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
21화
어차피 한 번 겪었던 일이다.
마현은 망연자실해 봐야 달라질 것은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자의든 타의든 하르센 대륙에서 중원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방법을 알 수는 없지만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중간에 의식을 잃었다지만 순간이동 마법진이 황사의 내력과 뒤섞이며 증폭한 것을 이미 경험한 상태였다.
그만한 힘만 얻으면 된다.
8서클, 아니 드래곤 고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9서클까지 오른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중원에 대한 생각은 잠시 잊기로 했다.
어차피 황사가 죽었으니 모든 일들은 순조롭게 마무리 될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마현은 여섯 명의 백마법사를 떠올렸다.
‘기다려라, 중원으로 가기 전 네놈들의 목을 따줄 테니.’
마현의 눈동자는 심해처럼 깊고 차가워졌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마현은 야전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긋난 뼈 마디마디와 기혈이 엉킨 내부가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지만 마현은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러라고 했던가?’
마현은 의식을 잃기 전 자신을 돌봐준 마법사를 떠올렸다.
일단 그를 만나야 했다.
지금이 몇 년도인지, 이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그리고 그 여섯 마법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를 통한다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반드시 살아있어라, 그리고 이왕이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라. 그래야만이 이 빌어먹을 인생에 자그만 선물을 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마현은 힘겹게 걸음을 내딛어 군막을 벗어났다.
복잡한 마음을 식혀줄 시원한 바람을 기대했지만 마현의 코끝을 가장 먼저 찌른 것은 비릿한 혈향이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많은 군막들과 그 사이 사이에 피워진 모닥불, 그리고 그 주변을 오가는 용병들이었다.
한눈에 이곳이 전장임을 깨달았다.
‘아직 백년전쟁이 끝나지 않은 것인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정확한 것은 아직 모른다. 마현은 밀려드는 의문과 상념들을 우선 접어두고 밀러를 찾았다.
“일어났는가?”
마현이 찾던 밀러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자신이 있던 군막과 그 옆에 세워진 군막 사이에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밀러와 어제 잠시 스치듯 본 자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아침식사 후 보려갈 참이었네만……. 일단 여기로 앉게나.”
밀러의 말에 그 옆에 앉아 있던 야솝이 공간을 내줬다.
마현은 그들 사이에 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잠시 따로 뵐 수 있겠습니까?”
“나를?”
밀러가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 행동에 마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말고 일단 자리에 앉게. 성하지 않은 몸이 아닌가?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한다네. 자자, 어서.”
밀러는 손짓으로 마현을 불렀다.
“앉으세요.”
요셉도 자리를 가리키며 그릇에 스프를 담아 내밀었다.
“실례하겠소.”
마현도 일단 몸을 추스르는 것이 우선임을 잘 알기에 자리에 앉으며 그릇을 받아들었다.
“여기.”
요셉은 그런 마현에게 딱딱하고 거친 검은 빵 하나를 내밀었다. 돌덩이 같은 검은 빵을 받아 쥔 마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스프에 적셔 한 입 베어 물었다.
거친 빵에 멀건 스프였지만 마현은 기계처럼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뒤틀리고 엉킨 내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 바탕이 되는 몸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빵 하나와 스프를 말끔히 비운 마현은 빈 그릇을 요셉에게 내밀었다.
“고맙소.”
마현은 케이슨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미 자리에 앉기 전 사람들이 그에게 암묵적으로 허락을 받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그가 이들 무리를 이끄는 자임을 파악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니오.”
케이슨의 넉넉한 미소를 대하며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볼 수 있을까요?”
“너 정체가 뭐지?”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내가 마현에게 불쑥 물었다. 고개를 돌리자 식사를 마치고 단도 끝으로 이를 쑤시던 제이든이라는 사내가 입 꼬리를 히죽 말아 올리며 마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연히 마현의 눈매도 가늘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케이슨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이든!”
“쳇!”
케이슨의 만류에 제이든은 단도를 품에 넣었다. 그리고 팔짱을 끼며 등 뒤에 서 있는 나무에 등을 기댄 후 눈을 감아버렸다.
케이슨은 그런 제이든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후 마현을 올려다보았다.
“이해하시오. 워낙 낯을 가리는 성격이니. 그보다…….”
마현 쪽으로 몸을 살짝 숙이는 케이슨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지 모르나 이왕이면 여기서 하는 게 어떻겠소?”
케이슨은 턱으로 조금 전까지 마현이 앉아 있던 곳을 가리켰다.
앉으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마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시다시피 여기는 전장이오. 이래저래 그쪽을 수소문했지만 아는 이들이 없었소.”
그 순간 마현의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당신이 입고 있는 생소한 옷으로 보아 왕국 소속 군병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어찌된 일인지 용병들 중에서도 그쪽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오.”
“그 말씀은 내가 적병일 수도 있다는…… 뜻이오?”
케이슨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현은 일단 케이슨의 뜻대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말인즉, 한 차례 접전 후 퇴각할 때 죽어가는 나를 데려와 치료를 해주었다는 뜻이겠고?”
케이슨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결국 적을 데려와 치료한 것이 아닐까 의심한다는 뜻이겠구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소.”
“아쉽게도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소.”
마현의 말에 케이슨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챙.
동시에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제이든이 롱소드를 뽑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너, 이 새끼! 솔직히 불어, 브루넬로 왕국 쪽 용병이지?”
더 이상 케이슨도 제이든을 말리지는 않았다.
“분명 대답을 안 하겠다고 한 게 아니라,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만?”
마현의 말에 케이슨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리더니 손을 들어 롱소드를 들고 있던 제이든을 저지했다.
“그 뜻은?”
“기억이 없소.”
마현은 제이든의 눈을 빤히 직시했다.
“흐음…….”
제이든은 미약한 침음성을 내뱉었다.
“대장. 이 새끼, 지금 거짓말하는 겁니다.”
케이슨은 제이든의 말에 바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해줄 수 있겠소?”
“내가 이 순간을 모면하려고 아무 말이나 해도 믿겠소?”
마현은 제이든을 슬쩍 쳐다보았다.
어차피 거짓이다.
하지만 거짓을 진실로 만들려면 더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마현은 잘 알고 있었다.
“훗!”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케이슨은 옅은 웃음을 내뱉으며 제이든에게 검을 다시 넣을 것을 명했다.
“젠장!”
제이든은 롱소드를 착검했지만 검자루에서 손은 떼지 않았다. 자리에 앉지 않은 채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도 기억나지 않소.”
“곤란하군.”
케이슨은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름은?”
“카칸.”
“카칸이라……. 제이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케이슨이 제이든을 불렀다.
“예, 대장.”
“용병길드로 가서 카칸이라는 이름을 찾아봐.”
전쟁이 터지면 많은 용병들이 고용된다.
그렇다 보니 전장 후방에는 어김없이 임시로 용병길드가 세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의 생사 확인, 정확한 고용비 계산 등과 같은 중요한 일들을 비롯해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특히나 이런 국가적인 규모의 전쟁에서 왕국이 일일이 용병들을 하나하나 챙겨줄 수가 없다. 그래서 용병길드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용병들을 고용한 왕국은 왕국대로 용병길드만 상대하면 되고, 용병들은 머리 아프게 귀족들을 만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알았습니다.”
제이든은 케이슨의 명에 마치 꼬투리라도 하나 잡았다는 듯 매섭게 마현을 노려본 후 곧장 자리를 떴다.
생각지도 못하게 복작하게 일이 꼬인 듯싶었다.
그렇지만 마현은 표정이나 행동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마현의 머릿속엔 수많은 수들이 떠올랐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인가?”
밀러의 목소리에 마현이 눈을 떴다.
“아닙니다. 직접 지은 이름입니다.”
“마법사가 꿈이었던 모양이군. 그런데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나?”
“……?”
마현이 고개를 돌려 밀러를 빤히 쳐다보자 그는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하네. 어쩌다 보니 자네 심장 부근을 살펴보게 되었네.”
마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무의식적으로 왼쪽 심장 위로 손을 얹었다. 그곳에는 처음 무림에서 마법을 익히기 위해 서클을 만들다가 부서진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물론 그 일이 전화위복이 되어 지금의 단전에 서클을 두르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잘된 일인가?’
“아!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기억이 나네요.”
자브라가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활짝 웃었다.
“혹시 그 이름……. 왜 이십여 년 전에 전신(戰神)으로 명성을 떨치다가 희대의 악마가 된 그자. 그 이름 맞죠, 밀러?”
그 물음에 밀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풍문으로는 마기에 잠식되어 마왕을 현신시키려다가 마탑주들의 손에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로 인해 흑마법사들이 모조리 죽거나……. 어머, 미안해요. 밀러.”
사소한 이야기였지만 마현은 제법 많은 정보를 유추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