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
2화
총관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린 후 송겸은 송채모를 노려보았다.
“송 북진무사.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동창 뇌옥에서 아이들을 빼놓게.”
“알겠습니다.”
“이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할 게야!”
송겸의 눈에서 시퍼런 살기가 번뜩였다. 그 살기에 움찔한 송채모의 목이 자라목처럼 어깨 사이로 파묻혔다.
* * *
‘젠장, 내 살다 살다 이 진귀한 음식을 입으로 먹는지 콧구멍으로 먹는지 모를 날이 오다니.’
그것만이면 차라리 다행이다.
걸왕은 그답지 않게 깨작깨작 먹고 있음에도 도통 속이 더부룩한 것이 영 소화도 되지 않았다. 하기야 그 난리를 한바탕이나 쳤으니 제대로 소화되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이런 진미들이 모래알보다 더 까칠하니…….’
걸왕은 젓가락으로 밥알 몇 개를 입에 넣으며 마현을 슬쩍 쳐다보았다. 무슨 강단이 저리도 좋은지 마현은 느긋하게 음식을 음미하고 있었다.
“입에 맞지 않느냐?”
“예, 예?”
걸왕은 당황한 나머지 젓가락을 입에 문 채 황제를 쳐다보았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느냐고 물었다.”
“컥! 쿨럭쿨럭!”
음식을 삼키다가 갑자기 말을 하려니 목구멍이 탁 막혔다. 결국 기침을 해대다가 물을 벌컥벌컥 마셔 겨우 목구멍을 뚫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 자체가 또한 황제에 대한 불경이 아닌가?
걸왕은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
“화, 황공하옵나이다.”
“껄껄껄. 그대는 마교 소교주와는 너무나도 다르구나.”
그런 모습에 황제는 즐거운 듯 웃음을 터트렸다.
‘니미, 이거…….’
가뜩이나 죽을 맛인데 마현까지 얄밉게 굴자 이건 숫제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차라리 목숨을 내놓고 필패의 싸움을 해도 이것보다 더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대는 참으로 맛있게 먹는구나.”
마현이 때를 맞춰 수저를 내려놓는 것을 보며 황제가 말했다. 마현의 겉모습이 그리 보였을 뿐 그도 그다지 편히 밥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황제와 기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황제 폐하의 성은에 그저 황공할 따름이옵나이다.”
약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아차 하는 순간 그에게 이끌려 신료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렇기에 마현은 상당히 뻣뻣하게 나갔다. 강제로 자신을 신하로 삼아도 결코 고분고분하지도 않을 것이며 오히려 골치가 아플 것이라는 기색을 은근히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현의 완전한 오판이었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는 황제다.
그의 말 한 마디면 어느 누가 목이 날아가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역대 최고의 황권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황제에게 정적이란 없었다.
오로지 측근이 되고자 하는 자들만 있을 뿐.
물론 충정에 말을 거스르는 자들은 하나둘 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자신이 원해서 얻지 못한 신하는 없었다.
그런데 마현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현의 그런 모습은 오히려 황제의 눈에 더 들었고, 마음을 더욱 흡족하게 할 뿐이었다. 한편으론 완고한 마현의 마음을 느꼈기에 약간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하지만 짐은 그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확고하게 결심을 굳히며 시중을 들고 있는 궁녀에게 다과를 내올 것을 명했다.
이어 다과상이 나온 후 차와 다과를 거의 다 비울쯤이었다.
“폐하, 대전에 모든 신료들이 들었나이다.”
태 환관이 다가와 대전회의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왔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흐른 것인가?”
“그러하옵니다.”
“반 각 후에 가겠노라 전하라.”
“예, 폐하.”
태 환관이 나가고 궁녀들이 안으로 들어와 다과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폐하, 황사 송겸이 알현을 청하옵나이다.”
“황사가?”
황제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부르지도 않은 황사가 대전회의에 맞춰 입궐했다. 거기에 먼저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황명을 내릴 때까지 자중하고 있으라 전하라.”
“예, 폐하.”
하지만 황제의 명은 송겸에게 순순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듯했다.
“폐하! 소신 송겸이옵나이다. 부디 알현을 윤허해 주시옵소서! 폐하!”
밖에서 약간 소란한 소리가 들려온 후 송겸의 절절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
황제는 입을 굳게 다물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거듭된 송겸의 소리에 결국 황제는 눈까지 감았다.
우당탕탕탕.
“아니 되옵니다, 황사!”
“화, 황사!”
다시 일어난 소란.
콰당!
그 끝에 방문이 활짝 열리며 송겸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황제 앞으로 달려가 방바닥에 머리를 쿵 찧었다.
“폐하!”
뒤를 이어 황망한 얼굴을 한 환관들이 안으로 우르르 달려 들어와 그런 송겸을 끌어내려 했지만 황제가 조용히 손을 저었다. 환관들은 황제의 명에 고개를 조아리며 일제히 물러났다.
“황사는 오늘 짐을 여러 번 실망시키는구려.”
황제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해이옵니다, 모함이옵니다, 폐하!”
송겸은 다시 한 번 머리를 바닥에 쿵 찧으며 절절하게 소리쳤다.
“그저 그 소리를 하려고 온 곳이오, 황사?”
“소신의 충정을 어찌 그리 몰라주시나이까.”
“황사의 충정이야 누구보다 짐이 잘 아오. 하오만…….”
송겸은 황제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황사는 짐에게 언제나 과함은 모자람보다 못하다 했소. 짐에게 중용(中庸)의 묘를 가르쳐준 황사가 어찌 그런 것인지 짐은 알다가도 모르겠소.”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상당히 무거운 질책이 송겸에게 내려졌다.
“하오나 중용만으로 이상적인 정치가 어렵다고 폐하께서는 늘 소신에게 말씀을 하셨사옵니다.”
“그래서 짐이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한 것이오.”
황제는 송겸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오나 폐하. 넓은 아량으로 무림이라는 곳을 그냥 놔두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하옵니다.”
송겸의 말에 황제의 시선이 자연스레 마현과 걸왕에게로 향했다. 송겸의 말이 아주 틀린 말도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무림이 있기에 이 나라도 존재하는 법입니다.”
마현이 황제와 송겸의 대화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송겸이 고개를 돌려 마현을 노려보았다. 둘 사이에 시퍼런 시선이 오갔다.
“무림이 있어 이 나라도 존재한다?”
“이 나라의 치안을 누가 담당한다고 여기십니까?”
“당연히 관이 아니더냐.”
“명목상 관에서 합니다.”
“……?”
마현이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황제의 자리에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당연히 황제의 눈빛이 반짝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치안은 각 무림문파에서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옵니다, 폐하.”
“망발이옵니다, 폐하. 무엄하다. 어찌 가벼운 세 치 혀로 황제 폐하를 현혹시키는 것인가! 어서 망발을 멈추지 못할까!”
송겸은 몸을 부르르 떨며 마현을 향해 고래고래 엄포를 놓았다.
“조용.”
황제는 송겸의 말을 가로막았다.
“흥미로운 일이고, 짐이 모르는 이야기로구나.”
마현은 황제의 시선을 받으며 걸왕에게 매직마우스를 날렸다.
『걸왕 선배님, 선배님이 나서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걸왕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소신이 말씀을 올리겠나이다.”
황제의 시선이 마현에게서 걸왕에게 옮겨갔다.
“불과 십여 년 전 녹림십팔채와 장강수로채라는 산적과 수적들이 있었사옵니다.”
“녹림십팔채와 장강수로채? 산적과 수적들도 하나의 단체를 만들었단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허어……, 그들이 떼를 이뤘다면 백성들의 피해 또한 만만치 않았겠구나.”
“실질적으로 수많은 민초들과 상인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었사옵니다.”
“그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이제는 없겠고?”
“물론 자그만 산채들과 수채들이 여전히 존재하오나 그 피해는 과거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할 정도이옵니다. 그 당시 중원 전역을 공포로 떨게 했던 녹림십팔채와 장강수로채를 무림맹이 나서서 토벌을 했사옵니다.”
“아주 잘한 일이다. 그런데 무림맹에서 그러한 일을 했다고?”
황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적과 수적은 지근거리에서 민초들의 삶의 터전을 수시로 위협하는 범죄집단이었다. 당연히 그런 산적과 수적의 토벌은 무림이 아닌 관에서 해야 한다.
“그 당시 관과 협조를 한 것인가?”
“아니옵니다. 순전히 무림맹에서 행한 일이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관에서 그들을 토벌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 가장 주된 이유이옵니다.”
“무어라?”
황제의 음성에 노기가 담겼다.
십여 년 전이라면 자신의 치하(治下)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황제의 입장에선 노기가 끓어오를 법 했다.
“당시 관에서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무공을 익혔다는 것을 근거로 하나의 무림 방파로 인정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굳이 관에서 나설 이유가 없다는 것이옵니다.”
“허어! 어찌 그런 일이!”
“하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관이 직접 나서 그들을 토벌을 해봤자 힘만 들고 그로 인해 얻는 것은 거의 전무했기에 다들 기피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쾅!
이어진 걸왕의 말은 결국 황제의 심기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이 말이 사실인가, 황사?”
언제나 송겸에게는 반 존대로 일관하던 황제의 어투가 달라졌다.
“소신도 그 부분은 잘…….”
황사도 들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세세한 것까지 신경 써 본 적이 없었기에 잘 모르는 부분이다.
“크흠!”
황제는 대놓고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며 걸왕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걸왕은 잠시 끊었던 말을 다시 이었다.
“민초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황명이 아니라 그들 앞에 드리우진 주먹이옵니다.”
걸왕의 직설적인 말에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땅에 관이 없는 곳은 있어도 무림이 없는 곳은 없사옵니다. 무림은 그런 곳에서 민초들과 함께하고 있사옵니다.”
마현이 걸왕의 말을 마지막으로 거들었다.
“그렇기에 무림은, 아니 무림인들은 황제 폐하의 자랑스러운 신하들이옵니다.”
담담하게 걸왕의 말을 거들었지만 마현은 내심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사실 어찌 보면 걸왕의 설명은 궤변에 가까웠다. 물론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무림에서 자파의 이익과 무관하게 민초들을 위해 움직이는 문파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속사정이야 어찌되었든 나름 자정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민초들의 삶에 얇지만 울타리를 만들어준 것 또한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관의 힘이 닿지 않는 곳에서 민초들의 보호막이 되어준다는 것인가?”
걸왕과 마현의 구구절절한 설명 때문인지 황제의 눈빛에 호감이 묻어나왔다.
송겸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부드러워진 황제의 어투 때문이었다.
“폐하, 그렇기에 무림을 결코 그대로 놔두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옵니다.”
황제는 다시 송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탐탁지 않았지만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로서 그 어떤 의견도 무시하지 않으려는 그의 자세 때문이었다.
“관의 힘이 닿지 않은 곳에서 마치 왕처럼 군림하는 자들이 무림인들이옵니다. 그건 한마디로 이 넓은 땅에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맹수들을 풀어놓은 것이나 매한가지이옵니다. 그렇기에 길들일 수 있는 맹수들은 길들이고, 길들여지지 않는 맹수들은 말살시켜야 하는 것이옵니다!”
송겸은 목에 핏줄까지 세우며 역설했다.
“또한 무림을 온전히 관에 편입시킨다면 이 나라의 국력 또한 역사상 찾을 수 없으리만큼 강대해질 것이옵니다, 폐하!”
마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제야 송겸의 저의를 보다 분명히 깨달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