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
12화
“허어, 구금상단마저…….”
청명진인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말을 마친 율기의 혼백은 초점이 없는 눈으로 마현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마현이 강제로 율기의 혼백을 부숴 말문을 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터널 레스트(Eternal rest)!”
회색빛 율기의 혼백에 검은 불이 붙었다. 그 검은 불은 순식간에 율기의 혼백을 먹어치우며 활활 타올랐다. 어차피 율기의 혼백은 상처를 입어 영원히 중천에서 떠돌 것이다.
그럴 바에야 혼백을 지워주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렇기에 마현은 영원한 안식을 주는 흑마법으로 율기의 혼백을 지운 것이다.
“무서운 자들이야.”
걸왕의 말에 청명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여 년 동안 이런 암계를 이어온 것도 무서웠고, 쥐도 새도 모르게 중경에 들어서 있다는 것도 무서웠다.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걸왕이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일단 시선을 차단시킬 필요가 있을 듯 보입니다.”
“어떻게?”
“이 일의 배후에 마교가 있음을 천하에 공표하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율기의 시신이라면 충분히 납득할 것입니다.”
“흠…….”
“저들이 이 일이 성공했다고 믿게 만든다는 말이냐?”
걸왕은 깊은 생각에 빠졌고, 청명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확한 의중을 물었다.
“그렇습니다. 뼈아픈 성공을 했다고 믿게 만드는 겁니다. 힘들겠지만 무당파에서 당분간 사로잡은 포로들을 관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외부적으로는 모조리 죽은 것으로 알리겠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래야 더욱 뼈아픈 성공이라 믿을 겁니다.”
“그렇게 하마.”
솔직히 버거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이미 그들을 억류하는 것과 동시에 일시적으로 무공을 폐해놓은 터라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후,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저들을 먼저 칠까 합니다.”
“선공에 속전속결이라…… 나쁘지 않은 계략 같아 보이는구나.”
걸왕이 오랜 침묵을 깨고 마현의 계략에 동의했다.
“무당파는 움직이기 어려울 테니 개방이 나서서 정파의 힘을 모아 무림맹, 정확히 말하자면 제갈세가와 검림 출신, 금의군 출신의 진유림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
“황사와 그의 손에 살인병기로 길러진 일천의 병사들은 마교에서 맡겠습니다.”
“속전속결의 일인데, 그게 가능하겠느냐?”
“문제없습니다.”
걸왕은 마현이 개방총타주를 통해 마교로 보낸 서찰을 떠올렸다. 오늘 새벽에 있었던 무당파의 일를 제외하고는 상세한 상황이 전달되었을 터, 지금쯤 마교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상황 판단을 마쳤을 것이다.
“하지만 중경까지는 족히 한 달 이상…….”
걸왕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제 힘이라면 하루면 중경으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네놈의 그 괴물 같은 요상한 마공이라면 가능하겠구나.”
“아무리 그래도 저 역시 준비가 필요한 법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청명진인님.”
마현은 걸왕에게서 시선을 떼고 청명진인에게로 눈을 돌렸다.
“말하거라.”
“무당파에 만년한옥과 만년온옥이 있는지요?”
“많은 양은 아니지만…… 있다만?”
“그것을 제게 내어주실 수 있겠는지요?”
“내주마.”
만년한옥과 만년온옥이 귀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아주 구할 수 없는 물건도 아니기에 청명진인은 흔쾌히 허락했다.
“감사합니다.”
만약 무당파에서 만년한옥과 만년온옥을 구하지 못한다면 워프게이트진을 만들기 위해 족히 일 주일 이상이 걸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교에 들렸다가 다시 중경으로 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당파에서 만년한옥과 만년온옥을 구한다면 중경을 먼저 거쳐 워프게이트진을 구성한 후 바로 마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넉넉히 삼 일 정도면 마교의 병력을 중경으로 데려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삼 일이라…….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군.”
걸왕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걸왕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상 날이 길어진다면 지금의 계책이 틀어질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촉박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시가 급하니 빨리 움직여야겠다.”
“만년한옥과 온옥은 지금 내어주마.”
걸왕의 말에 청명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문인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약 일 각 후 상당량의 만년한옥과 온옥을 가지고 돌아왔다.
“무당파에 있는 모든 만년한옥과 온옥이다.”
많은 양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제법 되는 양이었다. 이 정도의 양이면 족히 세 개 이상의 워프게이트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현은 워프게이트진 세 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을 제외하고는 다시 청명진인에게로 돌려주며 걸왕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당파는 오늘로 임시 봉문을 하고 마교가 침입한 것으로 무림맹에는 거짓 정보를 보내마.”
“학성에게는 미처 인사를 전해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주십시오.”
마현은 청명진인과 인사를 한 후 걸왕과 함께 무당파를 나섰다.
* * *
“흠…….”
송겸은 바위처럼 무거운 신음을 애써 삼켰다. 그 뒤로 한참이나 무거운 침묵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런 그의 앞에 금대치와 후동관, 그리고 제갈묘가 앉아 있었다.
금대치는 그저 눈을 감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며, 후동관은 그답지 않게 붉은 얼굴로 수염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제갈묘 역시 얼굴을 깊이 파묻고 있었다.
하지만 제갈묘의 입술은 순간순간 옆으로 찢어지려 하고 있었다.
‘이럴 때 웃으면 안 되는데.’
제갈묘는 더욱 고개를 깊게 숙이며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하지만 자꾸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 했다.
오늘 오전이었다.
개방을 통해 전해온 무당파의 참사.
개방 제자를 구슬려 들은 바에 의하면 거의 봉문 직전까지 갈 뻔했다는 것이다. 생각 이상의 힘을 보여준 무당파의 저력이 한편 살 떨리게 하긴 했지만, 어차피 무당파는 반쯤 무너진 거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렸다.
거기에 생각지도 못한 율기의 죽음과 오천여 명의 진유림 검사들의 죽음.
당장 그 힘이 사라진 것은 아쉽지만 먼 미래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잘된 일. 앞에서 고개를 숙인 후 은밀히 힘을 키우면 송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날이 더 빨리 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제갈묘는 먼 미래의 일은 접어두고 우선은 당면한 문제에 골몰했다.
‘지금쯤 각 문파의 장문인들과 가주들은 난리가 났겠지?’
지금 알려질 대로 알려진 이 일로 무림맹 소속 각 문파와 세가의 수장들은 상당한 경각심을 가졌을 터. 자신의 입김이 더해진다면 무림맹은 빠르게 자신을 중심으로 집결할 것이다.
무당파의 반대로 미뤄졌던 마교 정벌 또한 다시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얼마 동안 지금처럼 황사를 받들어야 하겠지만 까짓것 허리 몇 번 숙이면 그만일 것이다.
‘그리고 마교 정벌에서 개방의 힘을 줄여야겠어. 이왕이면 걸왕도 제거하고…….’
제갈묘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만들어졌다.
“대치야, 동관아.”
송겸의 목소리에 제갈묘는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예, 스승님,”
“하명하십시오.”
“율기와 조범의 죽음으로 만들어낸 토대다. 하늘에서도 웃을 수 있게, 그리고 역사에 그 둘의 이름이 충신으로 남을 수 있게 만들어 주자구나.”
송겸의 목소리에 금대치와 후동관이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
송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후 제갈묘를 쳐다보았다.
“맹주.”
“예, 황사.”
“그대도 무림사에 남을 이름이 중요할 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주시게.”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열흘 후에 출정식을 가질 수 있게 준비하시게.”
그리하지 말라고 해도 그리할 것이다.
제갈묘는 다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나가 보거라.”
송겸은 손을 휘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휴우.”
송겸은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하늘 꼭대기로 올라서는 해를 쳐다보았다. 햇살 때문에 눈가에는 주름이 잔뜩 그려졌다.
“크흠, 햇살이 따갑군.”
눈부신 햇살을 한참이나 올려다본 것 때문인지 벌게진 눈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송겸은 눈물을 손가락으로 찍으면서도 태양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이 아프나 그보다 가슴이 더 시리고 먹먹했다.
‘폐하!’
비록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황제의 분노한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만세(萬世)가 단순히 만세가 아닌 살아 있는 역사가 돼야 하옵니다. 그에 따른 업보는 이 늙은이가 지고 가겠사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욕심으로, 아니 대물림된 욕심으로 활짝 피지도 못한 채 그늘에서 저물어야 했던 두 제자의 얼굴도 떠올랐다.
‘죽어서 이 죄를 달게 받겠다.’
벌겋게 충혈되고 눈물로 범벅이 된 눈으로 송겸은 붓을 들었다. 햇살에 사물이 흐릿했지만 송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붓을 놀렸다.
* * *
아직 해도 저물지 않은 초저녁.
황제는 모든 내관과 궁녀를 물린 채 근심이 가득 찬 얼굴로 홀로 술잔을 들고 있었다.
‘짐이 황제였던가, 아니면 황사가 황제였던가?’
술잔을 내려놓는 황제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요즘처럼 무능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주던 신하들은 없었다.
모두가 황사의 뜻대로 움직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뜻이 만백성들에게 알려지기는커녕 자금성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오로지 자신에게만 충성해야 할 삼만의 금의군 중 일만이 낙향했다. 사실 말로만 낙향이지 지금쯤 황사의 충실한 손발이 되었음을 황제는 느끼고 있었다.
입안이 너무나도 써 술을 들이켰는데도 입안은 전보다 더 깔깔해지고 있었다.
‘믿을 자가 없구나, 믿을 자가…….’
황제는 분풀이를 하듯이 다시 술잔을 털었다.
그때 원인 모를 기이한 빛과 함께 마현이 황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동시에 황제의 신변을 보좌하던 네 명의 수신호위가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내 황제의 축객령에 다시 모습을 감췄다.
“그대의 등장은 언제나 짐을 놀라게 하는구나.”
황제는 손을 뻗어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