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
5화
자칫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직까지 영약의 힘이 내력 속에 남아 있던 터라 백회혈의 찢어진 부위는 순식간에 치유되었고 이윽고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버렸다.
영약의 기운이 송겸의 단전에 담겨 기경팔맥을 따라 십이주천(十二週天)했다.
단전이 만들어지고 찢어지고 다시 아물기를 열두 번.
감겨 있던 송겸의 눈이 떠졌다.
번쩍!
태양보다도 눈부신 황금빛 안광이 터져 나왔다.
“으음!”
송겸의 입에서 흡족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고, 한창 힘을 쓸 때인 이십 대의 그때처럼 온몸에서는 힘이 넘쳐흘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유가 벗어놓은 옷을 입고는 계단이 있는 석문 앞으로 다가갔다.
송겸은 주먹을 꽉 말아 쥐며 석문을 노려보았다.
주먹에서 힘이 느껴졌다.
빈약한 주먹인데 단단한 석벽을 부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이래서 무인들이 기를 쓰고 영약과 최고의 상승무공서를 찾아나서는 것인가?’
하지만 송겸은 석문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지는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던 송겸이 오랜 망설임 끝에 주먹을 들어올렸다. 왜냐하면 그 석문을 완전히 폐쇄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후우.”
숨을 크게 내쉰 송겸은 눈을 감은 후 주먹을 내질렀다.
콰광!
그의 주먹에 석문이 단번에 부서졌다.
콰르르르, 콰과광!
석문이 부서지자 석실 자체가 심하게 요동쳤다. 석문에 설치된 벽력탄이 그 충격으로 터진 것이다. 그로 인해 그의 서실에서 지하 석실로 이어진 통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산산이 박살이 난 석문을 바라보는 송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고작 일 할의 힘을 흡수했을 뿐인데…….’
부서진 석문의 두께는 일 척에 가까웠다.
‘온전히 힘을 얻는다면 무림을 폐하께 바치는 것도 시간문제다.’
송겸은 부서진 석문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벽 한 곳을 눌렀다.
그그극!
그러자 숨겨져 있던 석문 하나가 활짝 열렸다.
‘한 달이다! 한 달이면……, 무림은 황제 폐하께 무릎을 꿇을 것이다!’
송겸은 내력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는 은신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곳은 삼대에 걸쳐 황궁보고와 서고에서 몰래 빼돌린 영약과 상승무공으로 암암리 키워낸 병기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그곳을 가리켜 송겸과 제자들은 진정한 유림, 진유림(眞儒林)이라 불렀다.
* * *
폭!
날카로운 칼날이 진필성의 몸을 꿰뚫었다.
푸학!
붉은 피가 탁자 위로 흩뿌려졌다.
“크으으!”
진필성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결국 네놈이…….”
진필성은 자신의 복부를 검으로 찌른 자, 우검호법의 소매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결국 그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진필성은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털썩 주저앉은 진필성의 눈앞에는 반쯤 비어 있는 찻잔이 눈에 들어왔다.
“산공독의 맛이 제법 입에 맞았는지 모르겠소.”
그런 진필성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제갈묘가 양손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이, 이노옴!”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였지만 결코 크지 않았다. 오히려 힘겹게 제갈묘를 부를 따름이었다.
“좌검호법, 아니 요 형.”
우검호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는 좌검호법을 불렀다.
“선택하시오.”
“……?”
“나는 요 형과 함께하고 싶소. 아울러 검림도 주겠소.”
그제야 정신을 차린 좌검호법은 재빨리 검병(劒柄)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그의 의도대로 검을 뽑을 수 없었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이 등 뒤에서 좌검호법의 목으로 뻗어 나온 것이었다.
“……!”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금속의 서늘함이 목에서 느껴졌다.
“쉽게 검을 뽑으면 피를 보게 되지요.”
눈동자가 떨리며 좌검호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등 뒤에서 좌검호법의 목에 검을 겨눈 이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 나왔다.
그는 바로 율기였다.
우검호법은 좌검호법을 보며 다시 말했다.
“요 형. 나는 진심으로 요 형과 함께하고 싶소.”
“우, 우검호법.”
좌검호법은 힘들게 입을 열어 우검호법을 불렀다.
“이제 나는 우검호법이 아니라 후동관이오. 이제는 이름을 찾으려 하오.”
“잠시의 말미를 주시오. 잠시의…….”
“좌검호법, 쿨럭! 무슨 생각이 필요한 것인가, 당장…… 컥!”
피를 토하며 소리치던 진필성의 목에 검이 꽂혔다.
제갈묘의 검이었다.
우검호법, 아니 후동관은 피 묻은 검을 닦는 제갈묘에게 가볍게 목을 숙이고는 다시 좌검호법, 요추광을 거쳐 율기를 쳐다보았다.
“율기야, 준비가 다 되려면 얼마나 걸리겠느냐?”
“이미 준비를 마쳐놓았습니다, 형님.”
원래는 사형제 관계라 사형, 사제의 호칭이 맞지만 둘은 여전히 형과 동생으로 지내고 있었다.
“유, 율기라면?”
후동관도 놀랐지만 제갈묘도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침착하게 표정을 수습했다.
“형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율기였다.
“시간이 없다 하오. 반 각, 반 각의 시간을 주겠소.”
그 말을 끝으로 후동관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조용한 적막이 짙게 깔렸다.
요추광의 숨결이 서서히 거칠어졌다. 질식할 것만 같은 적막이 그의 심장을 무겁게 짓누른 것이다.
‘이것이었나? 림주가 걱정하던 것이……, 그래서 나에게 우검호법의 뒤를…….’
요추광은 눈을 감고 있는 후동관을 쳐다보았다.
“우검호……, 아니 후 형. 알고 있었소?”
요추광의 질문에 후동관이 눈을 떴다.
“내가 후 형의 뒤를 밟았다는 것을…….”
“하지만 림주에게 모든 것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소.”
후동관의 대답에 이번에는 요추광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알고 있었구나, 그는 알고 있었어.’
또한 그의 대답은 자신의 의지를 꺾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요추광은 눈을 떠 이미 절명한 진필성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그다지 충심이 생기지 않던 주군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대세에 따르겠소.”
그래서 요추광의 대답 또한 무거웠다.
“율기야.”
“예, 형님.”
율기가 검을 회수하며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십여 개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헉!”
“헙!”
제갈묘와 요추광은 동시에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그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강시였던 것이다.
율기는 그들의 그런 반응에 실소를 지으며 한 강시가 들고 있던 목함을 받아들고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 이게 무엇이오?”
제갈묘는 고개를 들어 율기를 쳐다보았다. 율기는 더욱 진한 웃음을 머금으며 탁자를 눈으로 가리켰다. 그 행동에 제갈묘가 조심스럽게 목함을 열었다.
제갈묘의 눈이 화등잔처럼 크게 떠졌다.
목함 안에는 세 알의 백력탄이 들어 있었다. 그저 암암리에 무림에 나도는 조잡한 벽력탄이 아니라 황군이 사용하는 벽력탄인 것이다.
“이 정도면 누가 봐도 마교의 짓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제갈묘는 침을 삼키며 율기와 후동관을 쳐다보았다.
“내일 정파 무림맹에 경종이 또 한 번 울려 퍼질 것이오.”
“……?”
“무당파!”
제갈묘의 눈동자가 커졌다.
“오백여 구의 강시들과 백여 개의 벽력탄. 이것으로 충분히 무당파를 이 땅에서 지울 수 있을 겁니다.”
율기의 부연 설명에 제갈묘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사, 상인이라는 분. 그러니까 그대들의 스승이란 분의 진정한 정체가 무어요?”
“우리의 스승님은…….”
후동관이 제갈묘 앞으로 다가왔다.
“황사이시오.”
“화, 황사? 그렇다면…….”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명분은 우리에게 있소.”
후동관이 제갈묘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무림은 이제 제갈 대협의 것이 될 것이오.”
제갈묘의 시선이 후동관에서 율기, 강시를 거쳐 벽력탄으로 차례로 이동했다.
“스승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무것도 없소. 그저 황제 폐하의 굳건한 충신이 되는 것 외에는 말이오.”
율기의 음성은 참으로 달콤했다.
잠시 후, 무림맹주실에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 * *
갑작스러운 빛 무리에 휘감긴 걸왕은 현기증을 느꼈다. 정신도 차리기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상방주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분명 하북 천진에 위치한 개방총타주의 목소리였다. 문제는 그 목소리가 지금 들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태상방주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고, 그와 동시에 걸왕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빛으로 먹먹했던 시야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눈앞에 서 있는 이는 정말로 개방총타주 궁개였다.
걸왕은 궁개를 쳐다보며 믿기지 않아 눈을 껌뻑거렸다.
“헛것이 보이나?”
걸왕은 양손을 올려 두 눈을 비볐다.
“태, 태상방주님?”
그 모습에 궁개가 오히려 당황했다.
“이제는 헛소리까지 들리나?”
걸왕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눈을 한껏 부릅떴다. 여전히 눈앞에는 궁개가 서 있었다. 한참을 궁개의 얼굴을 쳐다보던 걸왕은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지겹도록 눈에 익은 개방총타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걸왕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태, 태상방주님?”
궁개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걸왕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벌써 노망이 난 건가?”
당연한 것이다.
그는 방금까지 북경에 있었다.
빛 한 번 번쩍였다고 수백 리 밖에 있는 개방총타가 눈앞에 보일 리는 없었다.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어나시죠, 선배님.”
걸왕은 누군가가 자신을 부축하며 일으켜 세우는 손길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보니 마현이 거기 서 있었다.
걸왕의 눈동자가 슬쩍 커졌다.
그제야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 빛 무리는 바로 마현이 만들어냈음을.
“개방총타가 맞으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걸왕 선배님.”
마현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걸왕은 눈을 껌뻑거리며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궁개를 쳐다보았다.
“너 정말 궁개 맞냐?”
“그, 그렇습니다.”
궁개의 대답을 들으며 걸왕은 마현을 쳐다보았다.
“정말 개방총타 맞냐?”
걸왕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마현의 표정에 얼굴을 확 구겼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개 같은 능력이 있나!’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북경에서 순식간에 개방총타로 이동한 것을.
왜냐하면 떡하니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말이다.
안절부절못하던 궁개는 걸왕이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말을 건넸다.
“큰일이 났습니다, 태상방주님.”
“큰일?”
“무림맹주 진필성이 마교의 소교주 마현의 손에 절명했다고 합니다. 하여 현재 제갈 총사가 닷새 후 무림맹 회의를 열겠다고 했습니다.”
“뭐? 누가 누구의 손에 죽어?”
걸왕은 궁개의 보고에 가뜩이나 정신이 없는 머리가 더욱 어지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