 뻔했지만 어느새 포션이 그 고통을 다시 재우기 시작하면서 내력의 역행만은 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마현은 포션이 가진 힘을 다스려 단전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순차적으로 서클로 보냈고, 다시 기경팔맥으로 올렸다.
두둑! 두두둑!
마현의 몸에서는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쉼 없이 흘러나왔다.
현재 내상의 가장 치명적인 원인은 바로 주요 혈맥을 꽉 막고 있는 황사의 내력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런 황사의 내력이 포션과 마현의 내력을 이기지 못하고 타버리며 마현의 혈맥을 끊임없이 두드려대고 있었다.
그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는 장장 1시간이나 이어졌다.
마현의 몸이 그로 인해 들썩이면서 나무 꼭대기는 강한 바람에 대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몹시 흔들렸다.
그리고 1시간이 더 흘렀다.
창백하던 마현의 혈색이 점차 붉어졌다.
“후우우.”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긴 숨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대단하군.’
상급 포션이 가진 순수한 기운만 따진다면 마환단과 마교 최고의 비전 영약인 마령단의 중간쯤이 될 것이다. 이것만으로는 마현의 내상을 완전히 치유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거기에 트롤의 피가 포션의 주재료라서 그런지 약간의 독도 들어 있었다.
츠츠츠츳!
마현의 정수리, 백회혈에서 녹색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포션이 가진 양날의 검, 바로 트롤의 피가 가진 독이었다.
대략 30여 분에 걸쳐 온몸에 퍼졌던 독 기운을 몰아내 내상요법을 끝마치며 눈을 떴다.
‘포션에 이런 힘이 담겨 있었다니…….’
마현의 눈동자에는 놀라움이 가득 차 있었다.
과거 포션을 접했을 때와 지금 접하는 느낌은 가히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거 완전히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였군.’
과거 자신, 그리고 현재 이 하르센 대륙의 모든 이들은 포션이 가진 진정한 힘의 십분지 일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놀라움 속에는 진한 아쉬움이 숨겨져 있었다.
아직 독처럼 번져 있던 황사의 내력으로 인해 다쳤던 혈맥이 완전히 아물지 못했다.
그리고 단전은 깨끗하게 치유했지만 그 단전을 감싸고 있는 일곱 개의 서클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만약 상급 포션이 반병이 아니라 한 병이었다면, 그게 아니라 최상급 포션 반병이었다면 온전히 내상을 치유했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들었지만 마현은 바로 털어내 버렸다.
그러자 마현의 입술에는 흡족한 웃음이 깃들었다.
가장 큰 문제였던 황사의 기운을 모조리 태웠고, 그로 인한 혈맥의 상처는 남은 이틀의 시간이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여전히 불안정한 일곱 개의 서클이었지만 그것도 이틀이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당분간 마법사임을 숨길 생각이니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허진의 독문무공을 익혔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마음만 먹으면 이곳에서 검사로 행세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