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25화
“꿀꺽!”
종희당은 처참하게 바뀐 별채의 모습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당장 박 환관과 남진무사에게 사람을 은밀히 보내게.”
“아, 알겠습니다. 대인.”
조자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자 아래 서 있는 마현의 곁으로 내려왔다.
“내일이면 황실과 조정이 뒤집혀지겠군. 마 소협.”
“예, 대인.”
“오늘 내 집에서 하루 묵게나.”
“……?”
마현은 뜻하지 않은 권유에 놀란 눈으로 조자경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내일 동이 트자마자 황제 폐하를 알현할 수도 있을 게야.”
조자경이 이리 말하는 것을 보면 실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뜻일 것이다.
“걸왕이라는 자도 데려올 수 있으면 오늘밤 데려오게.”
조자경의 굳은 눈매 아래, 그의 입술이 얄팍하게 말려 올라갔다.
* * *
마현은 조자경이 내준 객방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주군, 마침 걸왕께서 저녁에 북경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개방 북경 지부로 보냈던 왕귀진이 돌아와서 마현에게 전음으로 보고했다.
『그래?』
『네. 소식을 전했으니 조만간 이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마현이 중경에 들린 후 걸왕은 부지런히 북경으로 길을 나선 모양이었다.
『수고했다. 편히 쉬도록.』
마현은 운기조식을 하며 고갈된 서클 단전을 다시 채웠다. 그렇게 약 반 시진이 흘렀을까.
피곤함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았고, 서클 단전에 내력을 다 채우지는 못했지만 주위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마현은 조용히 눈을 떴다.
“대협, 안에 계십니까?”
조자경의 명에 장원을 떠났던 종희당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그사이 조자경이 명한 일을 처리하고 다시 장원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들어오시지요.”
마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종희당이 안으로 들어왔다.
“대인께서 대협을 찾으십니다.”
종희당은 전과 달리 마현을 아주 조심스럽게 대했다. 아마도 조금 전 별채에서 일어났던 싸움 때문일 것이다.
왜 안 그러겠는가?
종희당이 비록 집사지만 조정을 움직이는 핵심 관료의 수족이었다. 그렇다 보니 알게 모르게 듣고 본 것이 있다.
그가 알기로 금의군 별군은 가히 천하제일의 군대였다. 그런 군대를 단숨에 박살냈으니 마현을 그리 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대인께서?”
“동창의 박 도독과 윤 남진무사께서 함께 자리하고 계십니다.”
종희당은 마현의 반문에 세세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렇군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마현이 침상에서 내려오자 종희당은 방문 앞에서 문을 열었다. 마현은 급작스럽게 바뀐 종희당의 태도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따라나섰다.
종희당을 따라가는데 장원의 종복으로 보이는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웬 늙은 거지가 손님을 찾습니다.”
그 말에 종희당이 마현을 쳐다보았다.
“혹 걸왕이라고 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요.”
“종 집사님. 내일 저와 함께 궁으로 들어가셔야 할 분입니다. 개방도인지라 집사님께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종희당은 마현이 무슨 부탁을 하는지 곧 알아차렸다.
“너는 지금 하녀 몇을 데리고 가 그분을 씻겨라. 그리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게 한 후 대인의 서실로 데리고 오너라.”
“알겠습니다요, 집사 어르신.”
하인이 종종 걸음으로 사라지고 종희당은 다시 마현과 함께 조자경의 서실로 향했다. 가는 길목에 장원의 마당이 있었는데 꽤나 시끌시끌했다.
금의군과는 기운이 비슷하지만 복장이 다른 사내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별채를 급습했던 금의군 별군을 포박한 후 압송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들이 동창이군.’
마현은 장원의 마당을 지나 조자경의 서실로 들어섰다.
“쉬는데 다시 불러서 미안하네.”
종희당의 안내로 서실에 들어서자 조자경과 한 번 본 적이 있는 윤심배, 그리고 그 옆에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마른 중년인이 한 명 앉아 있었다.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얼굴에 사내면서도 수염이 하나도 없는 매끈한 턱을 하고 있어 조금은 묘하게 보이기도 했다.
마현은 직감적으로 그 사내가 동창의 도독인 박인태임을 알아차렸다.
“괜찮습니다, 대인.”
마현은 조자경이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여기가 내가 말한 마교의 소교주요.”
“마현이라고 합니다.”
“박인태입니다.”
가냘픈 목소리였지만 여느 사내 못지않게 박력이 느껴졌다. 상당히 날카로운 그의 눈에서는 진중한 기도가 은연중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이 몸은 아직까지 그대를 믿지 못합니다.”
박인태는 마현의 눈을 직시했다. 물론 마현도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다른 것 때문에 부른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경고할 것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마현은 ‘경고’라는 단어에 심기가 불편해졌지만 담담한 얼굴로 받아들였다.
“내일 아침 황제 폐하를 알현할 시 조금이라도 불경한 모습이 보인다면……, 이참에 마교를 떠나 무림을 말살시킬 겁니다.”
박인태의 말에 마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잘 새겨두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박인태는 자기가 할 말만 툭 던져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들어가야 하지 않나요, 남진무사?”
그 말에 윤심배도 어색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으로 바쁜 밤이 되겠네요. 그럼 아침에 뵙지요, 조 대인.”
박인태는 조자경에게만 인사를 건넨 후 서실을 나가 버렸다.
“그럼 다음에 보지요.”
윤심배가 무안한 얼굴로 마현에게 인사를 건넨 후 그를 따라 사라졌다.
“불쾌했다면 내가 사과를 하겠네.”
“아닙니다, 대인.”
불쾌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자경이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 일이 끝나면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위인이었다. 그렇기에 마현은 그것을 마음에 담지 않았다.
단 한 가지만 빼고.
‘마교를 건드린다면 말살되는 건 황실도 매한가지일 것이다.’
* * *
이슬이 채 마르기도 전인 이른 아침.
마현과 걸왕은 말끔한 관복으로 차려입은 채 건청궁 앞에 서 있었다.
조자경과 어젯밤 본 박인태, 그리고 윤심배가 먼저 건청궁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고 있었다.
“이거 참! 크흠!”
걸왕은 뻣뻣하게 날이 설 정도로 다림질이 잘 된 관복이 불편한지 연신 불만스런 음성을 토해냈다.
『불편하십니까?』
『넌 안 불편하냐?』
걸왕은 마현을 노려보았다.
『조금 거추장스럽기는 해도 불편한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어색하기는 하군요.』
마현은 그런 걸왕의 시선을 담담히 외면하며 농을 던졌다.
『그나저나 이렇게 보니 신수가 훤해 보이십니다.』
걸왕의 말끔한 모습에 사실 마현은 적잖게 놀랐다. 꾀죄죄할 때는 몰랐지만 이렇게 씻기고 관복으로 갈아입혀 놓으니 연륜과 중후함이 물씬 풍겨났기 때문이었다.
『이놈아, 차라리 욕을 해라! 크흠!』
자금성 안이라 둘은 전음으로 소소한 농을 주고받았지만 그런 식의 대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건청궁으로 들어서는 문이 열리고 조자경과 박인태, 그리고 윤심배가 나온 것이다.
“윤허가 났네. 들어가 보시게. 아! 그리고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서 봄세.”
조자경과 윤심배는 서둘러 그 자리에서 떠났다.
“내 말 명심하세요. 결코 허언이 아닙니다.”
박인태 역시 그 말을 톡 쏘아부친 후 조자경과 윤심배를 뒤따랐다.
“안으로 드시지요.”
나이 어린 환관의 안내에 따라 마현과 걸왕은 건청궁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에는 여의주를 문 거대한 금룡(金龍)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있었다.
그뿐인가?
그 아래 황금으로 뒤덮인 기둥마다 역시나 금룡이 시퍼런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런 금룡 중심에 아홉 마리의 용이 조각된 보좌가 있었다.
건청궁 내부는 한마디로 화려함을 넘어 웅장하고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나 마현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옥좌 바로 위에 걸려 있는 거대한 편액이었다.
정대광명(正大光明).
‘바른 것을 밝힌다.’
한자를 보며 그 뜻을 막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무엄한지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대전 안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용상 옆에 서 있는 늙은 환관이 시뻘건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껄껄껄. 됐느니라.”
그제야 마현은 금빛 구룡포를 입고 앉아 있는 황제를 볼 수 있었다.
“그래, 구경은 다 했느냐?”
“마교의 대공자 마현이 황제 폐하를 알현하나이다.”
마현은 이미 바싹 엎드려 있는 걸왕 옆으로 한 걸음 나가 바닥에 엎드렸다.
“고개를 들라.”
황제의 명에 마현은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그를 쳐다보았다.
“저, 저런 불경한 자를 보았나!”
황제를 직시한다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다.
그렇기에 늙은 환관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태 환관.”
황제는 고개를 돌려 늙은 환관을 조용히 불렀다.
“하오나 폐하.”
“짐이 괜찮다고 했느니라. 물러나 있거라.”
태 환관이라는 자의 얼굴에서는 불만이 지워지지 않았지만 황제의 명에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그대인가?”
그리고는 앞뒤 없는 질문을 마현에게 던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소인은 이해할 수 없사옵니다.”
“한밤중에 짐을 찾아오지 않았느냐?”
“…….”
마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짐은 그대가 다시 찾아올 줄 알고 있었느니라.”
“불경을 저질렀다면 하해와도 같은 황은으로 용서해 주시옵소서.”
“배포가 큰 자로구나, 껄껄껄.”
황제는 웃음을 터트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어제와 오늘에 걸쳐 들었느니라. 짐의 입장에서는 사실 무림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느니라. 허나 그대의 독대를 윤허한 까닭은 순수하게 그대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황공하옵니다.”
마현은 허리를 살짝 숙였다가 다시 폈다.
“그래, 무림의 일은 무림으로 끝내고 싶다고?”
“그러하옵니다, 폐하.”
“짐이 허락하면 그대는 짐에게 무얼 줄 수 있겠는가?”
“…….”
마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무림을 주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짐이 무림을 주면 그대 역시 짐에게 그에 걸맞은 것을 하나 줘야 하지 않겠느냐? 아니 그러한가?”
마현은 황제의 질문에 잠시 눈을 감았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지만 황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기다려주었다. 반짝이는 황제의 눈빛은 마치 호기심이 가득한 아이와 비슷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마현이 눈을 뜨며 황제를 쳐다보았다.
“소인이 황제 폐하에게 드릴 것은 단 하나뿐이옵니다.”
“그게 무언가?”
마현과의 대화가 재미가 있었는지 황제의 몸이 앞으로 살짝 숙여졌다.
“폐하의 목숨이옵니다.”
마현의 대답이 재미가 없었던지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짐의 목숨이라고 했느냐?”
황제의 목소리도 어느새 차가워졌다.
“그러하옵니다.”
쾅!
황제는 노기 가득한 얼굴로 용상을 내려쳤다.
“무엄하구나!”
하지만 마현은 여전히 황제를 쳐다볼 뿐이었다.
“감히 짐의 목숨을 담보로 삼다니…….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느냐?”
황제의 수염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소인 역시 지금 목숨을 걸고 독대를 청하기는 매한가지이옵니다.”
“증명하라!”
마현을 향한 황제의 눈빛은 싸늘했다.
“명 받자옵니다, 폐하!”
마현의 몸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휘익― 탁탁탁탁!
동시에 황제 곁으로 남진무사 소속 네 명의 대영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콰드드득!
건청궁 바닥에 깔린 대리석에 금이 갔다.
그리고 부서졌다.
―키키키키키!
―캬캬캬캬캬!
그 넓은 건청궁 대전에 삼백 구의 다크 스켈레톤이 대리석 장판을 부수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건청궁 내부는 짙은 마기로 가득 찼다.
<10권에 계속>